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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231화 (231/315)

231화

역공

월요일 아침.

최근 들어 잠이 줄어든 탓에 일찍 일어난 권주열은, 맛있는 아침 식사를 한 뒤 기분 좋게 동네를 산책하였다.

압구정에 사는 주열은 조금만 걸어 나가면 한강공원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의 아침 산책코스는 항상 한강공원이었다.

여느 때처럼 키우는 강아지를 끌고 나가 산책을 하던 주열은, 아침 햇살로 반짝이는 한강을 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언제 봐도 한강은 아름답단 말이지.’

주열이 처음 압구정에 집을 사던 20여 년 전만 해도.

한강 변의 아파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피하는 공간이었다.

특히나 한강 남쪽인 압구정의 경우 한강뷰가 나오려면 북향으로 아파트를 지어야 했는데.

당시에는 조망권이 아파트를 선택하는 데 그리 큰 매력점이 되던 시절이 아니었으니, 한강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파트를 전부 남향으로 지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조망권마저 잃어버린 한강 변의 아파트들에게 남은 것은, 강변을 따라 넓고 길게 이어져 있는 올림픽대로의 소음과 분진뿐이었다.

그래서 주열 또한 압구정 아파트를 매입할 때, 한강 변보다는 압구정역에 가까운 아파트를 매수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소음과 분진도 어느 정도 해결되었으며.

한강을 포함한 멋진 서울시의 씨티 뷰가 시원하게 보이는 한강 변의 신축 아파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로망이 되었다.

그것은 주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주열은 다음 이사 갈 집으로, 이번에 협회 후배가 설계 중인 <성수 전략정비구역>이나 아직 개발준비가 한창인 <한남 뉴타운> 등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식들도 전부 다 키워 시집 장가를 보낸 주열은 이제 학군도 필요 없었고.

그래서 딱히 강남에 미련이 남아있지 않았다.

‘사업자 선정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공사가 시작되면……. 조합 쪽에 슬쩍 숟가락을 얹어봐야겠군. 분양 홍보할 때 내 이름도 가져가 써야 할 테니……. 쉽게 모른척할 수는 없겠지.’

이미 주열의 머릿속에 성수 전략정비구역의 설계는, <이호설계사무소>의 설계로 확정되어있는 상황이었다.

그 설계의 총괄 고문으로 주열 자신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고.

이렇게 되면 분명 조합이나 시공사는 일반분양을 홍보할 때 자신의 이름을 팔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아직 대중에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호설계사무소>의 설계로 지어졌다는 홍보보다는.

고(故) 박문주 건축가의 제자이자 현 건축가협회 회장인 자신의 이름을 부각시키는 것이, 대중에게 더 먹힐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몇 다리만 건너면 시공사 관계자도 연이 닿을 테고 국토부까지 주열의 편일 테니.

수많은 일반분양분 중 한 채 정도를 조금 저렴하게 분양받는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으리라.

물론 ‘비공식’적인 절차로 진행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런 기분 좋은 생각들을 하던 도중, 주열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시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발표 날인가?”

어차피 설계 공모는 형식적인 절차라고 생각한 탓에 그 날짜까지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월요일인 오늘이 바로 설계 공모의 최종 프레젠테이션 날이었던 것이다.

똘똘한 후배의 얼굴을 떠올린 주열은, 생각난 김에 곧바로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내었다.

그리고 곧바로 전화를 걸기 시작하였다.

‘약간’의 도움을 주기 위해서 말이다.

오늘 발표가 있을 후배 준호를 격려하기 위한 전화는 아니었다.

그의 휴대폰 화면에 떠오른 수신자 번호는, 이번 프로젝트를 총괄 운영하는 국토부의 담당자 김지환이었다.

띠리리링-

주열이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는 동안, 심플한 송신음이 여러 번 울렸다.

하지만 꽤 긴 시간을 기다렸음에도, 김지환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어…….]

뚜- 뚜-

전화기를 귀에서 뗀 주열은 고개를 갸웃하였다.

“흠. 너무 바쁜 시기에 전화를 했나…….”

직속 후배인 지환은 어지간하면 주열의 전화를 곧장 받던 사람이었는데.

전화를 받지 않으니 조금 의아했던 것이다.

‘그래. 뭐, 알아서 하겠지.’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긴 주열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7월의 날씨는 더웠고.

주열은 해가 더 높이 떠오르기 전에 아침 산책을 빨리 마치고 집으로 귀가할 생각이었다.

* * *

<우리 집에 왜 왔니>의 공진영 피디는, 오전에 무척이나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신인이었던 그녀를 한달음에 예능 스타 피디로 만들어준 작품인 <우리 집에 왜 왔니>.

이 프로그램의 개국공신이나 다름없는 게스트로부터, 오랜만에 전화를 받은 것이다.

“어머, 서 대표! 왜 이렇게 오랜만이에요!”

[하하, 제가 최근에 워낙 바빴어 가지고…….]

“촬영장 한번 놀러 오시라니까. 안 오시고.”

[촬영장 가면 일일 게스트 한다고 할 때까지 집에 안 보내주실 거 아닙니까.]

“칫. 그건 당연하죠. 서 대표 너무 비싸다니까. 요즘 컨텐츠 쥐어짜느라 나 머리에 쥐난다고요. 서 대표가 게스트로 한 번 나와 주면 얼마나 좋아.”

[시즌 끝나기 전에 한 번은 꼭 나가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흐흐.]

“정말이죠?! 약속한 겁니다아!”

[네. 정말입니다, 피디님.]

“으흐흐. 좋아!”

오랜만에 우진의 전화를 받은 진영은, 이런저런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역시나 우진은, 그냥 안부 인사차 전화한 것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피디님.]

“네?”

[요즘 컨텐츠가 부족하시다고 그랬죠?]

“더 말하면 입 아프죠. 지금 이 프로그램만 몇 년짼데……. 아직 컨텐츠가 남아있으면 그게 신기한 거 아니예요?”

[제가 괜찮은 컨텐츠 하나 알고 있는데…….]

“아니. 그런 게 있으면 당장 말해줘야죠! 무슨 컨텐츤데요?”

대화하던 도중 뜬금없이, <우리 집에 왜 왔니>에 방영할 만한 괜찮은 컨텐츠 하나를 공PD에게 투척한 것.

심지어 그것은 공진영이 충분히 솔깃해할 만한 컨텐츠였다.

[수하 누나 마포에 아파트 산 거 아시죠 피디님.]

“그거야 알죠. 아직 짓는 중이라던데…….”

[그거 다음 주에 사검입니다.]

“사검? 그게 뭐에요?”

[사전점검이요. 아파트 입주하기 직전에, 하자는 없는지 집주인이 한 번 둘러볼 수 있는 날이 있거든요.]

“오, 오오!”

우진의 말을 듣자마자, 공진영피디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한다.

“그런데 서 대표님. 사전점검 때 촬영을 들어가려면, 건설사에 따로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니예요?”

[당연하죠.]

“음. 그건 사업부에 전화하면 해주려나……?”

[원하시면 건설사 쪽에 제가 연결해 드릴게요.]

“진짜요?”

[네. 그 아파트 시공사가 천웅건설인데, 거기 저랑 좀 친하거든요.]

“대박!”

[그러니까 수하 누나 한번 슬쩍 떠보세요. 제가 말했다고는 하지 마시고요.]

“오, 오케이! 좋았어. 고마워요 서 대표. 이거 진짜 괜찮은 그림 나올 것 같아.”

공진영은 우진이 갑자기 이 이야기를 던져주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것이 중요하진 않았다.

마침 촬영 비축분이 없어서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파오던 참이었는데.

메인 패널인 임수하가 새집을 장만했다는 컨텐츠는, 몇 회 분량을 아주 재밌게 때워 넣을 수 있을 만한 훌륭한 소재였으니까.

그런데 우진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우진도 한 가지 원하는 것이 있었다.

[대신 피디님. 저도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뭔데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거라면 당연히…….”

[사전점검 촬영 나갈 때, 제 이름 좀 최대한 많이 팔아주세요.]

“네? 대표님 이름을 팔라고요?”

[거기 처음 홍보관 오픈했을 때, 홍보관 디자인이랑 건축모형 제작 전부 제가 했었던 곳이거든요.]

“오……! 우와!”

[찾아보면 당시 기사도 꽤 많이 뜰 텐데, 그때 자료 첨부하면서 제 이름 언급 좀 많이 해주세요.]

우진의 부탁은 공피디의 입장에서 사실 어려울 게 없었다.

어차피 우진이 처음 유명해진 프로그램이 <우리 집에 왜 왔니>였고, 시청자들 대부분이 우진을 기억하고 있었으니.

프로그램의 감초 역할로 우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오히려 흥미 유발 차원에서 프로그램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요즘 시청자 게시판 보면, 서 대표 언제 다시 나오냐는 이야기도 많으니까…….’

그래서 공진영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죠. 그거면 돼요?”

[네, 됩니다.]

“흐흐. 알겠어요, 서 대표.”

[감사합니다, 피디님. 제가 조만간 밥이라도 한 끼 살게요.]

“오케이. 좋아. 밥 먹으면서 출연 날짜도 같이 잡는 거죠?”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크으! 대박!”

우진과 통화하던 공진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하였다.

시즌이 끝나는 시점에서 우진이 한 번 출연해 준다면,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장식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고마워요, 서 대표. 그럼 조만간 봐요, 우리!”

[그럼 저는 일이 좀 있어서 이만…….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피디님!]

“네, 연락 줘요.”

뚝-

하지만 진영은 전화를 끊는 순간까지도, 우진이 왜 그런 부탁을 했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 * *

전화를 끊은 우진이, 조수석 의자에 허리를 기대었다.

그러자 운전대를 잡고 있던 진태가, 우진에게 물어보았다.

“누구야?”

“공진영 피디님.”

“그 <우리 집에 왜 왔니>?”

“맞아.”

우진은 오늘 <성수 전략정비구역> 통합설계 발표를 위해, 진태와 함께 시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원래 발표장소는 성수동에 있는 고등학교의 대강당으로 잡혀 있었지만, 서울시에서 갑자기 시청으로 장소를 바꾼 것이다.

다른 발표자들이야 그 이유를 몰랐지만, 우진은 잘 알고 있었다.

‘종호 어르신께서 움직여 주신 모양이네.’

서울시청으로 발표장소를 옮겨서 발표내용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그것을 서울시 공식 SNS에 올려 이슈화시키자는 전략.

그것이 처음 기획된 것이, 바로 우진의 머릿속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오늘 공PD에게 전화를 한 것도, 이 계획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었다.

“피디님이랑은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그냥 별 얘기 아냐. 오랜만에 안부 차 전화나 한번 드린 거지 뭐.”

“그런 내용이 아닌 것 같던데…….”

“흐흐. 지금 설명하긴 좀 복잡하고, 발표 끝나면 다 얘기해 줄게.”

“그러던가.”

아마 오늘의 발표는, 서울시 공식 SNS 계정에 아주 적나라하게 게시될 것이다.

오늘 우진이 시청을 향해 출발하기 전, 이미 모든 참가사에 서울시가 협조공문이 내린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우진을 제외한 다른 참가사의 발표자들은, 이게 별 것 아닌 이슈라고 생각할 터였다.

서울시의 공식 SNS라고 해 봐야 아직 팔로워 숫자가 수천 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규모였고.

이런 공공기관의 SNS는 아직까지 파급력을 갖기 힘든 상황이었으니.

그냥 탁상행정의 일부라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우진이라는 변수가 빠진다면, 실제로 그런 양상이 될 확률이 높기도 했다.

‘만약 내가 따로 손을 쓰지 않으면 묻힐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오늘 공PD와의 연락도, 지금 우진이 지피고 있는 불씨를 더욱 활활 타오르게 만들어 줄 설계의 일환이었다.

대중에게 ‘서우진’이라는 이름이 더 많이 언급될수록 자신의 SNS계정 팔로워들이 늘어날 테고.

그가 직접 서울시 게시글을 스크랩하고 팔로워들에게 공유한다면, 그것이 곧 파급력으로 이어질 테니 말이다.

우진은 지난 몇 달 동안 준비한 자신의 디자인과 설계를, SNS와 미디어를 통해 최대한 많은 대중에게 알릴 생각이었다.

함께 발표할 다른 회사들의 작품까지 같이 알리는 것은 덤이었다.

그들과 비교해서 WJ 스튜디오의 설계가 얼마나 뛰어난지.

그것을 서울시민들의 앞에 증명하는 것이 우진의 최종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려면 오늘 이 발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프레젠테이션을 하는게 먼저겠지.’

끼익-

우진이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진태가 운전하는 차는 시청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뒷자리에 앉아있던 직원이, 우진을 향해 조심스레 말했다.

“대표님, 도착했습니다.”

“아, 벌써 왔군요. 내리시죠.”

차에서 내린 우진은, 발표 자료가 들어있는 가방을 챙겨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우진은 자신 있었다.

오늘의 발표를 기점으로, 그가 짜 놓은 판 위에 묻은 뜻밖의 오물들을 깔끔히 청소해 낼 자신이 말이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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