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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228화 (228/315)

228화

새 술은 새 부대에

기분 좋게 사무실로 복귀하려던 우진은 순간 멈칫하였다.

임중우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가, 너무 예상 밖의 것이었으니 말이다.

‘건축가…… 협회? 갑자기 그 얘기는 왜 하시는 거지?’

사실 업계에서 수십 년 회사를 키워온 임중우라면, 건축가 협회와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이 있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다진건축이 설계보다는 시공 위주의 회사였으니, 협회 소속 설계사무소와도 종종 일을 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다만 우진이 의아하게 생각한 부분은, ‘성수 전략정비구역 통합 설계 공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던 중 갑자기 협회 얘기가 왜 튀어나왔냐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연줄이라니……. 뭔가 구질구질한 냄새가 나는데 이거.’

그래서 우진은 물어볼 수밖에 없엇다.

본능적으로 임중우의 이야기 안에, 뭔가 중요한 것이 있다고 느낀 것이다.

“저희 WJ 스튜디오는 협회 소속이 아닙니다, 사장님. 딱히 그쪽과 어떤 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허허, 그렇군요.”

“한데 그 부분을 왜 물어보신 건지……. 반대로 여쭤도 되겠습니까?”

우진의 물음에 임중우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차 문밖으로 나와 있던 기사를 향해 살짝 손짓하였다.

다시 운전석에 들어가 앉아 있으라는 의미.

우진과의 대화가, 조금은 길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서 대표님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런 오지랖까지 부리게 될 줄은 몰랐는데…….”

시작부터 의미심장한 임중우의 이야기에 우진이 귀를 기울였고.

“그 설계 공모. 너무 큰 자원을 투자하시지는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천천히 그의 말이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 * *

우진이 임중우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어쩌면 우진이 막연하게나마 예상하고 있던 부분이기도 하였다.

처음 해외 설계사무소의 공모 입찰을 제한한다는 공문이 내려왔던 그 시점부터.

어떤 이권이 개입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었으니까.

[업계에 대해 빠삭하시니 당연히 알고 계시겠지만, 서 대표님의 스튜디오같은 특이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어느 정도 규모 있는 건축사무소라면 거의 대부분이 협회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렇겠지요. 아무래도 협회에 가입하면 든든한 인프라를 얻는 셈이고……. 또 일감을 얻기도 더 쉬울 테죠.]

[맞습니다. 서 대표님처럼 수완이 좋으신 분이 아니라면, 협회를 찾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지요.]

임중우는 먼저 협회에 대한 이야기들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협회가 굴러가는 구조들부터 시작해서, 그 구성원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물론 우진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던 부분들도 있었다.

전생에 시공사에서 일했던 우진은 협회 소속의 설계사무소와 일했던 적도 많았으니까.

[제가 주로 거래하는 몇몇 설계사무소들도 이 협회에 속해 있습니다. 특히 그중 한 곳은, 저와 아주 친한 친구가 운영하는 사무소지요.]

[그렇군요.]

[그래서 지금 말씀드리는 부분은……. 그 친구로부터 알게 된 이야기들입 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비밀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장님.]

하지만 우진이 알던 것보다도, 임중우는 훨씬 더 깊숙이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국토부부터 시작해서 정계 쪽까지……. 건축가 협회의 인프라가 죄다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는 거군요.]

[그렇지요. 그래서 좀 규모가 있다 싶은 공공사업들의 설계는, 거의 다 협회 쪽으로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한마디로 은연중에 유지되고 있는……. 일종의 카르텔*[같은 산업에 존재하는 기업들 간의 자유 경쟁을 배제하여 독과점적인 수익을 올리기 위해 시행하는 부당한 공동행위] 이라는 거군요.]

[어느 정도 알고는 계셨던 것 아닙니까?]

[그렇죠. 하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들으니, 더 와닿는 건 어쩔 수 없나봅니다. 하하.]

[이제 대충 돌아가는 구조는 말씀드린 것 같으니……. 이번에 참여하신다는 전략정비구역 설계 공모 관련해서 조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장님. 경청하겠습니다.]

임중우는 최근 건축협회 소속인, 설계사무소를 하는 친구와 술을 한 잔 마신 적이 있다고 하였다.

그 친구 또한 국내에서는 메이저급의 설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었고, 중우와 자주 일을 함께하는 친구였는데.

원래 이번 성수 전략정비구역 공모에 참여하려 했었다는 것이다.

[준비 중이라면 아시겠지만, 이번 공모는 어중간한 규모와 실력을 가진 설계사무소는 엄두조차 내기 힘든 수준입니다.]

[아무래도 그렇지요.]

[그래서 제 친구 놈은, 공고를 보자마자 바로 입찰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소화 가능한 설계사무소 자체가 많지 않다 보니,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게지요.]

[친구분께서 운영하시는 사무소가 꽤 규모 있는 곳인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들어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성 설계사무소라고……. 객관적으로도 업계 최상위권 규모를 가지고 있는 사무소입니다.]

[들어본 적 있습니다.]

임중우의 친구가 운영한다는 오성 설계사무소는, 우진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회귀 후에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생에서 일해본 적 있는 사무소였으니까.

그래서 임중우의 이야기는 더 몰입하기 쉬웠고, 공감하기도 더 편했다.

[그런데 공모 입찰을 위해서 팀 세팅까지 다 끝내 놨을 즈음. 협회장한테 전화가 왔답니다.]

[지금 건축가 협회 협회장이 어떤 분이시죠?]

[권주열 건축가가 지금 협회장이지요.]

[아……!]

[아시나봅니다?]

[별세하신 박문주 건축가의 제자 분 아니십니까.]

[오호. 업계 족보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는군요.]

[사실 권주열 건축가는 잘 모릅니다. 박문주 님이야 워낙 유명한 분이시니 아는 거고요. 그나저나 친구분께선 협회장에게 무슨 전화를 받으신 겁니까?]

[이미 짐작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

[입찰에 들어오지 말라는 권고 전화를 받은 겁니다.]

[대놓고요?]

[원래 그런 식입니다. 협회에서 밀어주기로 한 내정자가 완전히 정해진 공모는, 협회 소속 다른 건축사무소조차 참여하지 못하게 만들지요.]

[하…….]

[이건 그들의 암묵적인 룰 같은 겁니다. 재밌는 건, 다른 사무소들 입장에서도 그 전화를 오히려 고마워한다는 겁니다. 이미 내정자가 정해진 공모에 참여하겠다고 팀 세팅하고 설계를 진행하면, 허공에 삽질을 하는 셈이 되는 건데……. 그걸 사전에 방지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 친구분께서도…….]

[하하. 워낙 큰 건이다 보니 술자리에서 조금 투덜대기는 했는데, 그냥 이런 일이 있었다 정도의 이야기일 뿐 협회에 불만을 갖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불만이 생기지 않을 수 있죠?]

[언젠가 그 친구의 차례도 돌아올 테니까요.]

[아……!]

[권주열 협회장이 물론 본인 사람을 위주로 챙기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협회 소속의 사무소들은 골고루 챙기는 편입니다.]

[그렇군요.]

[협회 내에서 민심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 또한 지금의 자리를 보전치 못할 테니까요.]

[국토부에 정계까지 움직일 수 있는 파워가 있는 인물이라면……. 그런 민심 같은 건 상관없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가 가진 힘들 대부분이 <건축가 협회의 협회장>이라는 타이틀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요.]

[아하.]

[타이틀이 없다고 인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발휘할 수 있는 힘이 현저히 줄어드는 게지요.]

임중우의 이야기들을 듣는 동안.

우진은 화가 나고 기분이 상한다기보다는, 아이러니하게도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내가 깔아놓은 판 위에……. 이런 더러운 오물이 끼어 있었단 말이지?’

만약 우진 또한 동일 선상에서 출발하는 평범한 설계사무소의 대표였다면.

이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는 동안, 얼굴이 시뻘게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어떤 유리천장을 느꼈을 때.

열정이 가득했던 사람일수록, 더 큰 허탈감과 허무함을 마주하게 되는 게 당연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진이 이렇게 흥미를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여유’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저들이야 이번 공모 자체를 ‘자신들이 깔아놓은 판’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사실 그들이 설계한 판이라는 것은 우진의 손바닥 위에 놓인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아예 몰랐으면 조금 곤란했을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다 알게 된 상황에서야 난감할 것도 없지.’

물론 우진도 최초에 자신이 가진 인프라를 활용해서 ‘판’을 깔았다는 측면에서는 협회와 조금 비슷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협회와 우진 사이에 완전히 다른 부분은.

우진은 적어도 ‘공모’라는 경쟁시스템의 본질적인 부분에서만큼은 공평한 경쟁을 추구했다는 부분이었다.

물론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 만큼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기는 했지만, 만약 WJ 스튜디오보다 더 뛰어난 설계를 들고 나온 사무소가 있었다면 우진은 깔끔하게 설계권을 포기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가장 좋은 설계가 당선되는 것이 서울시에도 좋은 일이며 성수동에도 좋은 일이었고.

이 성수동에 여러 방면으로 투자 중인 우진에게까지도 좋은 방향성이었으니까.

하지만 중우의 이야기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게 된 이 건축가 협회라는 놈들은, 애초에 그런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집단이 아니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서울시의 발전도 아니었으며, 성수동의 발전도 아니었고.

심지어 이 전략정비구역의 조합원들과 서울시민들에게 멋진 공간을 선물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협회가 움직이는 논리는 완벽히 자본의 논리였으며, 그 과정에서 어떠한 공정성도 고려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우진은 이제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인 이 더러운 오물들을, 어떻게 치우면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불합리한 카르텔을 혁파하고 업계의 공정한 경쟁 구도를 바로잡겠다는 등의 거창한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이런 카르텔 속에서 불공정한 이득을 보고 있던 이들에게.

지금껏 다른 이들이 느꼈을 무력감과 좌절감을 똑같이 맛보여주고 싶을 뿐이었다.

‘인맥이든 인프라는 내가 아직 협회를 넘을 수 있는 수준이 당연히 아니겠지만……. 적어도 성수 전략정비구역의 설계 공모라는 판 위에서는 내가 압도할 수 있을 테니까.’

어쩌면 이번 공모로 인해 협회를 적으로 돌리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이미 우진은 충분한 인지도를 쌓았으며, 협회의 힘이 닿지 않는 해외까지도 인프라를 쌓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뒀으니까.

그래서 우진은 지금의 상황이 재미있었다.

업계를 쥐락펴락하던 협회장에게, 실력에서도 인프라에서도 완벽한 패배를 안겨준다면.

그가 어떤 기분이 될지 몹시 궁금해진 것이다.

그래서 중우의 이야기가 전부 끝났을 때…….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프로젝트를 중단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사장님께선 제가 아무리 좋은 설계를 들고 공모에 입찰한다고 한들…….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렇습니다. 사실 공모 준비라는 것도 꽤나 큰 자원이 소모되는 일이 아닙니까?”

“그렇지요.”

“특히나 이 정도로 규모가 큰 공모라면…….”

우진은 고개를 저으며 빙긋 웃었다.

“오늘 처음 만난 절 위해서 이렇게까지 조언해 주신 부분은 정말 감사드립니다.”

“흠……?”

“하지만 제가 이번 프로젝트를 드랍할 일은 아마도 없을 것 같습니다.”

“허허. 역시 젋은 나이의 패기인가 보군요. 서 대표님이 이십 대라는 게 방금 전까지도 믿기질 않았었는데……. 처음으로 그 나이대로 느껴집니다. 허허헛.”

우진은 임중우에게 이 이상 이야기를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가 믿을만하고 고마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아직 우진의 사람이라고 하기는 많이 이른 시점이었으니까.

다만 우진은 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고마운 임중우건, 이 더러운 카르텔의 핵심에 있는 협회장 권주열이건.

그들이 알던 세상이, 조금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꼭 보여주리라는 다짐 말이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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