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신뢰
대부분의 협업에서, 신뢰라는 것은 그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시 되어야 한다.
협력 과정에서 신뢰가 한 번 비틀어지기 시작한다면, 애초에 협업이라는 구조 자체가 성립하기 힘들어지니 말이다.
그래서 우진은 신뢰를 상대방에게 100퍼센트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협업의 시작지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약속한 그 어떤 사소한 부분도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천시의 세트장을 <우리 집에 왜 왔니>의 특집 촬영장으로 확정 지은 것은 물론.
그 특집 촬영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부터, 세트장의 관광지 개발과 관련된 언급을 조금씩 방송 중에 던져주는 것까지.
이천시 문화국의 관계자들이 완벽하게 만족할 만큼, 그가 시청에서 언급했던 모든 부분을 확실하게 이행한 것이다.
‘이 정도면 훌륭하지.’
물론 우진과 협업하게 될 문화국장 조용현이 반대로 신뢰가 없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우진이 이렇게 노력했다 하더라도, 그 노력의 빛이 바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진은 자신의 사람 보는 눈을 믿었다.
그날 시청에서 만났던 조용현 국장은, 적어도 솔직하고 담백한 사람이었고.
보통 허풍이 없고 담백한 사람들은, 책임감과 신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준수한 인격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조 국장도 아마 지금 이 화면을 보고 있겠지. 그리고 내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아마 내일 오전에는 바로 전화가 올 거야.’
우진과 조용현 국장이 미리 짜 둔 플랜은, 스텝 하나하나가 지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빡빡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우리 집에 왜 왔니> 방송이 나가는 날을 기점으로 <천년의 그대> 드라마의 첫 방영 날까지.
남아있는 기간은 고작 4달 정도가 전부였는데, 이 안에 진행해야 하는 행정절차가 한두가지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우진은 지금이라도 그에게 전화하고 싶었고, 그것은 조용현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물론 주말 저녁이라, 둘 다 그렇게 생각만 할 뿐이었지만 말이다.
우진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방송이 끝났고, 다음 화 예고편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예고편으로 흘러나오는 영상 역시, 오늘 방송된 내용의 연속.
이천시 <천년의 그대> 세트장에서 찍은 촬영분은 거의 3회 방영분이었고.
그래서 아마 3주 동안은 천년의 그대 특집이 진행될 터였다.
탁-
맥주캔을 딴 우진이 시원한 맥주를 크게 한 모금 들이마셨고, 옆에서 같이 <우리 집에 왜 왔니>를 시청하고 있던 석현이 그를 향해 물어보았다.
“이야, 영상 진짜 잘 뽑혔다, 우진아.”
“영상? 내가 말했잖아. 오늘 편 재밌을 거라고.”
우진의 대답에, 석현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니 <우리 집에 왜 왔니> 말고. <천년의 그대> 말이야.”
“아하.”
“중간중간 토막 영상 나오는 거만 봤는데도, 드라마 당장 보고 싶네.”
“그 정도야?”
“그렇다니까? 영상 편집을 기가 막히게 잘한 건지, 진짜 드라마가 재밌게 뽑힌 건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드라마 방영 시작하면 무조건 첫 화는 볼 것 같아.”
“오…….”
석현의 평가가, 우진은 <우리 집에 왜 왔니>가 재미있었다는 말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역시. 내 눈에만 콩깍지가 씌인 게 아니었어. 전생에 봤던 <천년의 그대>보다 훨씬 더 재밌는 게 맞아.’
그리고 기분 좋은 표정이 짓는 우진을 향해, 석현이 은근한 목소리로 한 마디 더하였다.
“그리고 일단. 성하영이 너무 예쁨.”
김빠지는 석현의 이야기에, 우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대꾸했다.
“그럼 그렇지.”
하지만 석현은 우진의 그런 표정은 신경조차 쓰지 않으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기 시작하였다.
“야, 너 성하영 본 적 있지?”
“하영 씨? 한 두세 번 정도 봤지.”
“와 씨. 하영 씨래.”
“왜?”
석현이 한 차례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말했다.
“다음에 뵐 일 있을 때, 나도 좀 데려가면 안 되냐?”
“너 리아 누나 팬 아니었냐?”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야. 리아 누나 팬이기도 하고, 성하영 팬이기도 한 거지.”
석현의 말에,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흠. 우리 신사옥 완공되면, 하영 씨가 한번 놀러 오시겠다고 하긴 했는데…….”
“오, 대박. 미친! 진짜?”
“석구 외근 나가는 날 불러야겠다.”
“홀리! 그건 좀 아니지 않냐, 친구야.”
“너 하는 거 봐서.”
“젠장! 제이든! 이 악덕 사장좀 혼내줘!”
흥분한 석현의 목소리에, 옆에서 졸고 있던 제이든이 벌떡 일어나며 눈을 떴다.
“무슨 일이야, 석현? 악덕 사장이 또 무슨 사악한 일을 꾸민 거야?”
“글세, 이 나쁜 놈이 그러니까…….”
소파에서 방방 날뛰며 비난하는 두 덤앤더머를 보며, 우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시끄럽게 굴 거면, 내 집에서 나가 줄래 친구들?”
우진의 말에, 석현과 제이든이 쌍둥이 마냥 동시에 대답했다.
“그럴 순 없지.”
“그건 안 되지.”
“…….”
어이없는 표정이 된 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집 주인은 난데?”
석현이 먼저 대답했고.
“어머님께서 안 계신 이런 날에, 베스트 프랜드를 집에 혼자 둘 순 없어.”
제이든도 대답했다.
“어쩔 수 없어. 오늘은 석현이 내 승급전을 도와주기로 했거든.”
“게임은 제이든의 집에서 하면 되잖아.”
제이든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우진의 컴퓨터에서 플레이를 해야, 승리할 확률이 높아지니까.”
“그건 또 무슨 논리야?”
“Probability and Statistics.”
“뭐?”
이번에는 석현이 대답했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확률과 통계에 의해 도출된 결론이래.”
“빅데이터? 우리 집에서 게임을 몇 판이나 했다고.”
제이든이 말했다.
“다섯 판. 그중에 무려 세 판이나 이겼지.”
“…….”
다시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은 우진이, TV를 끄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난 들어가 잘게. 둘이 알아서 잘해 보라고.”
아무래도 오늘은, 일찍 잠드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물론 우진이 잠을 청하도록, 순순히 둘 친구들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럴 순 없어, 우진. 이 제이든 님의 환상적인 플레이를 봐야 하니까.”
“오랜만에 같이 놀자며. 이러기야 대표님?”
그래서 결국 우진은, 새벽 세 시가 넘어서야 잠을 청할 수 있었다.
* * *
월요일 아침.
우진은 퀭한 얼굴로 석현과 함께 출근했다.
“대표님, 오셨어요?”
“네. 조금 늦었죠?”
“아뇨. 늦기는요. 평소에 워낙 빨리 오셨던 거죠.”
평소 우진의 스케줄과 업무정리를 도와주는 비서실의 직원이, 우진의 책상 위에 파일 몇 개를 얹어놓으며 말했다.
“지난주 회의 자료랑, 요청해주셨던 리서치 자료들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거기 두고 가세요.”
“예, 대표님!”
직원이 책상 위에 두고 간 자료는, 전부 <천년의 그대>와 관련된 자료들이었다.
리빙페어 이후 연결된 여러 업체들과의 협업 계약서부터 시작해서, <천년의 그대>가 이슈화된 이후 웹상에 뜬 여러 가지 기사들을 스크랩한 파일들.
하지만 당장에 급한 업무들은 아니었기에, 일단 우진은 의자를 뒤로 젖혀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어후, 피곤해.’
석현, 제이든과 노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지만, 즐거웠다고 해서 피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한 10분만 쉬었다가 시작해 볼까?’
의자에 몸을 누인 채 눈을 감고 있었지만, 우진은 머릿속으로 오늘 해야 할 업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워낙 벌려놓은 일들이 많다 보니, 하루에도 생각해야 할 것들이 수 없이 많은 우진이었다.
‘성수지구 기본 설계안은 금요일 날 넘겼고. 오늘 오후에는 신사옥 현장감리 한번 가기로 되어 있고…….’
결국 눈 감고 마음 편히 누워있지 못한 우진은, 정신을 깨우기 위해 일어나 커피를 한 잔 내렸다.
시원한 냉커피를 한 잔 먹고 나면, 정신이 좀 맑아질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전화가 올 때도 됐는데…….’
커피를 타던 우진은, 책상 위에 엎어 둔 스마트폰을 슬쩍 응시하였다.
그가 기다리고 있던 전화는 당연히 조용현 국장의 전화.
물론 우진이 먼저 전화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모양이 빠지는 일이었다.
이쪽에서 묵직한 걸 먼저 넘겨주었으니, 다음 스텝은 받은 쪽에서 먼저 밟는 게 그림이 좋았으니까.
그리고 우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기다렸다는 듯 그의 스마트폰이 진동하기 시작하였다.
지잉- 지이잉-!
그것을 발견한 우진은 커피에 얼음을 몇 개 동동 띄운 뒤, 커피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이어서 스마트폰을 귀에 대었을 때.
우진이 예상했던 바로 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 대표님! 저, 조용현입니다! 혹시 통화가능하십니까?]
낮은 중저음의 굵직한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상기된 기분이 그대로 드러나는 조용현의 목소리.
그것을 느낀 우진이, 기분 좋게 웃으며 전화에 대고 입을 열었다.
“예, 국장님. 통화 가능합니다.”
우진의 대답에, 곧바로 조용현의 말이 이어졌다.
[하하. 다름이 아니라, 어제 본방사수 했거든요.]
“<우리 집에 왜 왔니> 말씀이시죠?”
[물론입니다. 직원들이랑 같이 봤습니다.]
“어제 주말이었는데요?”
[호프집에서 맥주 한잔했지요.]
“아하.”
[다들 재밌게 봤습니다. 서 대표님도 훤칠하게 화면빨 잘 받으시던데요?]
“하핫, 감사합니다, 국장님.”
두 사람은 잠깐 동안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양쪽 모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많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통화하는 만큼 곧바로 일 얘기부터 선뜻 튀어나오지는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잠시뿐.
조용현이 먼저 본론을 꺼내기 시작하였다.
[전 오늘 출근하자마자, 기안부터 올렸습니다.]
“기안이라면……?”
[말씀드린 용도변경 건에 대한 사업제안서 말입니다.]
“오……! 이렇게나 빨리…….”
[서 대표님을 믿었으니까요. 하하. 미리 준비 다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하네요.”
우진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무척이나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조용현 국장으로부터 전화 온 시간을 봤을 때.
출근하자마자 서류작업부터 다 끝낸 뒤 전화했다는 그 말은, 아무래도 빈말이 아닌 것 같았다.
조용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드라마 토막 영상도 정말 잘 봤습니다. 장담하셨던 것처럼, 진짜 재밌는 드라마가 될 것 같더군요.]
“관계자라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드라마는 정말 잘 될 겁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하하, 아무렴요.]
기분 좋게 웃은 조용현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서 대표님.]
“네, 국장님.”
[혹시 드라마 마케팅에 쓰인 시청각 자료라던가, 개략적인 투자 스펙이라던가……. 저희가 받아볼 만한 자료가 좀 있을까요?]
조심스러운 조용현의 물음에, 우진이 곧바로 대답하였다.
“기안은 올리셨다고 했으니……. 추가 보고자료 만드실 때 쓰시려는 거죠?”
[예, 그렇습니다. 저야 이제 이 프로젝트에 대해 확신이 있지만, 아무래도 위에서는 타당성 검토가 좀 더 필요하니까요.]
“당연히 해드려야지요. 최대한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럼 그 자료는 언제쯤 받아볼 수 있을까요?]
“늦어도 수요일 전에는 보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용현과 통화를 하는 중, 우진은 메모장을 열어 간단히 이런저런 메모를 작성했다.
지난번 시청에서도 느꼈지만, 조용현은 우진과 꽤나 합이 잘 맞는 사업 파트너인 것 같았다.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일 처리 되기도 쉽지 않은데 말이지.’
하여 통화가 이어지는 동안, 우진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이제 반대로 조 국장과 이천시가 우진에게 신뢰를 보여 줄 차례였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