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237화 (237/315)

237화

부정(否定)하는 것과

부정(不正)한 것

공모전 결과가 나왔다.

사실상 모두가 예상했던 결과.

하지만 그 결과를 본 우진은, 다른 측면에서 조금 아쉬운 기분이었다.

‘쩝. 여기서 이렇게 꼬리를 자르고 나간단 말이지?’

우진은 평소 공격적인 성향은 아니었지만, 먼저 걸어온 싸움을 피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크게 판이 갈린 김에, 건축가협회를 비롯해 그들과 연계된 국토부 인물들까지 제대로 한 방 먹여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진은 아무리 자신이 압도적인 발표를 했다 해도 국토부와 협회에서 예정대로 준호를 밀어줄 것이라 생각했었고.

그렇게 됐더라면 준비된 패들을 적극 활용하여 제대로 물을 먹여 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우진의 생각보다, 훨씬 더 판단력이 좋았다.

깔려있는 판 자체의 불리함을 느낀 것인지, 그대로 발을 빼버렸으니까.

‘하긴. 그렇게 쉽게 걸려들 놈들이었으면, 이렇게 오래 해 먹고 있지도 못하겠지.’

어쩌면 저들의 판단력보다는, 우진이 깔아놓은 설계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효과가 좋았던 건지도 몰랐다.

특히 SNS는, 우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파급력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아마 우진을 의식했다기보다는, 이 상황에서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준호를 밀어주는 게 잃는 것이 더 많은 선택이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뭐, 어찌됐든…….’

공모 결과가 떠올라 있는 웹 페이지를 끈 우진이, 기분 좋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정도면 베스트지 뭐.”

협회에 한 방 먹여주지 못한 게 아쉬운 것과 별개로, 우진은 모든 실익을 전부 챙겼다.

처음 우진이 제안했던 대로 모든 프로젝트가 성사되었으며, 그 프로젝트의 설계를 직접 맡게 되었고.

개발계획의 가시화 덕에 우진이 가진 성수동 지분도 몇 배 이상으로 가격이 뛰어올랐다.

지금 사무실이 입주해 있는 지식산업 센터를 비롯해서 서울숲 옆에 짓고 있는 신사옥.

그리고 성수 1지구에 매수해 놓은 대형지분의 재개발 단독주택까지.

마치 톱니바퀴가 굴러가듯 정확히 맞아떨어진 이 모든 것들을 이익으로 환산한다면, 아마 천문학적인 액수를 산정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까 형. 오늘은 오랜만에, 회식이나 한 번 할까?”

“좋지.”

퇴근 직전.

진태에게 부탁해 회식 예약을 잡은 우진은, 오랜만에 전 직원들과 회식을 하였다.

언제나 그랬듯 WJ 스튜디오의 회식은 참석이 강제되지 않는 자율회식이었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회식 자리에 왔다.

특히나 오늘같이 특별히 좋은 일이 있는 날에는, 더더욱 빠지는 사람이 없었다.

이번 프로젝트를 추진한 것은 우진이었지만, 이 모든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직원 모두의 노력 덕분.

그들 서로서로를 축하해주기 위한 자리였다.

“다들 배 터지게 먹읍시다!”

“고생하셨습니다, 대표님!”

“감사합니다, 대표님!”

그리고 이렇게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WJ 스튜디오의 7월도 막을 내렸다.

* * *

권주열은 기분이 무척이나 나빴다.

근래 들어 이렇게까지 기분이 다운됐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

그 이유는 당연히 <성수 전략정비구역 통합설계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건축가협회장이 된 이후, 작정하고 누군가를 밀어줬던 프로젝트에서 이렇게까지 물을 먹어본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김준호, 이 멍청한 자식…….”

심지어 이 결과를 가지고, 어디다 항의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이 상황은 그가 가진 인맥과 권력을 전부 사용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완벽히 외통수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SNS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만약 대외적으로 이 모든 심사과정이 오픈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든 윗선에 압력을 넣어 보겠지만.

십만 명이 넘는 서울시민이 발표 영상을 본 시점에선, 권주열이 담당자라 하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때문에 그의 권력이 닿는 실무자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며, 그냥 이렇게 뜻대로 아무것도 되지 않는 모든 상황에 화가 날 뿐이었다.

“야, 임 실장.”

“예, 협회장님.”

“너는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어떻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수가 있어?”

“죄, 죄송합니다.”

“하…… 진짜. 빌어먹을.”

그래서 권주열의 화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바로 자신이 떠먹여 준 밥을 제대로 삼키지조차 못한 김준호였으며.

그 이후 최종적으로 화가 뻗친 곳은,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서우진이었다.

물론 SNS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판을 뒤집어버린 장본인이 서우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진에게 그런 정도의 역량이 있다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인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배경을 떠나서라도 이번 사업을 ‘건축가협회와 아무 연관 없는’ 우진이 따갔다는 자체가 짜증이 났으며.

이번 이슈로 인해 그런 근본 없는 어린놈을 ‘최고의 건축디자이너’라며 떠받들고 있는 대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우진이라는 놈이 발표하는 영상도 잠깐 틀어봤다.

하지만 이미 색안경이 잔뜩 쓰인 상태에서 본 우진의 발표 영상은, 그저 겉만 번지르르한 어린놈이 말만 그럴싸하게 잘하는 느낌일 뿐이었다.

‘이 짜증 나는 놈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까?’

주열은 자신과 건축가협회가, 우진보다 훨씬 더 우월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나아가 한국의 건축업계에서, WJ 스튜디오가 발붙일 곳 없도록 만들어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주열은 우진을 벼르기 시작하였다.

* * *

더위가 막바지 기승을 부리는 8월이 되었다.

그리고 WJ 스튜디오의 직원들은, 오늘도 그 더위만큼이나 열정적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7월까지 WJ 스튜디오의 가장 큰 관심사가 성수지구 프로젝트 공모에 관련된 것이었다면.

8월에 가장 많이 떠오른 이슈는, 바로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릴 국제 리빙페어였다.

급박하게 진행된 프로젝트 때문에 일정도 빡빡해져서, 직원들은 정말 밤낮없이 일하고 있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바쁜 사람은 바로 우진이었다.

리빙페어 프로젝트는 KSJ엔터에서 제작하는 <천년의 그대>부터 시작해서, <벨로스톤즈>의 민주영 대표. 거기에 서울 디자인 재단까지 연계되어있는 프로젝트였고.

이 사이에 연결고리가 바로 우진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우진은 이 모든 부분들을 조율하기 위해 오늘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아, 네! 대표님.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천천히 오셔도 돼요. 아직 시간 좀 남았는걸요.]

“그, 오늘 가면……. 홍보에 쓰일 트레일러 영상도 볼 수 있는 거죠?”

[물론이에요. 멋지게 준비해 놨으니까, 걱정 마세요.]

“흐흐. 기대하겠습니다.”

우진이 오늘 향하는 곳은, KSJ엔터테인먼트의 본사 사옥이었다.

그리고 KSJ엔터로 향하는 우진의 차에는 한 사람이 더 타고 있었는데, 그의 정체는 바로 서울시 디자인 재단의 사무관인 오현태였다.

“오, 서 대표님. 오늘 트레일러 영상도 볼 수 있답니까?”

오현태의 물음에, 우진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는데요?”

“그, <천년의 그대> 드라마에 방영될 영상을 편집한 느낌이겠죠?”

“그럴 겁니다. 아무래도 리빙페어와 한류 컨텐츠관 홍보만을 위해 따로 트레일러를 제작할 여력은 촬영팀에도 없을 테니까요.”

“아. 당연히 그걸 바라고 말씀드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

우진이 디자인 재단의 실무자와 함께 KSJ엔터로 향한 이유는 간단했다.

한류 컨텐츠와 콜라보 된 이번 특별한 리빙페어에서, <천년의 그대>만큼 그 컨셉을 잘 살리는 컨텐츠는 없었고.

때문에 <천년의 그대>와 관련된 콜라보 전시부스만큼은, 디자인 재단의 실무자인 오현태가 직접적으로 관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특히나 방금 이야기한 트레일러 영상의 경우, 현태 개인적으로도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던 영상이었다.

‘서 대표님이 디자인한 그 세트장에서……. CG까지 제대로 들어간 영상이 뽑히면 얼마나 멋있을까.’

이미 우진이 디자인한 세트장을 사진뿐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봤던 현태는, 이 트레일러 영상이 멋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물론 현태가 <천년의 그대> 주연 여배우인 성하영의 팬이라는 부분도 기대감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긴 했지만 말이다.

끼이익-

오랜만에 방문하는 KSJ엔터 건물 주차장에 능숙하게 차를 댄 우진은, 현태와 함께 차에서 내려 건물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우진의 귓전으로, 문득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서우진! 너 여기 어쩐 일이야?”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KSJ엔터의 소속 배우 임수하였다.

* * *

또르륵-

시원한 냉커피가 한 잔씩 세팅되자,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소정이었다.

“그래서, 수하까지 같이 끼어 들어온 거야?”

“그냥 어쩌다 보니…….”

멋쩍은 표정이 된 수하가, 오현태를 슬쩍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오 사무관님이 괜찮다고 하셨어. 그렇죠, 사무관님?”

배시시 웃으며 묻는 수하를 향해, 오현태가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다, 당연합니다. 임수하 배우님도 엄연히 관계자 아니십니까?”

소정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까메오 출연도 출연은 출연이니까……. 관계자 맞네요. 프흐흐.”

훈훈한 대화를 시작으로 가벼운 담소가 오갔다.

워낙 프로젝트 진행이 순조롭게 잘 되고 있다 보니, 불편한 대화를 해야 할 일은 없었다.

“그나저나 이번에 서 대표님 덕에, 저희 프로젝트도 콩고물 좀 떨어지는 것 아니예요?”

소정의 이야기에, 우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뭐, 효과가 없진 않겠지만……. 그게 뭐 드라마에까지 그렇게 영향을 끼치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이번에는 오현태가 대답했다.

“하하, 서 대표님 너무 겸손하시네요. 대표님 그 영상 덕에, 최근에 리빙페어까지 이슈화되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일부러 저희 쪽에서 푸쉬를 했으니…….”

우진은 멋쩍은 표정으로 겸손히 이야기했지만, 지금 우진의 상황은 말 그대로 ‘물이 들어오고 있는’ 형국이었다.

시청에서 했던 프레젠테이션 영상이 이슈화되면서 우진의 모든 행적이 재조명되는 시점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리빙페어와 <천년의 그대>라는 새로운 떡밥은, 대중의 관심을 끌어 모으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 누구보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기획사 대표인 소정은, 우진의 동의를 받은 뒤 드라마에 대한 정보까지 타이밍 좋게 풀어 놓았다.

대형 여배우 성하영을 비롯한 최고의 배우진과 무려 백억이라는 커다란 액수가 투입된 블록버스터급 드라마라는 정보를 시작으로.

드라마의 메인 촬영지가 이번에 이슈가 된 우진이 디자인한 세트장이라는 정보를 곁들여 놓으니,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여기저기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바이럴 마케팅의 일환이었는데, 그 파급력은 소정과 우진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뛰어났다.

그 세트장이 처음 대중에 공개되는 것이 리빙페어라는 한 줄 정도의 정보만으로도, 이번 코엑스 리빙페어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꽤 생겨날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이 정도면 진짜 효과 좋은 겁니다. 덕분에 이사장님께서도 요즘 엄청 기분 좋으십니다. 하하.”

“그래요?”

“소정 대표님께서 진짜 발 빠르게 대처 잘 해주신 것 같아요.”

소정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물 들어오는데. 얼른 노 저어야죠.”

우진이 냉커피를 절반 정도 마셨을 즈음.

가벼운 이야기들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어쨌든 오늘 이 자리는 마케팅을 비롯해 구체적인 프로젝트 일정 회의를 위한 자리였고.

서울시 디자인 제단과 관련된 프로젝트인 만큼, 어찌 보면 공무 수행을 해야 하는 중요한 자리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웃고 떠들던 수하도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고.

곧 우진의 말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오 사무관님. 이천시 쪽에서, 특별한 제안이 하나 들어왔다는 거죠?”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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