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224화 (224/315)

224화

Give & Take

패러마운트 사의 기획실장 김진수는, 최근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처음 기획실장으로 부임하던 작년 연초와 지금을 비교했을 때, 회사 내의 입지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처음 기획실장으로 발령 났을 때, 김진수는 앞이 캄캄한 상황이었다.

본래 사업부의 팀장급이었던 그가 실장으로 발령 난 것은 나이에 비해 파격적인 인사였지만.

사업부에서 무탈한 회사생활을 하던 그에게 당시 기획실은, 전쟁터나 다름없는 곳이었으니까.

건설 비리로 인해 몇 개 팀이 완전히 해체되기 직전까지 갔었던 기획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김진수는 실장 자리를 맡게 됐었고, 이것은 일종의 시험대였다.

이 상황을 수습해내면 더 높은 자리까지 성공 가도가 열릴 테지만, 반대로 능력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옷을 벗어야 할지도 모르는 시험대.

본래 능력은 있지만, 보수적인 성향이었던 김진수에겐, 그리 반갑지 않은 인사 발령이었던 것이다.

‘그땐 진짜 한숨이 절로 나왔었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때의 인사발령은, 김진수에게 커다란 선물을 안겨주었다.

패러필드는 사내에서 기대하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설 정도로 성공했으며, 그 중심에는 그가 있었으니까.

물론 와해되었던 기획실을 다시 휘어잡고 정비한 것은 김진수의 능력이 맞다.

하지만 패러필드가 완공된 뒤 이만한 대중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솔직히 운적인 요소가 아주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세계적인 건축가 브루노의 건축디자인이 역대급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멋지게 뽑혀 나온 것과.

가장 핵심적인 공간인 메인 로비에 들어간 파빌리온의 디자인이, 세계적인 화제성을 가질 정도로 아름답게 어우러졌다는 것.

이것은 김진수의 능력으로 컨트롤 가능한 영역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그 젊은 대표님이 이렇게까지 화제의 인물이 될 줄은 몰랐지.’

이 모든 상황의 일등공신이나 다름없는 한 남자를 떠올린 김진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오늘 그는 패러필드가 완공된 이후, 처음으로 아내와 함께 쇼핑을 하러 나와 있었다.

“여기 진짜 너무 좋다, 오빠.”

유명 브랜드 매장에서 옷을 한 벌 산 아내가, 기분 좋게 웃으며 팔짱을 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진수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아내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브랜드도 진짜 다양하게 입점 돼 있고, 식당가도 괜찮은 프랜차이즈들 깔끔하게 잘 들어와 있고……. 다음엔 우리 지율이 데려와도 좋겠어.”

올해 다섯 살 난 아들을 떠올린 진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내의 이야기에, 그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외관만 멋있게 뽑힌 게 아니고, 내부 구조도 진짜 효율적으로 잘 갖춰졌어. 애들 데려와서 시간 보내기도 좋고…….’

진수는 이 패러필드 왕십리점 기획을 직접 컨트롤한 실무자였지만, 건축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었다.

그래서 패러필드를 돌아다니면서 느껴지는 편리함과 안락함. 그리고 공간 자체에서 느껴지는 호감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다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기획단계에서 세팅하고 기대했던 결과물보다, 훨씬 더 이상적인 공간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왕십리 패러필드는, 예쁜 것들은 보통 불편하다(?)는 그의 평소 생각을 완전히 깨부수는 디자인이었다.

“우리 회사에서 이번에 진짜 신경 많이 쓰기는 했거든.”

“오빠, 보람 있겠다.”

“그치. 여기 잘 돼서, 나도 이렇게 잘 풀린 것 아냐.”

“히히. 그래서, 오빠 올해 또 승진 확정된 거야?”

“그건 아직 몰라. 요즘 회사 분위기는 최곤데, 아무래도 작년에 승진하고 올해 또 승진하는 건 쉽지 않으니까.”

“아쉽네.”

“그래도 아마 보너스는 두둑하게 나올걸?”

“오……. 진짜?”

“아마도……?”

아내와 기분 좋은 대화를 하며 쇼핑을 하던 진수는, 적당히 쇼핑을 마친 뒤 최하층 로비로 향했다.

에어컨이 빵빵한 복합몰이라고는 해도 오래 돌아다녔더니 슬슬 지치고 배가 고팠는데, 최하층에는 식당가부터 시작해서 쉴 수 있는 공간들이 많이 마련되어 있었으니까.

“여기 엘리베이터 타자.”

“좋아.”

두 사람은 뻥 뚫린 로비 중정으로 가서, 측면에 마련된 투명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투명한 엘리베이터의 벽을 통해 로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고, 두리번거리던 아내가 어딘가를 가리키며 탄성을 터뜨렸다.

“우와, 자기야. 저거 뭐야?”

“응?”

“저기 커다란 조형물 있잖아. 와……! 대박이다!”

아내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린 진수는, 순간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감탄한 이유를,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 그래, 맞아. 저게 여기에 있었지.’

이 모든 공간기획에 참여한 김진수는, 당연히 아내가 가리킨 조형물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좀 전에 진수가 떠올렸던, 이 패러필드 흥행의 일등공신이자 요즘 가장 핫한 건축디자이너 서우진.

그의 작품인 파빌리온.

그는 WJ 스튜디오와의 미팅 때 이미 파빌리온의 랜더링 컷을 여러 번 보았고, 때문에 이 작품이 어떤 형태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실물을 처음 보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와…….”

진수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분명 이미지로, 준공 사진으로 봤던 그 조형물이었건만, 실제로 눈앞에서 보니 느낌 자체가 차원이 달랐다.

크기의 차이에서 오는 압도적인 스케일감은 차치하고서라도, 중앙 홀을 휘감으며 쏟아져 내리는 빛줄기의 향연이 마치 3미터짜리 거대한 샹들리에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커다란 빛의 덩어리를, 솜씨 좋은 보석 세공사가 한 땀 한 땀 조각해 놓은 느낌이랄까.

감탄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아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 자기가 기획한 작품 아니었어?”

“그, 그렇기는 한데…….”

“무튼, 이건 대체 뭐야? 해외 미술작가 작품 같은 거야?”

아내의 질문에 진수는, 자신이 아는 히스토리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던 아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 서우진이라는 사람. 혹시 <우리 집에 왜 왔니> 나왔던 그 서우진이야?”

“어? 자기 알아?”

“알지! 나 그 프로 완전 팬이었는데!”

“안다니까 설명이 편하네. 아무튼 그 사람이 디자인한 파빌리온이야. 해외 매거진에도 실리고 요즘 핫하더라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에도, 두 사람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파빌리온을 감상하였다.

파빌리온은 위에서 내려다볼 때도 멋있었지만, 바로 앞에서 올려다보는 웅장한 느낌이 가장 멋지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것을 감상하는 동안, 진수는 문득 미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런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던 사람한테……. 잠깐이나마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했던 게 미안해지네.’

진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1년 전 우진과의 미팅 날이었다.

처음 우진이 카페 프레스코의 입점을 무기로, 파빌리온 설계권을 달라는 딜(Deal)을 이야기했던 미팅 날.

그때 진수는 우진을, ‘카페 프레스코’라는 무기를 가지고 크게 한탕 땡겨 먹으려는 기회주의자가 아닌지 의심했었고.

우진은 그런 그의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백지수표를 제안했었다.

디자인 피(Fee)에 대한, 완전한 백지수표를 말이다.

[백지수표라는 말씀은……. 디자인 값을 저희가 원하는 대로 책정하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저희는 원가에 대한 부분만 깔끔하게 영수증으로 남겨서 따로 청구하겠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만 확실하게 챙겨 주시면……. 디자인 피는 패러마운트에서 얼마를 책정하든 그대로 수용하겠습니다.]

그때는 대체 뭘 믿고 이런 제안을 하나 싶었는데, 이제는 명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거의 확신에 찬 자신감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잔금 날인가?’

패러필드는 완공되어 오픈까지 한 상태였고, 때문에 공사대금부터 설계비까지는 이미 완전히 다 지급된 시점이었다.

하지만 파빌리온에 대한 계약은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저 백지수표 계약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일반적이지 않은 계약 방식이다 보니, 얼마를 책정해 줘야 할지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던 것이다.

‘그 계약 건은 그럼 어떻게 결정된 거지?’

김진수는 이번 프로젝트를 총괄했지만, 그래도 기획실장이지 재무담당은 아니다.

그래서 백지수표에 대한 계약대금을 꽤 괜찮게 책정해주기로 했다는 이야기 정도만 들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자기야, 나 발 아파.”

“어, 그래. 카페에서 잠깐 쉴까?”

“좋아. 저기 카페 프레스코 있던데, 거기로 가자.”

“알겠어.”

때문에 그는, 아내와 함께 걸으면서 생각했다.

‘내일 출근하면, 한번 재무팀에 물어봐야겠어.’

자신이 진행시켰던 이 백지수표라는 특이한 계약 건이, 내부적으로 정확히 얼마로 책정됐는지.

그리고 그 액수가 얼마가 됐던, 자신이 힘을 써서 그보다 좀 더 올려줄 수는 없을지.

“와, 역시 카페 프레스코. 사람 진짜 많다. 대박.”

“저쪽에 자리 있긴 하네.”

“어디? 오……! 내가 먼저 가서 자리 맡아 놓을게. 자기가 알아서 주문해줘.”

“알겠어.”

솔직히 이 파빌리온의 가치가 얼마나 될지, 비전문가인 김진수로서는 감조차 잡기 힘들다.

다만 우진에게 진 마음의 빚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갚아주고 싶을 뿐이었다.

‘뭐, 내가 힘 좀 썼다고 따로 생색낼 건 아니지만……. 서 대표님 덕을 많이 보기는 했으니까.’

사람 사는 것이 그렇다.

본래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그렇게 생각한 진수는, 더욱 마음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 * *

우진은 놀랐다.

아니, 표정 관리가 힘들 정도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음……. 이 정산서. 그러니까…… 이대로 확정 된 거죠?”

오늘 우진은 패러마운트 사와 마지막 미팅을 하고 있었다.

그가 왕십리에 제작한 파빌리온에 대한 대금을 최종적으로 정산받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오늘 WJ 스튜디오에는 패러마운트 재무팀장이 방문해 있었고, 우진은 그와 함께 정산금에 대한 최종 조율을 하는 중이었다.

일반적인 계약이었다면 이럴 필요조차 없다.

도급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대로, 그냥 시행사에서 공금을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백지수표’라는 특이한 계약조건 때문에, 이렇게 재무팀장이 직접 우진을 찾아온 것이었다.

“네, 대표님. 혹시 계약서에 문제라도…….”

계약서에는 당연히 문제가 없었다.

패러마운트라는 대기업에서, 이런 중요한 계약 문서에 실수를 할 리 없었으니까.

다만 우진이 당황한 것은, 액수가 예상했던 것의 족히 다섯 배 이상은 될 정도로 거액이었기 때문이었다.

‘0을 하나 실수로 더 붙인 건 아니겠지? 하긴. 그렇게 치면 또 너무 적은 액수고…….’

십억 단위가 훌쩍 넘게 책정된 디자인 피를 다시 한번 확인한 우진이, 재무팀장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 디자인 Fee에 대한 부분이 19억 7천만 원으로 책정된 것. 맞는 거죠?”

그제야 우진이 왜 당황했는지 깨달은 재무팀장이,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맞습니다, 대표님. 설마 저희가 금액에서 실수했을까요.”

그 대답을 들은 우진이, 솔직하게 말했다.

“생각했던 것 보다 좀…… 많아서요. 혹시나 해서 여쭤봤어요.”

이미 연 매출이 백억 대를 훌쩍 넘은 WJ 스튜디오에게, 사실 19억이라는 돈이 어마어마한 수준의 금액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원가가 포함된 전체금액이 아니었고, 그렇다는 말은 세금 떼면 전부 다 남는 돈이라는 말이었으니.

결코 적다고 얘기할 수는 없는 수준의 액수였다.

아마 처음 계약 시점에 우진이 백지수표를 제시하지 않았더라면, 디자인 피로 요구할 수 있었던 금액은 아무리 많아도 1억을 넘지 못했을 테니까.

그래서 우진은 물어본 것이었고, 재무팀장이 빙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대표님께서 작업해주신 작품은, 이제 저희 패러마운트 사의 자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물론입니다. 저야 의뢰를 받고 제작해드린 거니까요.”

재무팀장의 말이 이어졌다.

“처음엔 아니었지만, 이제 대표님께는 브랜드 가치가 생겼습니다.”

“브랜드 가치라면…….”

“저희는 단순히 파빌리온을 의뢰한 게 아니라, 건축가 서우진의 작품을 소장하게 된 거죠.”

“아하.”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한 우진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고, 재무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물건의 가치는 판매자가 책정하지만, 작품의 가치는 그것을 소장하는 사람이 결정하는 법입니다.”

재무팀장이 기분 좋은 목소리로 한 마디 덧붙였다.

“저희는 저희가 갖게 된 작품의 가치가, 이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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