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2012년의 가을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10월 말의 출근길.
적당한 두께의 가을 코트를 챙겨 입은 우진은, 오늘도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서울숲 WJ 타워>로 WJ 스튜디오의 위치가 옮겨온 뒤.
그렇잖아도 가까웠던 사무실은 이제 아예 도보로 도어 투 도어 5분 거리가 되어버렸고.
그래서 우진은, 아예 출근길에 차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이제 날이 제법 쌀쌀해졌네.’
우진이 길거리에 나선 시간은 오전 7시였다.
아침 이른 시간부터 도로에는 차들이 꽤나 붐볐지만, 서울숲 외곽을 따라 이어진 도보 길에는 사람 그림자가 그리 많이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새벽바람에 코트를 여민 우진은 금세 사옥 건물에 도착하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대표님.”
“팀장님도 일찍부터 고생하십니다.”
“하하, 별말씀을요.”
건물 입구에서 우진을 가장 먼저 반겨준 사람은, WJ 빌딩 보안팀의 팀장이었다.
이제 제법 규모 있는 사옥을 운영하다 보니, 건물 관리나 보안과 관련된 인력들도 따로 꾸리게 된 것이다.
마주친 몇몇 직원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우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대표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대표실에 도착한 우진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라디오를 켜는 것이었다.
[네, 다음 뉴스입니다.]
[지난 월요일, 미국의 앨빈 로스와 로이드 새플리가 2012년 노벨 경제학상의 공동 수상자로 선정되어…….]
아침 일찍 라디오로 뉴스를 듣는 것은, 언제부턴가 우진의 일상 일부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회귀자라 하더라도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일들을 알 수는 없었고.
전생 덕에 얻은 미래에 대한 통찰을 세상 돌아가는 소식들을 듣는데 사용한다면, 더 큰 통찰력과 안목을 기를 수 있을 터였다.
[다음은 경제소식입니다.]
[정부가 내년부터, 부동산 경기 활성화를 위해 금융규제 완화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한은에서는 기준금리 인하를 예고하였으며…….]
[이러한 저금리 기조가 이어진다면, 앞으로는 투자가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커피를 내리며 뉴스를 듣던 우진은, 순간적으로 귀를 쫑긋 세우고 더욱 집중해서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다.
경제 관련 소식이야말로, 회사를 운영하는 오너의 입장에서 가장 집중해서 들어야 할 내용이었으니까.
[신임 기재부 장관으로 부임한 임 장관은, 재정확대 및 통화팽창정책을 통하여 내수 활성화, 민생 안정, 경제 혁신 등의 목표를 이룰 것을 야심차게 발표했습니다.]
라디오를 듣던 우진은, 커피를 홀짝이며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다.
‘이제 시작인가?’
우진이 뉴스에 흥미를 보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부동산 경기부양의 시작.
부동산 시장 활성화를 위해 금융 규제를 푸는 것은, 2010년 중반부터 시작된 부동산 급등 랠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결국 큰 흐름은, 회귀 전과 똑같이 흘러가는 것 같은데…….’
2012년 연말인 지금.
07년까지 급등했던 서울 부동산은, 장기침체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진이야 미래지식을 활용했다거나 특수한 상황을 활용하여 부동산으로 꽤 큰 차익들을 남겼지만.
사실 일반적인 서울 부동산은 아직도 전 고점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2013년부터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푸시하던 정책이 ‘규제는 완화해 줄테니, 대출받아 집 좀 사시라.’는 것이었는데.
이때만 해도 대출로 집을 사는 것만큼 미련한 짓은 없다는 게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원래 침체가 길어질수록, 평범한 서민들에게 집을 산다는 것은 무서운 법이었다.
‘흐름에 맞춰 준비해야지. 아파트 투자로 돈을 벌 건 아니지만……. 경기가 좋을 때 회사는 충분히 키워둬야 하니까.’
전생의 우진은, 2013년에 20대 중반이었던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었다.
일반적으로 20대 중반이라는 나이는 ‘집’을 살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고.
살 수 있기는커녕 관심조차 갖기 힘든 연령대였으니 말이다.
이때 집 한 채 사기만 했어도 살림살이가 훨씬 더 나았을 테니, 이것은 아마 우진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했던 생각이었을 터.
하지만 지금의 우진은 부동산이 급등할 미래를 안다고 해서 아파트를 사들일 생각은 별로 없었다.
사실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터였다.
‘직원들한테나 규제 풀리면 실거주 한 채씩 사라고 얘기해 줘야지. 특히 진태 형은 연봉도 많이 올려줬는데……. 이제 집 한 채는 좀 사지.’
우진은 앞으로 최소 10년 동안, 초 저금리 기조가 지속될 미래를 미리 알고 있다.
저금리가 지속되는 것은, 레버리지 투자를 극대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
이 기간 동안 우진은 WJ 스튜디오를, 수천억대 수주가 가능한 우량 기업으로 키워내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지금의 천웅건설이 지난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낸 성공신화를, 우진은 길게 잡아도 10년 안에 만들어낼 자신이 있었다.
천웅이 단순히 건설 시공으로 메이저의 반열에 올랐다면.
우진은 그 위에 ‘건축디자인과 설계’라는 소스까지 첨가해서 말이다.
‘그나저나 벌써 2012년도 끝나가네. 시간 진짜 빠르구나…….’
우진이 이런 얘기를 하는 사이, 라디오에서는 또 다른 주제의 뉴스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였고.
[지난여름, 코엑스에서 열린 국제 리빙페어의 흥행으로, 해외에서 초청 전시가 새롭게 기획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해외 건축업계에서는 한국의 전통건축에 현대적인 감각을 더한 서우진 건축가의 작품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자신과 WJ 스튜디오의 이야기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자, 우진은 멋쩍은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소식 한번 빠르네. 밀라노 페어가 결정된 게 지난주인데 말이지.’
이어서 라디오를 끈 우진은, 크게 기지개를 한 번 켜고 본격적으로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오전에 업무 대부분을 끝내야 하는 날이었기에, 더 이상 여유 부릴 시간이 없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오늘 우진은, 오후에 조금 기대되는 일정이 잡혀 있었다.
* * *
<천년의 그대> 제작팀은, 오늘 이른 새벽부터 무척이나 분주하였다.
그 이유는 바로, 오늘이 <천년의 그대> 촬영 마지막 날이기 때문.
특히나 제작팀의 컨트롤 타워나 다름없는 촬영감독은,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이 많아서인지 전날부터 한숨도 제대로 못 잔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게 잠도 부족한 상태에서 촬영 현장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촬영감독의 표정에는 생기가 가득하였다.
지난 반년 동안의 대장정에 오늘 마침표를 찍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없던 힘도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다들 세팅 빨리 못해? 오늘 촬영 늦어지면, 날짜 하루 더 늘어나는 거야!”
일도 많고 탈도 많았던 <천년의 그대> 촬영이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런 작품을 촬영할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하였다.
무엇보다 스토리 라인부터 대본, 그리고 배우들과 촬영환경까지.
이제껏 그가 겪어 온 어떤 현장보다도, 모든 것이 완벽했던 현장이 바로 <천년의 그대> 촬영 현장이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감독은 결과물도 자신이 있었다.
지금 필름 위에 담겨있는 <천년의 그대> 영상들은, 촬영 스텝 모두가 만족할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었으니까.
‘뭐 아직 CG부터 시작해서 후처리 작업들이야 많이 남아있지만……. 오늘 촬영까지만 확실히 마무리되면 한시름 놓을 수 있겠어.’
일사불란하게 세팅되는 촬영장을 보며, 감독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마지막 촬영 날인 오늘, 촬영 장소는 바로 이천에 있는 <천년의 그대> 세트장.
마지막 촬영이라 해서 꼭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이 촬영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감독은 이 세트장에서 마지막 일정을 장식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세트장은 <천년의 그대>의 정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단순히 세트장의 영역을 넘어 감독인 그에게 연출에 대한 영감을 던져주기도 했던 장소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코엑스에서 열렸던 국제 리빙페어는, 드라마의 이슈 몰이에 크게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번 작품 말아먹으면 감독 접고 다른 일 알아봐야지.’
속으로 잠시 실없는 생각을 하던 감독은, 촬영 세팅이 마무리되어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촬영이 시작되기 직전, 장비를 만지고 있던 스텝 하나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봉식!”
“예, 감독님.”
“그러고 보니 오늘, 소정 대표님 오신다고 했었지?”
“옙! 촬영 마지막 날이니, 와서 축하파티라도 참석하시겠다고…….”
그런데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때.
마침 옆을 지나던 배우 성하영이, 감독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슬쩍 끼어들었다.
“오늘 아마 손님이 한 분 더 오실 걸요, 감독님?”
“음?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의아한 목소리로 반문하는 감독을 보며, 하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서우진 대표님도 같이 오신다고 하더라고요.”
“응? 서 대표님께서?”
하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촬영하는 게 보고 싶으셨나 봐요.”
“그래?”
“뭐, 여기 세트장 전체를 서 대표님께서 디자인하셨는데, 본인이 디자인한 곳에서 드라마가 제대로 촬영되는 건, 아직 한 번도 못 보셨잖아요?”
“하긴. 궁금하실 만하네.”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은 세트장을 디자인한 디자이너라는 사실만으로도 이 촬영에 충분한 지분이 있었지만.
그것을 넘어 드라마에 직접적으로 투자한 투자자이기도 하였으니, 촬영장에 와서 현장을 좀 본다고 문제 될 건 없었다.
무엇보다 드라마에 큰 도움이 됐던 우진이라는 인물 자체에, 호감이 있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문득 뭔가 궁금해진 감독이, 성하영을 향해 다시 물었다.
“그나저나 하영이 너는, 어떻게 나보다 먼저 그 얘길 들은 거야? 누구한테 들었어?”
하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누구한테 듣긴요. 서 대표님께 직접 들었죠.”
감독의 눈이 살짝 커졌다.
“뭐? 서 대표님? 친분이라도 있어?”
하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뭐, 친분이라고 할 것까진 아니고……. 얼마 전에 민우랑 같이 그 WJ 타워에 놀러 갔었거든요.”
“아, 그 성수동 핫플?”
“네. 건물 구경도 할 겸. 서 대표님이 초대도 해주셔서.”
“어때, 좋디?”
“당연하죠. 저희 촬영하면서도 몇 번 지나다녔잖아요?”
하영의 대답에, 감독이 입맛을 다셨다.
“으. 아깝다. 거기 건물에서도 촬영 한두 컷 했어야 하는데.”
“있다 오시면, 한번 대표님께 부탁드려보시던가요.”
“뭐? 우리 촬영 다 끝났잖아?”
“드라마 방영 뒤에 대박 나는 것 같으면, 번외편이라도 한두 화 집어넣을 내용 생각해 두셨다면서요.”
번외편이라는 이야기에, 감독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흐음. 번외편이라……. 그리고 그 촬영을 WJ 타워에서 한다라…….”
그리고 많이 혹한 듯 보이는 감독의 반응에, 더욱 뿌듯한 표정이 된 하영.
“제 아이디어 괜찮죠?”
“굳. 좋은데?”
하지만 그렇게 좋았던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던 스탭이 문득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 전에, 일단 대박이 나야…….”
그리고 그 참견은, 오늘 하루 종일 감독과 붙어있어야 하는 그에게 꽤나 잘못된 선택이었다.
“야, 봉식이. 너는 마 분위기 파악도 좀 하고! 어!”
감독의 격한 반응에, 피식 실소를 흘리는 하영.
“그러게 봉식 씨, 왜 감독님 행복회로 망가뜨려요?”
“흠흠. 저는 뭐 그냥 사실을 말씀드린 것뿐인데…….”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천년의 그대> 마지막 촬영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빡빡한 일정을 지나 오후 타임이 되었을 즈음.
<천년의 그대> 세트장 앞 주차장에, 까만색 세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