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방해꾼
연말에는 행사가 많다.
그것은 어떤 기관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경우 그렇다.
일 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며.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과정 안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까지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특히나 인맥으로 시작되어 인맥으로 굴러가고 있는 건축가협회와 같은 기관은, 일반적인 경우보다도 더 행사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협회장 권주열은, 오늘도 중요한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하하, 이게 누구신가. 우리 후배님 아니신가.”
“잘 지내셨습니까, 선배. 별일 없으시지요?”
“나야 뭐 별일 있겠는가. 일단 앉지.”
권주열이 오늘 만난 사람은, 그의 한 학번 후배이자 국토교통부의 운영지원과에 재직 중인 김지환이었다.
비록 일이 잘 풀리지는 않았지만, 성수지구 통합 설계라는 큰 건을 물어다 줬던 바로 그 후배.
김지환은 그의 인맥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중요한 인물이었고, 그래서 바쁜 연말에도 이렇게 챙겨서 약속까지 잡은 것이었다.
삼청동에 있는 단골 술집에서 만난 두 사람은, 기분 좋게 웃으며 술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연말이라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시간 내줘서 고맙네.”
주열의 인사에, 지환이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선배님. 저야말로 이렇게 잊지 않고 매번 챙겨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지요.”
“하하. 올해는 내가 미안해서라도 자네를 챙기지 않을 수가 없었어.”
“네? 그게 무슨…….”
“성수지구 설계건 때문에 말이야.”
“아, 그것…….”
“자네가 그렇게까지 신경 써줬는데, 멍청한 놈을 믿었다가 말아먹지 않았는가 말이야.”
이제는 시간이 좀 지났지만, 성수지구 설계 건에서 헛발질했던 일은 아직까지도 두 사람에게 뼈아픈 상처였다.
발표 날 무력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였던 이호설계사무소를 빠르게 손절함으로서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거의 반년에 걸쳐 판을 까는데 들어간 노력과 수고는, 그대로 매몰 비용이 되어버린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 매몰 비용이라는 것이 꼭 금전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맥과 권력이라는 것도 결국 무한히 솟아나는 자원이라고 볼 수는 없었으니까.
권력은 마치 전장의 무사들이 사용하는 무구(武具)와 같아서.
휘두를 때마다 조금씩 무뎌지는 것은 물론, 그것을 ‘잘’ 사용하지 못한다면 더 빨리 이가 빠지게 되는 법이다.
“후후. 그게 선배님 실책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자네에게 미안해야 할 일은 맞지.”
“좋은 날, 기분 좋게 만났으니, 그런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다시 하시죠.”
“하하. 알겠네. 그럼 술이나 한잔 더 받으시게.”
“그렇지 않아도 그 건과 관련해서, 드릴 이야기도 좀 가져왔습니다.”
“오호라. 기대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쨍-
다시 한번 잔을 부딪친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기분 좋게 나누었다.
성수지구 건을 제외하더라도 두 사람이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는 꽤 많았고.
다른 프로젝트들은 대부분 순항 중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술이 좀 들어가고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결국 올해 가장 뼈아픈 실패였던 성수지구 프로젝트의 이야기는 다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권주열은, 그들이 공들여 깔아 놓은 판을 날름 가져간 서우진이라는 존재가 매일같이 눈엣가시처럼 거슬렸는데.
우진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다 보니,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김지환이 준비해 왔다는 ‘그 이야기’ 또한, 우진과 관련 있는 이야기였고 말이다.
“내년 초에 아마 인사이동이 있을 예정이라지?”
“그렇습니다, 선배.”
“너무 상심 마시게. 어쩌다 보니 오물이 좀 튀기는 했지만, 자네가 좌천되는 일은 없을 거야.”
“휴우. 정말 선배님만 믿습니다.”
김지환은 기재부에서 나온 감사를 무사히 통과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완전히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건설사와 결탁한 몇 가지 부당한 정황 정도는 발견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으로 인해 인사고과에서 손해를 크게 본 것이다.
다만 물증이 없는 정황일 뿐이라는 점.
대형 건설사의 청탁이 어느 정도 관례 시 됐었다는 점에서 참작을 받았기에 망정이지, 지환으로서는 탄탄대로와 같던 공무원 인생이 그대로 끝날 뻔한 위기나 다름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후배님.”
“예, 선배.”
“혹시 자네가 준비해 왔다는 그 이야기가, 서우진이랑 관련된 이야기는 아닌가?”
주열의 질문에, 김지환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주변에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낮춘 것이다.
“역시 예리하십니다, 선배님.”
“자네가 먼저 얘기 꺼낼 때까지 기다리려 했는데, 도무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요즘 그 친구 잘나가던데, 선배님께서도 그 꼴 좀 그만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물론일세. 그러니 어서 썰 좀 풀어 봐.”
당연한 얘기겠지만, 주열과 지환은 우진의 인맥이 기재부나 서울시까지 닿아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사건의 정황을 파악하던 중에 감사가 들어온 것이 우진과 관련 있는 일이었다는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었고.
그래서 우진이 공모에 당선되기 위해, 감사원에 투서를 쓴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던 것이다.
건축가협회와 국토부 간의 유착관계는 업계에 조금만 있어도 알 수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니.
조금만 머리를 잘 써도 한번 찔러 볼 수는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건축가협회의 눈치를 전혀 볼 필요가 없는 거의 유일한 업체가 바로 WJ 스튜디오였기 때문에, 성립 가능한 가정이었다.
‘이 새끼가……. 한번 해 보자는 거지 이거?’
그래서 그때 이후로 지환은 우진에게 이를 갈고 있었고, 얼마 전 괜찮은 떡밥을 하나 찾을 수 있었다.
“선배님. 혹시 최근에 방영 중인 <천년의 그대>라는 드라마 아십니까?”
지환의 물음에, 주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고 있지. 서우진이 관련된 드라마 아냐 그거.”
“맞습니다.”
“그 드라마는 왜?”
“아신다면, 그 세트장을 서우진이가 설계하고 시공했다는 사실도 아시겠군요.”
주열이 다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고 있네. 전통건축의 지읒 자도 모르는 애송이가 디자인한 쓰레기를, 언론에서는 아주 물고 빨고 난리더군.”
주열의 얼굴에는 노골적인 불쾌감이 어려 있었다.
이미 색안경을 쓰고 있는 그가 보기에 우진이 디자인한 <천년의 그대> 세트장은 그저 전통건축을 모방한 모조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의 표정을 슬쩍 확인한 지환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이것도 알고 계십니까?”
“뭔데?”
“그 세트장 부지 인근이 지금, 이천시 주도하에 지구 단위 개발 지역으로 지정됐다는 사실 말입니다.”
“음……?”
“그리고 한술 더 떠서, 세트장 부지부터 인근 수천 평 땅이 서우진이 명의로 되어 있더군요.”
“……!”
주열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고, 지환의 입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뭔가, 느낌 오는 것……. 없으십니까?”
지환과 주열의 두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리고 주열의 입가에는 반쯤 일그러진 미소가 걸려 있었다.
“허허, 그래. 어린놈이 벌써 이렇게 더러운 짓부터 한단 말이지?”
“그러니까 말입니다.”
“서우진이 명의 토지는, 확인된 부분이고?”
“물론입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한 순간.
두 사람은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우진과 이천시 사이에, 어떤 부당한 거래와 유착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그런 사실이야 전혀 없었지만, 사람은 원래 자신이 가진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
“오랜만에 감사원에 전화 한번 넣어봐야겠어.”
“그쪽에도 인맥이 있으십니까?”
“그랬으니 이번에 자네도 꺼내 온 것 아냐.”
“하아……. 그랬겠군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한층 기분이 좋아진 두 사람은, 천천히 계획을 짜기 시작하였다.
“단순히 감사만 넣을 생각으로 얘길 꺼낸 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선배.”
“그럼 자네가 생각해 온 계획을 먼저 말해 보시게.”
김지환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지난번엔 저희가 짜 놓은 판을 그쪽에서 쓸어갔으니, 이번에는 반대로 뺏어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지환의 그 얘기를 들은 주열은 기분 좋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이야기는, 주열이 떠올린 그것과 완벽히 일치했으니 말이다.
“역시 자네야. 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주열의 입술 사이로, 그의 하얀 이가 드러났다.
* * *
새해 첫날.
그러니까 신정 연휴를 제외한 새해의 첫날에 우진이 출근하자마자 받았던 ‘뜻밖의 전화’라는 것은, 다름 아닌 이천시 문화국 국장 조용현의 전화였다.
[새해가 밝자마자 또 이렇게 업무 관련 전화를 받으셔서 어쩝니까, 하하.]
“뭐 저야 원래 일과 여가의 구분이 딱히 없는 사람입니다만……. 국장님께서 연초부터 고생이십니다.”
[하하, 저도 뭐 비슷합니다.]
“그건 그렇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국장님.”
[아, 내 정신 좀 봐. 새해 인사를 빼먹었네요. 대표님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사실 긴밀한 협업관계인 지금.
새해 첫날 안부 전화를 하는 것은, 딱히 이상할 것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조용현 국장과 우진의 관계는,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 아주 우호적인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우진이 ‘뜻밖’이라는 생각을 한 것은, 그 전화에 담긴 내용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국장님, 업무 관련해서 문의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하셨는데…….”
[아. 그거요. 여쭤봐야지요. 그것 때문에 전화 드린 거였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오늘 오전에 감사관이 저희 문화국을 찾아왔거든요.]
“감사관……이라면?”
[아 저희 이천시 감사담당관 말입니다.]
그 내용이란 바로.
관광지 조성을 위한 지구단위계획 설립 과정에서, 부당이득을 취한 정황이 신고되었다는 것.
“음…… 부당이득이요?”
[그렇습니다. 이거 사실 되게 곤란한 상황이거든요.]
“저희가 잘못한 부분이 없는데, 곤란해질 게 있습니까?”
[감사라는 게 원래 그렇잖습니까.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것도 쉽지 않지만……. 먼지가 안 나온다 해도 몽둥이찜질은 아픈 법이거든요.]
“뭐, 그야 그렇죠. 사업 진행 속도도 더뎌질 수밖에 없고…….”
우진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실무 담당관에게 어떤 금품 같은 것을 수수한 적도 당연히 없었으며, 이러한 개발계획 수립을 먼저 제안한 것도 이천시청 쪽이었으니.
어딘가에서 위법 정황을 발견했다는 이야기 자체가 이해되질 않았으니 말이다.
‘감사라……. 뭐 별 탈 없이 끝나긴 하겠지만, 상당히 귀찮아지겠는데 이거.’
하지만 다음 순간.
이어진 조용현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우진은 뭔가 묘한 구석을 찾을 수 있었다.
[서 대표님. 대단히 죄송스러운 질문이긴 합니다만, 저희 문화국 직원이라던가, 이천시 관계자라던가……. 따로 접촉해서 뭔가 제가 모르는 일을 진행하신 적은 없으시지요?]
“물론입니다. 제가 그럴 이유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체 왜 감사원에서…….]
“감사원이요?”
[네. 감사원에서 압력이 내려왔나 보더라고요. 그런데 또 저희 담당관에게 다이렉트로 전화한 사람은 국토부 직원이고. 이거 뭐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 참…….]
‘국토부 직원’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우진의 촉이 살짝 움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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