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가장 뜨거운 여름
2012년 8월 4일.
8월의 첫째 주 토요일은, 코엑스의 국제 리빙페어가 열리는 날이었다.
정확히는 한류 컨텐츠 기획전과 리빙페어가 콜라보 된, 새로운 개념의 특별한 통합전시가 열리는 날.
이는 코엑스 전시장의 A섹터와 B섹터가 전부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지는 초대형 전시였고, 때문에 전시 관계자들은 이른 새벽부터 분주했다.
부스 세팅과 내부 공사는 전부 끝난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할 일은 태산같이 많았으니까.
“‘가온 인테리어’ 실장님! 이쪽으로 소품 옮겨주세요!”
“그쪽은 메인 로비라서 건들면 안 됩니다! 방문객 동선 방해되니까, 그쪽에는 소파 놓지 말아주세요!”
“소품이나 물건 전시하실 때, 전반적인 톤 앤 매너는 맞춰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리빙페어 참가 업체가 주로 세팅되어있는 B섹터에서는, 가장 넓은 부스를 차지하고 있는 업체가 바로 민주영 대표의 <벨로스톤즈>였다.
두 전시의 콜라보가 기획되기 전부터 오늘 국제 리빙페어의 메인 부스로 내정되어있던 업체가, 바로 벨로스톤즈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민주영 대표는 오늘 새벽 5시부터, 코엑스에 나와 있었다.
메인 로비까지 연결되어있는 모든 공간의 자재가 전부 벨로스톤즈의 제품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니.
본인의 눈으로 최종점검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민주영으로서는 일찍부터 현장에 나와 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새벽같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영의 표정에는 생기가 넘쳤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의 전시로 벨로스톤즈의 인지도가 몇 배 이상 올라갈 것이 눈에 보였으니까.
평범한 국제 리빙페어에서 메인 부스를 차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존 인지도가 배 이상은 오를 수 있는 기회였는데.
우진이 끼면서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판이 세 배 이상은 커진 것 같았다.
‘미디어 컨텐츠와 콜라보라니……. 정말 상상도 못 했지.’
하여 오늘 오픈 직전의 부스를 전부 돌아봤을 때.
주영은 이 전시의 파급력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지, 가늠하기조차 힘든 수준이었다.
“고 실장님. 저희 이제 점검 끝난 거죠?”
“네, 대표님. 아침 일찍부터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는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
기분 좋게 웃은 민주영이, 부스를 다시 한번 천천히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30분 뒤면 오픈이니까……. 현장 인원 점검만 한번 해 주시고, 실장님도 잠시 눈 좀 붙이세요.”
“넵.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표님.”
실장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후 부스 안쪽으로 사라지자, 빙긋 웃어 보인 주영도 천천히 부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실 지금 주영이 서 있던 로비까지도, 벨로스톤즈의 부스나 다름없는 공간이었지만 말이다.
‘디자인 진짜 잘 뽑혔단 말이지.’
자재는 전부 벨로스톤즈의 것이지만, 디자인은 전부 WJ 스튜디오의 것이다.
그 안에서도 컨셉 디자인부터 기본 설계까지는, 9할 이상이 우진의 작품.
전시 오픈 직전의 완성된 공간을 거닐면서, 민주영은 다시 한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전시품들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너무 단조로운 디자인 아닌가 생각했는데……. 디피(Display)된 상품들을 부각시킬 수 있는 최상의 디자인이었어.’
마지막 점검을 한다는 생각으로.
주영은 부스 곳곳을 꼼꼼히 살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로비를 지나 본격적인 벨로스톤즈의 부스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 <천년의 그대> 세트장을 재현해 놓은 웅장한 구조물이었다.
어지간한 작은 회사의 부스 서너 개를 합해 놓은 수준으로 커다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단일구조물.
이것은 벨로스톤즈의 부스 안에서도 절반 이상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주영은 충분히 그만한 넓이를 할애할 만했다고 생각하였다.
전통건축의 아름다움을 모던하고 미니멀한 조형으로 재해석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단어가 전혀 아깝지 않은 멋진 건축 조형.
이 작은 건축의 모든 마감자재는 벨로스톤즈의 상품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것은 민주영이 생각할 때, 최상급 품질을 가진 벨로스톤즈의 자재들이 더 없이 돋보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이천에 있는 천년의 그대 세트장에는 이런 건축물들이 수십 채는 지어져 있다고 했었지. 전시 끝나면 거기는 꼭 한번 가봐야겠어.’
민주영 대표는 아직 이천 세트장에 가보지 못했다.
정확히는 세트장이 완공된 이후에 가보지 못한 것.
리빙페어 준비부터 시작해서 일이 너무 바빠 가볼 시간이 없었던 것인데, 이렇게 부스에 들어온 세트장 모듈을 보니 없는 시간이라도 쪼개어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주영은 이렇게 아름다운 세트장에서 촬영했다는 <천년의 그대>라는 드라마 또한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이런 분위기의 공간에서 촬영된 영상은 시각적으로 어떤 느낌을 줄 수 있을지.
드라마의 스토리도 스토리였지만, 그런 시각적인 자극에 대한 욕구가 주영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그러고 보니 아쉽네. 드라마가 방영된 뒤에 리빙페어가 열렸다면……. 우리 벨로스톤즈의 이름이 더 크게 이슈화됐을 텐데.’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민주영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이 정도 수준의 판이 깔린 것만 하더라도 처음 기획 당시의 수준을 아득히 초월하는 것.
여기서 더 욕심을 부리는 것은 도둑놈 심보라고 생각했다.
또각- 또각-
주영은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며 부스를 한 바퀴 돌았다.
하여 그렇게 10분 정도가 더 지났을 즈음.
“엇, 대표님!”
전시장이 오픈하기 직전에, 주영은 반가운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하, 민 대표님 일찍부터 와계셨다면서요?”
남자의 정체는 바로, 오늘 이 전시가 있을 수 있게 만들어준 WJ 스튜디오의 대표 서우진이었다.
* * *
오늘 코엑스의 전시에는 수많은 관계자들이 있지만, 우진은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지분을 갖고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일 것이었다.
서울 디자인재단이나 컨텐츠진흥원 등 주최 측부터 시작해서.
KSJ엔터, 벨로스톤즈 등의 참가사 까지.
다양한 측면에서 전시에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 바로 우진이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오늘 우진이 현장에 늦게 나타난 이유는, 현장과 관련하여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우진은 오늘 아침 일찍부터, 주최 관계자들을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이사장님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주영의 물음에, 우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뭐, 다들 기분 좋아하시지요.”
“그래요?”
“티켓 판매량도 역대 최대수량 경신했고……. 마케팅 효과도 상당히 좋은 것 같아요.”
“오……. 오늘 기대 좀 해볼 만하겠네요.”
“그렇죠.”
우진이 오늘 주최 관계자들을 아침부터 만난 이유는, 리빙페어를 시작으로 연계될 넥스트 스텝과 관련된 플랜을 짜기 위해서였다.
계획한 모든 시나리오를 최대한 잘 연계시켜 시너지를 만들어 내려면, 리빙페어의 파급력을 최대한 근접하게 예상하는 게 중요한 부분이었으니 말이다.
“주영 씨.”
“네?”
“작년 리빙페어 첫날 몇 명이었는지 알아요?”
“첫날이야 일반적으로 만 명이 넘지 않죠. 바이어나 관계자들에게만 오픈되니까요.”
“그렇죠?”
“그건 왜요?”
“이사장님께서 오늘 예상 방문객이 2만 명 정도라고 하셔서…….”
우진의 이야기에, 민주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헉……! 그게 말이 돼요? 2만 명이면 2,3일 차에도 찍기 어려운 숫자인데…….”
“그러게요.”
“하지만 주최 측에서 뽑은 데이터라면, 얼추 맞아떨어지긴 할 거예요. 빅데이터 기반으로 도출된 결론일 테니까……. 대박이네요.”
“지켜보면 알겠죠.”
주영의 반응을 본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데이터만 들었을 땐 확 와닿지 않았었는데……. 민 대표 반응을 보니 확실히 대단한 수준이긴 한가 보네.’
우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주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서 대표님.”
“넵.”
“주최 측에서, 기간 내 총 방문객 숫자는 몇 명 정도로 보시던가요?”
“한 30만에서 50만 정도 보셨어요.”
“……!”
더욱 경악한 표정이 된 민주영을 보며, 우진이 가볍게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역대 최고 수치 예상이라고 하셨어요.”
“그건 역대 최고 수준이 아닌데요? 이제껏 10만을 넘었던 리빙페어도 거의 없었는데…….”
“일단 기간부터가 3일이 아니라 일주일인데다……. 명실상부한 국제리빙페어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애초에 방문객 타겟 범위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니까, 얼마든지 가능한 수준이라고 생각해요.”
주영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우진은, 천천히 전시 부스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전시 첫날인 오늘은 일반 방문객의 출입이 제한되지만, 우진과 주영은아마 가장 바쁜 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었다.
대부분의 매체와 기자들의 방문이 오늘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우진에게 잡혀 있는 인터뷰 일정만 해도 열 건이 넘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래서 두 사람은 전시 오픈 이전에 마지막 여유를 즐기기 위해 캔커피를 한 잔씩 뽑아 들었다.
특히 새벽부터 지금까지 계속 전시장 안에만 있던 주영은 바깥 공기를 좀 쐬고 싶었기에, 테라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테라스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간 순간.
“……!”
주영은 또다시 놀란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본, 우진이 웃으며 한 마디 건네었고 말이다.
“아까보다 더 늘었네요. 아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주영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건물 바깥까지 길게 늘어서 있는 방문객의 행렬이었다.
* * *
오랜만에 만난 두 스페인의 건축가는, 오늘 기분 좋게 코엑스에 방문하였다.
“하하, 바이어(Buyer)라. 딱히 오늘 여기에 뭘 사러 온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꼭 뭘 사야 바이어던가. 그냥 업계 관계자면, 다 바이어라고 할 수 있지.”
“하긴. 오늘 마음에 드는 자재업체라도 있다면, 내 스튜디오와 거래하는 시공업체들에게 소개해 줄 수 있을 테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로군.”
“쓸데없는 소리 말고, 들어가기나 하세.”
두 스페인의 건축가란, 당연히 브루노와 마테오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마테오는 어제 서울에 도착하여 브루노의 집에서 하루를 묵었고.
때문에 오늘 코엑스 전시장에도 브루노의 차를 타고 함께 오게 된 것이다.
“흐흐. 기대되는구만.”
“뭐가 말인가?”
“서우진 대표의 작품도 기대되고, 미디어 컨텐츠와 공간의 융합이라는 걸……. 어떻게 표현했을지도 기대되고.”
“확실히 흥미로운 전시이긴 하지.”
[Buyer]라고 인쇄되어있는 표찰을 만지작거리던 마테오는, 그것을 목에 걸고 전시장 입구를 통과하였다.
전시장에 일찍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꽤 오래 기다려서야 부스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물론 우진에게 연락했다면 따로 줄을 설 필요 없이 입장할 수 있었겠지만, 두 사람은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두 건축가 모두 프로젝트가 일단락되어 오랜만에 시간적인 여유도 많이 있었고.
무엇보다 현장감을 그대로 느끼며 전시 부스를 관람하고 싶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둘은, 일부러 한류 컨텐츠가 메인으로 구성되어있는 A섹터에 먼저 입장하였다.
어차피 한 바퀴 돌면 B섹터까지 동선이 이어져 있기도 했다.
“Korean wave(한류)라…….”
“우리에겐 꽤 생소한 용어지만, 요즘 유럽 젊은이들 중에도 이 한국 대중문화에 관심 있는 청년들이 많다고 들었네.”
브루노의 설명에, 마테오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군. 재미있어.”
“사실 나는 K-POP은 잘 모르겠고, 요즘 한국 드라마를 그렇게 재밌게 시청하는 중이지.”
“하하. 프로젝트 끝나고 한국에서 뭐 하나 했더니, 드라마나 보면서 노닥거리고 있었구만?”
“생각보다 재밌다니까? 뭔가 스토리가 유치한 것 같으면서도, 다음 편을 계속 보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단 말이지.”
두 디자이너는 전공 분야와는 연관성이 적은 A섹터의 부스들도 꽤 흥미롭게 관람하였다.
한류 컨텐츠들이 흥미롭기도 했지만,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늘의 전시 자체가 이 한류 컨텐츠와 공간디자인이 콜라보된 전시다보니.
리빙페어가 아닌 A섹터의 공간구성도 꽤 짜임새 있고, 세련되게 디자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여 A섹터를 한 바퀴 전부 돌았을 때, 두 건축가의 표정은 더욱 상기되어 있었다.
“이제 저쪽으로 이동하면 B섹터인 거지?”
“그렇지. 슬슬 넘어가 볼까?”
“좋아. 이 컨텐츠들을 공간 디자인적인 측면에서 어떤 방식으로 풀어냈을지 몹시 궁금하구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 두 사람은, 기대감 넘치는 표정으로 B섹터에 들어섰다.
비교적 좁은 통로를 지나 부스 안쪽으로 들어서자, 높은 천정고를 가진 탁 트인 로비가 가장 먼저 둘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널찍한 로비에 발을 딛은 순간.
“와우.”
“크……!”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로비 뒤편에 가장 먼저 보이는 멋들어지는 건축 조형이, 바로 우진이 작업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