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역공
이호설계사무소는 오늘 무척이나 분주했다.
지난 몇 달 동안 가장 많은 인력을 투입하여 준비한 올해의 메인 프로젝트.
<성수 전략정비구역>의 통합설계 공모 최종 프레젠테이션 날이, 바로 오늘이었으니 말이다.
“다들 빨리 움직여! 오후에 출발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리터칭 하고 있는 게 말이 돼?”
“죄송합니다, 대표님. 마감처리 최대한 신경 쓴다고…….”
“점심 이후에는 작업 일절 하면 안 된다. 알지?”
“넵. 전부 픽스해서 대기 시켜놓겠습니다.”
사실 공모 마감 자체는 이미 일주일 전에 끝난 상황이었다.
일주일 전인 6월 마지막 주가 바로 1차 마감일이었고.
이호설계사무소는 1차 심사를 아주 쉽게 통과했으니까.
그리고 원칙상으로는, 그때까지 모든 설계가 끝나 있어야 맞는 것이었다.
1차 설계에 제출했던 프레젠테이션 파일과 설계‧조감도를 가지고, 2차 심사에서 프레젠테이션 발표를 하는 게 원칙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오늘까지도 이호설계사무소의 직원들이 분주했던 이유는, 어쩐 일인지 그 룰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공모 주최 측에서 2차 마감일까지, 추가수정을 허용해준 것이다.
‘후. 진짜 협회장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지.’
일주일 전을 떠올린 이호설계사무소의 대표 김준호는, 안도의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만약 이렇게 룰이 바뀌지 않았더라면, 아주 곤란한 상황이 될 뻔했다.
준호는 공사비가 조 단위를 넘어가는 수준의 설계의뢰가 처음이었던 탓에.
의욕만 앞서 설계를 크게 벌려 놨다가 일정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었으니까.
‘그래도 결과적으론 잘 됐지 뭐. 퀄리티 하나는 정말 잘 나왔으니까.’
작업하는 직원의 뒤에서 그의 모니터를 응시한 준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모니터 위에는 준호가 디렉팅하여 디자인하고 설계된 <성수 전략정비구역>의 조감도가 멋들어지게 뽑혀 있었으며.
그것은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눈길을 확 사로잡을 정도로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다.
‘어차피 공모 당선이야 이미 확정이나 다름없겠지만, 그래도 내 이름 걸고 서울시에 이만한 규모의 건축을 할 기회는 앞으로 없을 테니…….’
준호는 작업 중인 직원들을 꼼꼼히 둘러보며, 최종 발표 문서들을 패킹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완벽을 기하기 위해, 점심마저 거르면서 일했다.
비록 협회장 권주열의 인맥과 힘 덕에 수월하게 당선될 예정(?)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실력도 없고 역량도 안 되는 놈이 협회장 백으로 이런 대형 공모를 가져갔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은 준호였다.
‘분명히 시기 질투하는 놈들은 어디에든 나올 테지.’
물론 권주열이 아니었더라면 1차에서 짤려 나갔을 준호에게는, 아이러니하기 그지없는 사고방식이었지만 말이다.
“송 팀장!”
“예, 대표님.”
“이제 패킹 끝내고, 출발하자고!”
“알겠습니다.”
“윤 실장도 준비 다 했지?”
“네. 저는 준비 끝났어요, 대표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준비를 마친 준호와 이호설계사무소의 직원들은, 회사 차량을 타고 발표장으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 차량안에서.
준호는 점점 더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설계로 시작된 이번 전략정비구역의 건축이 완공된다면.
이호설계사무소의 입지는, 지금과 완전히 달라져 있을 테니까.
국내 최고 설계사무소의 반열에 <이호설계사무소>의 이름을 올려놓을 생각에, 준호의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 * *
서울시장 구윤권은, 부임한 이후로 하루도 여유로운 날이 없었다.
부임 직후에 일이 많은 것은 당연한 부분이지만, 그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일 더미에 깔린 수준으로 바빴던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영향력이 큰 것은 이 두 가지였다.
첫째, 전임시장이 임기 마지막까지 벌려놓은 일이 너무 많았다는 점.
둘째, 구윤권이라는 사람 자체가, 또 일을 많이 벌리는 사람이라는 점.
윤권은 전임시장이 엉성하게 벌려놓은 일을 수습하면서도 그것을 더 발전시켜 자신의 일로 만들고 있었으니.
야근이 일상화될 정도로 바빴던 것이다.
하지만 윤권은 이렇게 바쁘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항상 신경 쓰고 있는 프로젝트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번 성수 전략정비구역의 통합 개발이었다.
그것은 당연했다.
윤권은 부임한 이래로 벌써 많은 일들을 시작했지만.
그중에서도 압도적으로 규모가 큰 개발 사업이 바로 강변북로 지하화가 포함된 성수동 전략정비구역의 프로젝트였으니까.
윤권이 실무자들을 독려하면서 항상 하는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다.
“영동대교부터 성수대교까지……. 이 구간에 멋진 건축물들이 들어오면서 일대가 정비되고 나면, 서울시 한강 동쪽의 경관이 완전히 살아날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번 프로젝트에 신경 쓰던 중.
윤권은 최근 불쾌한 경험을 한 번. 아니, 여러 번 해야 했다.
성수지구 프로젝트는 워낙 사업의 규모가 크다 보니 서울시 독단으로 진행할 수 없었는데.
설계 공모와 관련된 국토교통부와의 소통 과정에서, 불합리한 상황을 여러 번 겪게 된 것이다.
일단 가장 처음에 겪었던 불합리한 처사는, 바로 서울시와 상의 없이 내려간 국토부의 공문이었다.
“실장님. 이번 공문, 진짜 기획조정실에서 오피셜하게 나간 겁니까?”
[그렇습니다, 시장님. 무슨 문제라도…….]
“아니, 국토부와 연계됐다고는 하지만, 이번 설계 공모를 주관하는 기관은 엄연히 서울시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어떻게 서울시와의 상의도 없이 독단으로 공문을 쏘실 수가 있는 겁니까?”
[아……. 시장님께서 공모 과정에까지 신경 쓰실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서울시에서도 역대급으로 크게 진행되는 사업입니다. 이런 사업에서 발생하는 비용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은 서울시에서도 원치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시공만 국내 건설사에 맡겨도 되는 문제 아닙니까! 설계는…….”
[1차관님께서 직접 지시한 부분이라……. 정말 죄송합니다.]
“후우…….”
구윤권은 똑똑한 사람이다.
때문에 이 상황에 어떤 외압이 들어왔음은, 처음 공문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뒤집어엎지 않은 이유는, 실리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중요한 사업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 정도의 문제로 국토부와 한바탕 싸웠다가는, 사업 진행 자체에 불협화음이 나오게 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 일단 넘어가자. 해외 설계사무소에서 들어오지 못한다고 해도……. 서 대표의 설계는 받아볼 수 있을 테니까.’
구윤권은 이번 사업이 자신 임기 내에 진행된 첫 사업인 만큼, 정말 최고의 아웃풋을 뽑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우진의 WJ 스튜디오가 공모에 참가하는 것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해외 스튜디오들의 멋진 설계를 고려해볼 수 없음은 아쉽게 되었지만, 그래도 우진이라는 믿음직한 보험이 하나 있는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구윤권을 불쾌하게 하는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얼마 전 이번 공모를 주관하는 도시관리국의 국장과 대화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또 듣게 되었으니 말이다.
“국장님. 우리 오늘이 1차 마감이지요?”
“1차 마감이라면……. 아! 성수 전략 정비 말씀이시군요, 시장님!”
“예, 맞습니다.”
“어제까지가 마감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부터는, 공모 들어온 설계들 하나씩 부서에서 검토 중일 겁니다.”
“오호. 혹시 몇 개사나 지원을 했던가요?”
“어……. 제가 정확히 지금 기억은 나지 않는데, 아마 다섯 개 사가 안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네에……?!”
“아마 정상적으로 지원한 설계사무소가 네 곳이었던 것 같고……. 조금 늦게 제출한 곳이 한 곳 있는데, 여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지금 고민 중이라고 들었거든요.”
국장의 이야기를 들은 구윤권은, 그 순간 기분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었다.
‘공모에 참가한 사무소가 다섯 곳이 안 된다고?’
어마어마한 설계비가 달린 공모였다.
어줍잖은 사무소에서 엄두 낼 수 있는 수준의 공모가 아닌 것은 맞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 자릿수의 공모참가는 말이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1차 심사를 거쳐 뽑혀 나온 설계사무소가 다섯 군데라면 몰라도, 처음 지원한 회사가 다섯 곳 미만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어떻게 이럴 수가…….’
윤권은 당장에 국장에게 이야기하여 회사 명단을 받아보았고, 그나마 WJ 스튜디오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구윤권은, 또다시 불쾌한 전화까지 한 통 받게 되었다.
[시장님, 이번에 참가 사가 너무 적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 차관님.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골머리를 싸매고 있던 중이라…….”
[일단 참가 신청한 사무소들은, 전부 다 1차 심사는 통과 시키십시다.]
“예? 아무리 그래도 제대로 심사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최종심사에서 가장 뛰어난 설계 하나를 채택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
[그러니까, 유도리 있게 진행하자는 겁니다.]
윤권은 이 전화로 확신할 수 있었다.
이번 1차 심사에 들어온 설계사무소 중, 국토부 쪽에 강력한 뒷배를 가진 사무소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당장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파오기 시작하였다.
‘후, 이런 일이야 분명히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차관급이 직접 전화를 걸어 올 정도라면, 분명히 그 윗선까지도 영향력이 닿아있을 터였다.
어지간한 수준의 외압이라면 그냥 서울시장 직권으로 찍어 눌러버리면 그만이었는데, 더 윗선까지 이해관계가 얽혀있다면 그리 단순하게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일 테니까.
그래서 윤권은 고민했고…….
‘설계 수준을 전부 봐야 하긴 하겠지만……. 마음에 드는 수준의 설계가 없다면 공모를 다시 열 생각까지 해야겠어.’
우진이 자신이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뛰어난 설계를 들고 왔길 간절히 바랬다.
‘서 대표의 설계가 멋지게 뽑혀 나왔으면 좋겠군. 그러면 나도 마음껏 WJ 스튜디오를 밀어줄 텐데 말이지.’
어차피 이렇게 고위인사까지 이번 이해관계에 포함되어 있다면, 윤권의 힘으로도 완전히 막아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설계사무소가 부정한 카르텔의 힘을 빌려 공모에 참여했는지.
그걸 식별해 내고 확실한 증거를 잡는 것 또한,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고 말이다.
그래서 윤권은 머릿속이 점점 더 복잡해져 갔다.
‘내 첫 번째 프로젝트를 이대로 시궁창에 박아 넣을 수는 없어. 그러려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명분이 필요한데…….’
설계 공모의 프레젠테이션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일요일 밤.
윤권은 머리를 식히기 위해 차가운 커피를 타서 서재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윤권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던 바로 그 순간,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윤권의 스마트폰이 요란히 진동하기 시작하였고.
지이이잉-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적잖이 놀란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
스마트폰의 화면에 찍혀있는 번호의 주인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