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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263화 (263/315)

263화

Noblesse

우진의 말은 어찌 들으면 너무 거창하고 막연하게만 들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아름답고 멋진 건축을 한다는 말 자체가, 너무 추상적인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진의 말에 담긴 본질은 ‘아름답고 멋진 건축’에 있지 않았다.

다만 WJ 스튜디오라는 회사가 앞으로 나아갈 때, 모든 가치 중에 가장 우선시할 ‘건축’이라는 하나의 키워드에 있음을 이야기하기 위한 수식일 뿐이었다.

종걸은 우진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그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였고.

그래서 그의 대답이 무척이나 멋지게 느껴졌다.

‘WJ 스튜디오라는 회사가 이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엔……. 확실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군.’

사업이라는 것은 오로지 돈만을 바라보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너가 돈과 자본만을 좇다 보면 사업체는 중심을 잡기 어렵고, 그러다 보면 결국 회사는 무너지고 만다.

종걸은 이러한 이치를, 불혹이 훨씬 넘어서야 깨달았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이자 천웅건설의 회장 천명철이라는, 훌륭한 스승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앉아있는 이십 대의 젊은 사업가는, 본능적으로 그러한 이치를 따르고 있었다.

놀랍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진이 한 이야기들을 잠시 음미한 종걸이,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WJ 스튜디오에는, 앞으로 정말 많은 돈이 필요하겠군요.”

종걸의 그 말에, 우진이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세계에서 가장 멋진 건축을 하려면, 한두 푼이 필요한 건 아닐 테지요.”

종걸도 웃으며 다시 말했다.

“서 대표가 지금 잡고 있는 그 중심을 잃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세계 최고의 건물을 디자인하고 건축할 수 있을 만큼이요?”

우진의 당돌한 반문에, 종걸의 웃음이 좀 더 짙어졌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나침반이 고장 나지만 않는다면 말이지요.”

종걸이 말하는 나침반이라는 것은, 우진이 지금껏 잃지 않고 있는 건축에 대한 열정이자 꿈일 것이었다.

우진은 그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고, 그래서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오늘 처음 만나 그리 오래 대화를 나누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종걸은 우진이 갖고 있는 본질을 알아봐 주었으니 말이다.

“내 이야기가 아니어도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계신 것 같지만…….”

마지막 말을 속으로 곱씹고 있는 우진을 향해, 종걸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돈이라는 것은 마치 인격체와 같아서, 자신에게 너무 집착하는 사람으로부터는 오히려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

나지막한 종걸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그것만 기억하신다면, 서 대표의 나침반이 망가질 일은 없을 것 같군요.”

* * *

천웅건설 사옥의 꼭대기에서.

종걸과 우진의 대화는 생각보다 더 길게 이어졌다.

서로 공통분모가 많은 같은 업계의 오너이다 보니, 대화할 이야기는 무궁무진했던 것이다.

물론 우진이 가진 식견이나 역량은, 아직 종걸이 가진 것에 비하면 많이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오랜 세월 동안 채워진 연륜과 경험이라는 것은, 우진으로서도 쉬이 따라갈 수 없는 부분이었으니까.

다만 미래를 경험했던 우진에게는 종걸이 갖지 못한 통찰력이 있었고, 그래서 대화는 결코 일방적이지 않았다.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서 대표.”

“저도 마찬가집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식사를 대접한다는 이야기에 어디 밖으로 나가나 싶었지만, 그들은 저녁 식사까지도 사옥 내에서 함께하였다.

우진이 종걸과 이야기를 나누던 바로 그 옆방에, 고급 레스토랑 못지않게 훌륭한 음식들이 세팅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맛있는 음식까지 배부르게 먹은 우진은, 정말 기분 좋게 천웅 사옥을 나설 수 있었다.

게다가 우진은 그 와중에, 나름의 실속(?)까지도 하나 챙겼다.

“아 그리고 서 대표.”

“예, 대표님.”

“아까 준 브로셔는, 퇴근 후에 한번 꼼꼼히 읽어보겠습니다.”

“아, 하핫. 감사합니다.”

최근에 만들어진 <청담 아르코>의 브로셔를 챙겨 와서, 종걸에게 타이밍 맞춰 슬쩍 건넨 것이다.

물론 명목은 건축과 디자인이었다.

우진이 생각하는 건축과 디자인의 방향성.

그것을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종걸에게 브로셔를 건네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안에 다른 꿍꿍이도 가지고 있었다.

‘천종걸 대표 이사쯤 되면, 충분히 노블레스라고 할 수 있지.’

아르코는 한국의 최고 상류층을 타겟으로 런칭 될 것이다.

그리고 그만한 상류층에게 이 청담 아르코가 얼마나 어필이 될지는, 종걸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크게 기대는 없지만, 만약 천 대표가 관심을 보인다면…….’

종걸과의 만남이 끝나고 성수로 돌아오는 길.

우진은 오늘의 만남이 앞으로 그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 더욱 궁금해지기 시작하였다.

* * *

천종걸 대표와의 특별한 만남이 있고 난 뒤.

우진의 일상은 다시 여느 때처럼 바쁘게 흘러가고 있었다.

1월이 끝나고 2월이 다가오면서, 개인적으로나 사업적으로나 많은 일들이 진행된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일들 중에도 우진이 최근 가장 많이 신경 쓴 것은, 바로 이천시 지구단위계획과 관련된 일들이었다.

특히나 우진이 신경 쓸 수밖에 없는 부분은, 다름 아닌 건축가협회와 관련된 일들.

작정하고 판에 뛰어든 건축가협회에 물을 먹여 주려면, 한시도 긴장을 놓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금성설계사무소>는 좀 알아봤어, 형?”

우진의 말에, 진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아봤지.”

“어때?”

“네가 말한 대로 협회 소속 설계사무소긴 하던데, 딱히 어떤 정황 같은 건 찾지 못했어.”

“흠……. 그래?”

“내가 뭐 흥신소 수준으로 뒷조사를 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깊게 파보지는 못했는데…….”

“아, 나도 그렇게까지 원한 건 아냐.”

“여튼 확인된 건, 협회 쪽이랑 친분은 확실히 있다는 정도?”

“그렇군.”

“정황만 봤을 땐, 공모 자체는 아주 정상적으로 입찰 들어간 것 같았어.”

“오케이. 알겠어 형.”

연초 조용현 국장과의 통화가 있었던 뒤.

우진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진태를 통해서 <금성설계사무소>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는 일이었다.

<금성설계사무소>와 건축가협회 사이의 비리를 찾아내어, 그들을 쳐내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도시계획설계 공고에 이 업체 한 곳만 공모입찰을 들어온 것은 못마땅했지만.

당장 이곳을 쳐내는 것은, 우진의 입장에서도 여러모로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확증을 찾기도 힘들겠지만, 찾아서 쳐낸다고 해도 재입찰 공고를 띄우고 하면 시간이 한 달은 딜레이 되겠지.’

게다가 이번 기회에 건축가협회에 제대로 한 방 먹여 주기 위해서는, 그들이 발을 쉬이 뺄 수 없도록 좀 더 깊숙이 들어올 수 있게 유도해야 했다.

일단 도시계획설계 입찰까지는, 저들이 의도한 대로 눈감아 주는 것이 여러모로 나은 선택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진태에게 <금성설계사무소>에 대한 조사를 맡긴 것은 겸사 겸사였다.

만약 조사 과정에서 협회와 연관된 떡밥을 찾아낸다면 차후 협회를 공격할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일단 이곳에서 도시계획설계를 진행하게 될 테니, 실제로 실력이 있는 곳인지도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만약 너무 실력이 없는 곳이라면, 계획이 딜레이 되더라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럼 그 부분은 됐고…….”

우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업체 실력은 어때?”

그 질문에, 이번에는 생각지 못했던 반응이 나왔다.

“이 부분은 뭐, 따로 알아보고 할 것도 없었어.”

“그건 무슨 말이야?”

우진의 반문에, 진태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였다.

“도시계획 쪽에서는 워낙 유명한 회사더라고.”

“아…… 그래?”

“국책사업 경험도 상당한 것 같고……. 이쪽으로 포트폴리오가 워낙 많아서,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어.”

성수지구 설계 공모 때와 달리, 이번에는 협회에서 확실히 실력 있는 업체를 밀어 넣었던 것이다.

‘하긴.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는 않겠지.’

그래서 우진은 일차적으로 안도할 수 있었다.

만약 이번 업체가 너무 실력이 부족하다면, 시간적으로 큰 손해를 보더라도 어떻게든 갈아치워야 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네.’

협회 입장에서는 우진이나 다른 업체에 밀리지 않으려고 실력 있는 회사를 밀어 넣은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우진에게는 도움이 된 셈이었다.

“여튼 알아봐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아르코 프로젝트는 잘 진행되고 있지?”

“다진건설 쪽 회신 기다리고 있어.”

“회신은 지난번에 왔던 것 아냐?”

“아, 설계확정은 끝났고, 이제 일정 잡아야지.”

“그렇군. 일정 나오면 바로 회의 잡아 줘.”

“알겠어.”

진태가 대표실에서 나가고 나자, 우진은 곧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이어서 그가 전화한 사람은, 다름 아닌 조용현 국장이었다.

“네, 국장님. 통화 가능하시죠?”

[예. 가능합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하하, 다른 건 아니고요. 제가 지난번에 나름대로 검증 한 번 해본다고 했었잖아요?”

[아……! <금성설계사무소>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네, 그렇습니다.”

[어떻던가요? 저희 문화국에서는 내부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봤거든요.]

“제 생각도 같습니다.”

[오, 그럼 진행할까요?]

“넵! 진행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조용현 국장과 통화하면서, 우진의 시선은 달력에 가 있었다.

‘일단 지금까지는 일정에 무리 없고……. 이대로라면 내달 말이나 3월 초쯤에는 택지분양이 가능하겠어.’

그리고 우진의 표정이 조금 더 밝아졌다.

<천년의 그대>의 번외 편까지 전부 방영이 끝나면 2월 말이 되고.

한창 최고의 주가를 달릴 그쯤에 택지분양을 올리는, 최상의 시나리오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한 가지 변수는 역시 감사인데…….’

궁금한 것이 생긴 우진이, 다시 수화기에 대고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국장님.”

[네, 대표님.]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그 감사 건……. 혹시 시작된 건가요?”

우진의 질문에, 조용현이 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거, 어제부터 시작됐어요.]

그리고 그 목소리의 원인을 짐작한 우진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힘드시겠네요.”

[뭐, 다른 거야 힘들 게 없는데, 페이퍼웍이 진짜 고통이죠.]

“강도가 꽤 센가 보네요?”

[그러게요. 뭐 털어먹을 게 있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흐음…….”

[대표님께서도 미리 준비 좀 해두세요. 아마 저희 쪽 감사 끝나면, 바로 대표님께 넘어갈 것 같으니까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대충 제 쪽으로 언제쯤 넘어올 것 같은가요?”

[음……. 아무래도 한 달은 걸리지 않을까요?]

“한 달이라……. 이천시 쪽 감사가 끝나는 데 걸리는 시간인 거죠?”

[그렇죠. 대표님께선 결국 외부 관계자고 감사를 할 땐 항상 내부감사가 먼저니까.]

“알겠습니다, 국장님.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진의 말에, 조용현 국장이 조금 궁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런데 대표님, 시기는 왜 물어보세요?]

그리고 그 질문에, 우진이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냥 얻어맞고만 있을 순 없잖아요? 이쪽에서도 한 방 먹여줘야죠.”

[네?]

우진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그런 게 있습니다. 여튼 프로젝트는 문제 없을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국장님.”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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