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246화 (246/315)

246화

새로운 보금자리

WJ 스튜디오가 바쁘게 굴러가는 사이.

슬슬 늦더위도 가시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듯.

이렇게 시원해진 날씨는, 민족 대명절인 추석이 다가오는 반증이라 할 수 있었다.

“이번 추석은 일요일부터네. 휴일 하루 아깝다.”

“그래서 대표님이 이번 주 금요일부터 쉬자고 하셨잖아요.”

“어? 진짜요?”

“지난 연휴 때도 그랬었는데, 새삼스럽게 놀라시기는.”

“저 입사하기 전이잖아요, 지난 연휴는.”

“아 그렇구나.”

“진짜 대표님 대박…….”

2012년의 추석은, 9월의 마지막 날인 일요일부터 시작이었다.

하지만 WJ 스튜디오의 연휴는 9월 28일 금요일부터 시작이었고.

직원들은 그 연휴만 바라보며 9월의 마지막 주를 불태우고 있었다.

특히나 이 9월 마지막 주는 평소보다도 더 바빴는데,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올해 있었던 사내 행사 중 가장 큰 행사라고 할 수 있는, WJ 스튜디오의 서울숲 신사옥 준공식이 바로 추석 직전에 있었으니 말이다.

이제 WJ 스튜디오는 처음 성수동으로 이사 올 때보다 거의 10배 이상 덩치가 커져 있었고.

때문에 새 보금자리로 이사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사할 곳이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별개의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엇, 대표님 오셨다. 저 먼저 일어설게요.”

“네, 수영 님. 수고하세요!”

올여름부터 본격적으로 WJ 스튜디오에 출근 중인 유수영은, 멀리서 우진이 사무실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인턴인 그녀는 디자인 감리를 맡는 부서 쪽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처음으로 ‘대표님’과 함께 감리를 나서는 날이었다.

‘실수 않고 잘해야 할 텐데……!’

K대학교의 산학협력 프로그램을 통해 입사하게 된 그녀는, 사실 WJ 스튜디오에 지원하기 전부터 우진의 팬이었다.

같은 과 선배는 아니었지만 같은 디자인학부의 선배인 우진은 디자이너 지망생이었던 그녀에게 동경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었고.

그래서 의상디자인을 전공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의류회사를 젖혀두고 WJ 스튜디오에 가장 먼저 지원했던 것이다.

당연히 건축‧인테리어 쪽에 관심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의상디자인을 공부하면서도, VMD(visual merchandiser)에 무척이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브랜드 컨셉에 맞춰 제품을 전시하는 등 매장 전체를 꾸미는 직종을 VMD라고 하는데, 이 분야는 사실상 공간디자인과 의상디자인이라는 두 분야의 교집합이라고 할 수 있는 직종이었다.

그러니까 완전히 팬심으로 산학협력에 지원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똑똑-

수영이 대표실의 문을 두들기자, 안쪽에서 우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세요.”

이어서 그녀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대표실로 들어서자, 우진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수영을 맞아주었다.

“아, 오늘은 수영 씨가 같이 가기로 했었나?”

“네, 대표님.”

“준비는 다 된 거죠?”

“물론입니다!”

“수영 씨 이제 인턴 한 지도 한 달 넘지 않았어요?”

“그, 그쯤 됐습니다.”

“왜 이렇게 얼어있어요. 하하. 편하게 일해요, 편하게.”

자리에서 일어선 우진은, 차 키를 챙겨 들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러자 수영이 그 뒤를 쪼르르 따라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수영이 팔에 끼고 있는 두꺼운 파일을 본 우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건 다 뭐에요?”

“마감 도면이랑……. 머테리얼 보드입니다!”

“헛. 그렇게까지 다 챙길 필요 없는데…….”

“그, 그럼 두고 올까요?”

“아닙니다. 엘리베이터 타시죠, 일단.”

안절부절못하는 수영을 보며, 우진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우진보다 고작 한 살 어릴 뿐인 그녀였지만.

우진은 수영이 거의 햇병아리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귀엽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을 텐데.’

물론 회귀 전의 일이었지만, 우진도 처음 사회생활을 할 때에는 수영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의욕적이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소심하고. 직장 선임들의 인정을 갈구했던 시절.

수영에게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일부 발견한 우진은, 피식 웃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띵-!

이어서 수영과 함께 차에 탄 우진은, 대시보드 서랍에 있던 아이패드를 하나 꺼내어 수영에게 건네주었다.

“그 무거운 도면이랑 머테리얼 보드는 뒷좌석에 두고 내려요.”

“아, 네! 넵!”

“여기 패드 안에 필요한 도면이랑 마감재 정보 다 들어 있으니까, 그거 들고 따라오시면 돼요.”

말을 마친 우진은 그녀로부터 대답을 듣기도 전, 시동을 걸고 액셀을 천천히 밟았다.

부웅-

사실 현장까지는 걸어가도 될 정도로 가까웠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차를 타고 이동하는 우진이었다.

건물의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온 우진의 차는 금세 큰길을 달리기 시작하였고.

현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차 안은 무척이나 조용하였다.

우진에게 받은 패드를 꼭 쥔 채 조수석에서 얼어붙어 있던 수영이, 가끔 한 번씩 운전하는 우진의 옆모습을 힐끔거릴 뿐이었다.

처음 우진과 함께하는 일정이 생겼을 때만 해도 그에게 이리저리 말을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수영은, 단둘이 차를 타고 있는 동안에도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얼어있었다.

‘으……. 대표님께 궁금한 게 많았는데…….’

이제 갓 학부를 벗어나 처음 실무라는 것을 해보는 수영에게.

우진은 다가가기 힘든 우상 같은 존재인 모양이었다.

‘체크리스트……. 체크리스트…….’

결국 우진에게 말 걸기를 포기하고, 현장에 도착해서 해야 할 업무를 열심히 머릿속에서 되뇌기 시작한 수영.

그런데 그것도 잠시뿐.

조수석 창문 밖으로 보이기 시작한 풍경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기 시작하였다.

‘우, 우와!’

우진의 차가 어느덧 팬스를 지나 현장 안쪽으로 들어서기 시작하자.

지금껏 실물로 가까이서 본 적 없던 WJ 스튜디오 신사옥의 파사드가 수영의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업무시설치고는 넉넉하게 책정된 건폐율 때문인지, 꽤 널찍하게 트여있는 공간에는 예쁜 조경들도 만들어져 있었다.

랜더링 이미지로는 몇 번이고 본 적 있었지만, 실물로 보니 더욱 기하학적이고 아름다운 외관을 뽐내는 WJ 스튜디오의 신사옥.

‘멋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긴장해 굳어있던 수영의 동공에 멋진 건축물의 모습이 가득 담겼고.

그런 그녀를 태운 우진의 차가 곧 건물 정문 앞에 멈춰 섰다.

끼익-

“자, 내리시죠, 수영 씨.”

그리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수영이, 패드를 챙겨 든 채 허겁지겁 우진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 * *

사실 서울숲 신사옥의 실무적인 측면에서의 감리는, 오늘 우진이 오기 전에도 이미 끝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

대표인 우진이 최종감리를 오기 전에, 이미 WJ 스튜디오의 전문 감리팀이 꼼꼼하게 감리를 해뒀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오늘 우진이 최종감리를 위해 여기 온 이유는, 상징적인 측면이 꽤 강했다.

당연히 한 번 더 공간들을 둘러보며 디자인 감수를 하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이 신사옥 시공의 마침표를, 본인이 직접 찍고 싶었던 이유가 더 컸던 것이다.

WJ 스튜디오 서울 숲 사옥은, 우진에게 여러모로 의미가 큰 건축물이었으니까.

‘진짜 감개가 무량하네.’

직접 설계부터 시작해서 시공까지 해낸 우진의 첫 번째 포트폴리오이면서.

그와 동시에 WJ 스튜디오의 첫 번째 사옥인 서울 숲 신사옥.

완성된 건물의 안으로 걸음을 딛는 우진은, 감격스러운 표정일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는데 말이지.’

성진건설과 합병된 뒤, 처음으로 WJ 스튜디오가 하나의 건물에 입주하게 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었다.

지난 일 년 동안 성진건설의 직원들은 이미 WJ 스튜디오에 많이 융화되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하나의 건물에 입주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었으니까.

하여 이 모든 의미들이, 우진의 가슴을 더욱 벅차오르게 만들었다.

여러 가지 프로젝트들로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서 이렇게 현장에 나온 보람이 느껴졌다.

저벅- 저벅-

공사가 완전히 끝났기 때문인지, 텅 빈 서울 숲 신사옥은 무척이나 고요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조용한 가운데, 낯익은 목소리 하나가 우진의 귓전에 들려왔다.

“하하, 대표님 오셨습니까!”

반갑게 인사하며 우진에게 다가온 남자는, 이번 신사옥의 시공 총 책임자인 고진철이었다.

“아, 실장님.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고생은요. 이렇게 다 지어진 모습을 보니 뿌듯해 죽겠습니다.”

고진철은 성진건설에서부터 벌써 20년 가까이 업계에 몸담고 있던 베테랑이었다.

때문에 그가 책임지고 완공한 건축물만 해도, 족히 열 손가락을 다 채울 정도.

그래서 ‘준공’이라는 것만 놓고 봤을 때, 고진철에게는 그렇게까지 특별한 행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뿌듯해 죽겠다는 그의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이번 달 완공된 WJ 스튜디오의 서울 숲 사옥은, 그가 지어왔던. 아니, 그가 경험했던 그 어떤 건축물보다도 멋지고 아름다운 작품이었으니까.

“설계가 워낙 까다로워서, 실장님께서 고생 제일 많이 하셨다고 들었는데…….”

우진의 이야기에, 고진철이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다.

“처음에는 진짜 죽는 줄 알았죠.”

“하하, 그 정돕니까?”

“이 일 수십 년 하면서, 3차원 도면이라는 건 처음 접해봤으니까요.”

“그야 그렇지요.”

“하지만 워낙 도움 주신 분들도 많았고……. 고생에 비해 배운 게 훨씬 많은 작업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대표님 덕분에, 진짜 귀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WJ 스튜디오의 신사옥 건축은, 우진이 하고 싶던 디지털 건축의 모든 기법이 다 담긴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골든 프린트’가 보여주었던 아름다운 빛과 그림자를 최대한 표현해내려면, 기하학적인 구조가 한두 가지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무리 업력이 튼튼한 前성진건설 실무진들이라 하더라도, 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우진은 삼차원 설계를 시공하는 과정에서, 조운찬 교수의 인맥에 큰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9월에 준공된 게 기적이네, 기적이야.’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우진이, 고진철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들어오면서 보니까, 조경도 다 끝난 것 같던데요.”

“예, 오늘 오전에 마무리 공사까지 하고, 작업자들 전부 철수시켰습니다.”

우진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럼 오늘 제가 도장 찍고 나가면, 바로 내일 준공식 해도 되겠네요?”

고진철이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대표님. 그렇지 않았더라면, 오늘 대표님을 모시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하.”

고진철과 기분 좋게 대화를 나눈 우진은, 입구를 지나 메인 로비에 들어섰다.

그러자 3층 높이까지 뻥 뚫린 커다란 공간의 사방에서, 아름다운 빛줄기가 우진을 환영하기라도 하듯 쏟아져 들어왔다.

마치 아름답게 세공된 거대한 다이아몬드의 정 가운데에 서기라도 한 것처럼.

각기 다른 각도에서 우진을 향해 쏟아져 들어오는 빛줄기들.

왕십리의 파빌리온이 떨어져 내리는 빛의 흐름을 따라 수놓아진 아름다운 구조물이었다면.

이곳 로비에 우진이 만들어놓은 것은, ‘빛’ 그 자체로 만들어진 파빌리온이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우진은 자신이 직접 설계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 빛의 향연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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