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2012년의 가을
소정과 함께 이천 세트장에 도착한 우진은, 밝은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텅-!
“꽤 기대되네요.”
“기대요?”
“촬영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거든요.”
설레 보이는 우진의 표정에, 소정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함께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우진이 20대라는 사실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는데.
오랜만에 20대 다운(?) 순수한 표정을 본 것 같았으니까.
뭐 그렇다고 평소 우진의 표정이 음흉하다는 얘긴 아니었다.
다만 대부분의 경우 우진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인지 속내를 짐작키 어려웠는데.
오늘은 감정 그대로가 얼굴에 드러나니, 신선한 기분이 들었을 뿐이었다.
“음……. 사실 실제로 보면 별 것 없어요. 너무 기대하시면 실망하실 텐데…….”
소정의 이야기에,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뭐, 엄청난 걸 기대하는 건 아닙니다. 잘 모르는 새로운 분야에 대한 호기심 정도라고 해두죠.”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소정과 나란히 세트장 입구에 들어온 우진은, 자신이 디자인한 공간과 풍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세트장이 좁은 것은 아니었지만 공간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래서 산책하듯 천천히 걷다 보니 곧 촬영 현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장면 연출을 위한 특수 설비들을 작동시켜놔서인지, 공간 바닥부터 은은하게 깔려 있는 새하얀 안개들.
청백색의 대리석으로 마감된 바닥 위에 조명과 함께 하얀 안개가 깔리니, 진짜 구름 위의 궁전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효과까지 생각하고 디자인했던 건 아니지만……. 생각보다 잘 어울리네.’
혹여나 촬영에 방해가 될까.
조심스레 근처에 다가가, 스텝들의 옆에 앉은 두 사람.
“아, 안녕하세요, 대표님!”
“쉿. 인사는 조금 있다가 하셔도 돼요. 일단 촬영에 집중.”
“넵, 알겠습니다.”
마침 꽤 길게 잡혀있는 씬 하나가 촬영을 시작한 상황이었고, 그래서 우진은 마치 연극이라도 보듯 흥미롭게 그것을 구경하기 시작하였다.
* * *
성하영.
작중 여주인공 ‘인서’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대체 왜……. 왜 그러셨던 건가요.”
구름 위로 솟아오른 아름다운 탑의 앞에서, 인서와 서후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천신궁 가장 높은 곳에 솟아오른 탑이자, 인세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천신탑.
그 앞에서 서후와 인서는,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분장 때문인지 더욱 창백하게 보이는 서후의 표정.
그 안에 복잡한 감정을 담은 채, 서후가 인서를 향해 말했다.
“뭘 말이더냐.‘
“정말 몰라서 물어보시는 건가요?”
“…….”
“같은 실수를……. 대체 왜 두 번이나 반복해야 했던 거냐구요!”
서후가 만약 인간과 정을 통했다면, 그는 이미 신격을 잃어버리고 인간으로 살아가다 명을 다했을 것이다.
하지만 천년 전 서후가 정을 통했던 인서는 인간이 아닌 반신의 존재였고, 그래서 서후에게 내려진 형벌은 신격의 소멸 대신 천년 동안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는 형벌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이었던 건지, 천년의 시간이 지난 뒤에 서후는 기억을 되찾음과 동시에 인서의 환생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인서를 다시 만난 서후는, 또다시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너를 처음 만났던 천년 전의 그날 이후로, 너는 내 전부가 되었다.”
“…….”
“너 말고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는 말이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내가 다시 천신궁으로 돌아가 신위를 지킨다고 한들, 네가 옆에 없다면 그 모든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인서는 서후가 천신궁으로 올라 심판을 받게 되는 오늘이 되어서야 전생의 기억을 찾을 수 있었지만.
100일 전 인서를 다시 만난 첫 순간, 서후는 이미 오늘을 예견하고 있었다.
인서는 지난 100일 동안 서후와 함께하며 온전히 행복한 시간을 보내온 한편,
서후는 행복함과 동시에 마음 한켠에 그 이상의 아픔을 교차시키며 지내왔다.
그래서 슬플지언정 울지 않았고, 가슴이 찢어질지언정 부정하지 않았다.
서후가 여기서 눈물을 보인다면, 남겨질 인서는 더욱 괴로울 테니까.
인서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지만, 서후는 울지 않았다.
“내가 당신이었더라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인서의 마음에 없는 이야기에도, 서후는 여전히 담담하였다.
“그렇다 한들 상관없다. 이것은 너와는 관계없는, ‘나’의 선택일 뿐이야.”
두 사람을 휘감는 하얀 운무는 점점 더 짙어졌다.
천신탑의 전부가 안개 속에 잠기는 순간, 서후는 인세에서 사라질 것이고 인서는 기억을 잃어버릴 터.
살짝 입술을 깨문 인서가, 서후의 두 눈을 마주 보았다.
이어서 그녀는, 서후를 향해 달리기 시작하였다.
또다시 같은 천년의 반복이겠지만, 이제는 인서도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여기서 돌아선다면 서후를 안아보지 못하고 다시 천년이 지나겠지만, 지금 그의 품에 안긴다면 적어도 당장의 슬픔을 그의 체온으로 채워 넣을 수 있을 터였다.
천신탑의 경계를 건너 서후를 안는다면 ‘차원의 율법’을 어기게 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어떤 형벌을 더 받게 된다 할지라도 천년 전을 그대로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인서도 이제, 당장의 감정에 충실하기로 했다.
“……!”
생각지 못했던 인서의 돌발 행동에, 서후의 두 눈이 크게 확대되었다.
이어서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았고, 망설임 없이 입을 맞추었다.
천신탑을 감싸는 안개는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짙은 운무는 결국, 두 사람의 주변까지 하얗게 감싸 안았다.
* * *
“컷-!”
“수고하셨습니다!”
“으아아아! 끝이다아!!”
“고생하셨습니다!”
“와아아아아!”
사방에서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나의 드라마를 제작한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담기는 일.
그래서 모든 배우들과 스탭들은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그 결과물까지도 모두가 만족할 만큼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라면, 그 감동이 배가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들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모두 고생하신 만큼, 드라마는 분명 대박 날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모두가 흥분한 가운데에서도, 아직 방금 전의 자세 그대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우진이었다.
‘이거……. 내가 알던 그 천년의 그대가 맞나?’
우진은 지금 온몸에 전율이 일고 있었다.
함께 같은 장면을 봤던 강소정 대표는 감탄하고 만족스러운 정도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지만.
우진은 그것을 넘어 온몸에 소름이 돋은 상태였다.
“우진 씨? 촬영 끝났는데요?”
“아, 대표님. 잠시만요.”
강소정 대표와 우진의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은 아니었다.
소정은 이 드라마를 본 적이 없고 대략적인 대본 내용만 알고 있다면.
우진은 방금 이 장면을, 전생에 봤었던 그 드라마 <천년의 그대>의 안에 그대로 대입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천년의 그대>라는 드라마의 팬이었던 우진은 이 드라마를 여러 번 정 주행했었고.
그래서 촬영의 시작부터, 이 장면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몰입한 결과.
촬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짙은 여운이 머릿속 가득 남을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 이 장면이 어땠었지? 이런 수준은 아니었는데. 절대로.’
전생에 봤던 같은 장면은,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너무도 강렬히 몰입한 탓인지, 방금 전 보았던 천신궁과 두 배우의 열연만이 우진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우진은 너무 신기했다.
‘물론 전생에 그 <천년의 그대> 세트장 퀄리티와는 차원이 다른 세트장이긴 하지만…….’
촬영장소가 바뀌었다는 사실만으로.
같은 배우, 같은 연출자가 찍은 같은 장면이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대박이야.’
이건 단순히 장소가 바뀐 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뀐 촬영장 덕에 더욱 작중 인물에 몰입할 수 있었던 배우들.
아름다운 공간 덕에 더욱 아름다운 연출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었던 촬영팀.
이 모든 부분이 맞물리며 강렬한 시너지를 만들어 내었기에, 이런 놀라운 결과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감독님이 기다려요.”
강소정 대표가 손을 잡아끌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난 우진은, 멋쩍은 표정이 되어 뒷머리를 긁적였다.
“촬영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정신을 못 차리겠네요.”
우진의 말에, 소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프핫. 그 정도예요?”
“대표님도 감탄하신 것 아니에요?”
“저도 당연히 놀랐어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멋졌으니까요.”
“역시 그렇죠?”
소정은 오늘 우진의 새로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재밌기도 하고 기분이 좋기도 했다.
“그래도 서 대표님이 이렇게까지 몰입해서 보실 줄은 몰랐네요.”
“저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감탄하셨으면, 우리 감독님께 어필 좀 해주세요.”
“뭐라고요?”
“드라마 진짜 잘 나올 것 같다고. 오늘 감동했다고.”
“아하.”
“우리 감독님. 칭찬 정말 좋아하시거든요.”
우진은 소정의 귀띔대로 하였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자신이 느꼈던 그대로.
그 감동 그대로를 가진 채 감독에게 아낌없이 칭찬하였고.
“으하하핫! 서 대표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드라마가 이미 대박 난 것 같습니다.”
“그…… 런가요?”
“서 대표님께서 마이더스의 손이라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 그 정도는…….”
감독의 표정은 날아갈 것처럼 화사해졌다.
‘뭐, 없는 말을 한 건 아니니까 괜찮겠지.’
그리고 그날 촬영장이 정리된 뒤.
이천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고깃집으로 회식을 간 촬영팀과 우진은,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기분 좋은 시간을 보냈다.
“그럼 대표님. 최고시청률 30퍼센트 넘으면, WJ 타워에서 번외편 촬영 허락해 주시는 겁니다?”
이미 술기운에 얼굴이 빨개진 감독의 말에,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물론입니다. 그 정도야 어렵지도 않죠.”
이번에는 맞은편에 앉아있던 성하영이 우진을 향해 말했다.
“어어! 그럼 이건 어때요?”
“응? 하영 씨 뭐 좋은 아이디어 있어?”
“우리 서 대표님이 까메오로 출연까지 하시는 거죠.”
“오오!”
우진이 다급하게 손사래 쳤다.
“그, 그건 안됩니다!”
하지만 이미 하영의 말을 들은 감독과 스탭들은, 환호하는 분위기였다.
“오, 그거 진짜 좋은데요 감독님?”
“크으……! 역시 우리 하영 씨가 아이디어가 좋단 말이야?”
우진의 옆에 앉아있던 소정도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왜 안돼요, 우진 씨.”
“왜긴요! 제가 무슨 연기를 합니까? 드라마 망칠 일 있어요?”
민우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형. 제가 도와드릴게요.”
“뭘 도와줘?”
“제가 이래 봬도, 경력 10년이 넘은 배우 아닙니까.”
“……?”
“저랑 같이 연기 특훈 한번 하시죠.”
“아, 싫어!”
소정이 다시 말했다.
“좋네. 민우랑 같이 연기 좀 배우시고, 서 대표님 촬영 한번 가십시다.”
“하…….”
“왜요. 서 대표님께도 의미 있는 추억이잖아요. 직접 디자인하신 세트장에, 투자하신 드라마에 등장하는 거.”
“굳이 등장까지 할 필요가…….”
난감한 표정이 된 우진을 향해, 감독이 다시 말했다.
“그럼 이건 어때요, 서 대표님.”
“네?”
“최고 시청률 35퍼센트!”
“……?”
“35퍼센트 찍으면, 군말 없이 까메오 출연하시는 거로.”
그 뒤로도 시끌벅적 이야기가 쏟아졌지만, 우진은 이 이상 기억을 하지 못했다.
워낙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술도 많이 마셨기 때문에, 기억이 희미해진 것이다.
사실, 의도적으로 잊어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시간은 또다시 흘러갔고, 가을이 지나 첫눈이 내렸다.
그렇게, <천년의 그대> 첫 방영 날이 다가왔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