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시민들이 원하는 한강
우진이 처음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우리 집에 왜 왔니>가 방영을 시작했을 때였다.
인터넷에 우진에 대한 기사가 가장 많이 떴을 때도, 처음 우진이 TV프로에 출연했던 그 무렵.
물론 그 뒤로도 우진은 점점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었고 더 인지도 있는 디자이너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업계의 인지도일 뿐, 대중의 인지도는 아니었다.
건축 디자이너로서의 유명세는 사실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면, 크게 와 닿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한동안 우진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희석됐었고, 우진의 이름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EAC가 이슈화됐을 때였다.
EAC 또한 건축‧디자인 분야의 이슈기는 했지만, 여기에는 ‘국위선양’이라는 프레임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디자이너가 아닌 일반인에게도 꽤 어필이 됐던 이슈였던 것이다.
그리고 5월이 끝나가는 지금.
우진과 관련된 기사는 과거 <우리 집에 왜 왔니>의 방영 때보다도 몇 배 이상 크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정확히는 EAC때 슬슬 지펴지기 시작했던 불씨 위에, 기름을 부어 올린 형국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세계적인 건축가, 브루노 산체스. 그가 극찬한 한국의 20대 건축가는 누구?]
[한국의 20대 건축가, 세계를 놀라게 하다.]
[한국의 건축 디자이너 서우진. 디지털 건축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다.]
[건축가 서우진, EAC 거품 논란을 잠재워.]
EAC의 기사가 한국에 뜬 것은, 이제 6개월 정도가 되어 가는 일이었다.
그때 일차적으로 우진의 디자인 능력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대중에 퍼졌는데.
당시에는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더 많았었다.
20대 학부생 신분의 건축 디자이너가 세계적인 건축디자인 컨퍼런스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비현실적이었던 데다, SPDC에서 대상을 수상한 요양원을 제외하면 우진은 포트폴리오 하나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워낙 부풀려진 기사를 많이 접했던 사람들은 이 또한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 사람은,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것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네요, 형.”
“그렇지. 이번에는 실물이 있으니까.”
“대표님 덕에 저희는 더 바빠지겠습니다.”
“좋은 거지 뭐.”
서울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유동인구가 많은 왕십리 민자 역사.
이곳에 복합 몰로 개장한 왕십리 패러필드.
그곳의 메인 로비에 세워진 우진의 파빌리온은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그 자리에 세워두었으며.
공간이나 건축디자인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들은 찾아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이 아름다운 공간, 그리고 파빌리온이.
대체 어떤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말이다.
“사업부에서 아까 들었는데, 하루에만 메일이 다섯 통씩 온대.”
“메일이요?”
“응, 메일. 의뢰메일이지.”
“아……!”
“들어보니까, 별의별 의뢰가 다 있더라.”
“예를 들면요?”
“공공기관에서 날아온 메일도 있었고, 기업에서 사옥 설계의뢰도 몇 건 있었고……. 제일 특이했던 건 별장 설계의뢰?”
“재벌 2세라도 되나 봐요?”
“뭐 그런 비슷한 느낌.”
WJ 스튜디오 사무실이 자리한 성수동의 지식산업센터.
커피 한 잔씩 뽑아 들고 옥상에 올라온 석현과 진태가, 시원한 바람을 쐬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거 이제, 영업팀도 필요 없는 거 아니에요?”
석현의 물음에, 진태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의뢰가 많이 들어와도 영업은 해야지.”
“하긴. 영양가 있는 의뢰만 오는 것도 아닐 테고…….”
담배를 태우는 진태의 옆에서, 석현은 커피를 홀짝였다.
진태와 달리 석현은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그래도 종종 그와 함께 옥상에 올라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 석현이었다.
“대표님 오셨으려나?”
“아마도요?”
“그럼 슬슬 내려가야겠다. 난 회의 준비해야 해.”
진태의 이야기에, 석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 마신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밀어 넣었다.
“저도 다시 일해야죠.”
석현은 설계 회의에 딱히 참석하는 멤버가 아니었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치이익-
담뱃불을 재떨이에 눌러 끈 진태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석현도 그 뒤를 따라 걸었다.
“형. 오늘 회의가……. 성수동 전략정비구역 설계 공모 회의죠?”
석현의 물음에 진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
“지금 진행되는 프로젝트 중에는,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네요.”
“당연하지. 이거 하나 따면, 우리 설계팀 일 년 치 일감은 될걸?”
“이건 설계비가 얼마에요?”
“정확하진 않지만, 못해도 백억은 넘지.”
백억이라는 이야기에, 석현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새어 나왔다.
“크……. 이런 일이 메일로 굴러들어오지는 않으니까. 영업팀은 확실히 필요하겠네요.”
“근데 생각해보니까, 이런 굵직한 일은 영업팀이 아니라 대표님이 다 물어 오시는 것 같기도 하고…….”
“그, 그것도 그러네요.”
진태와 석현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계단실로 걸어 내려갔다.
WJ 스튜디오는 옥상에서 두 층만 내려가면 되는 14층이었기에, 엘리베이터를 탈 필요는 없었다.
끼익-
문을 열고 사무실에 들어서자, 분주한 직원들의 모습이 석현의 눈에 들어왔다.
진태와 자리가 반대 방향인 석현은, 사무실을 가로질러 좀 더 걸어 들어가야 했고.
그래서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의 면면을 한 차례 둘러볼 수 있었다.
‘다들 열정적이네.’
이제 만으로 일 년 정도가 되었을 뿐이었지만,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이곳. WJ 스튜디오의 사무실.
석현의 인생에서 이제 WJ 스튜디오는, 더 이상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이자 공간이 되어버렸다.
* * *
최근 한산했던 건축가협회의 사무실에, 모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협회장인 권주열과 임원들.
그리고 협회에 소속되어있는, 건축사무소의 관계자들까지.
오늘 협회를 찾아온 업계 관계자들은, ‘이호 설계사무소’라는 건축 설계사무소의 사람들이었다.
이호 설계사무소의 대표인 김준호는 권주열이 가장 아끼는 학교 후배 중 하나였는데.
현직 S대의 조교수이자, 국내에서는 꽤나 알아주는 건축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소위 말하는 권주열의 ‘라인’ 중에서도, 가장 끈끈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건축가였다.
“준호, 공모전 준비는 잘 돼가는 거 맞지?”
“예, 선배님. 하하, 너무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다.”
“짜식, 능글맞기는……. 앉기나 해, 거기 서서 그러고 있지 말고.”
사실 준호와 주열은, 같이 학교를 다녔던 적조차 없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띠동갑이 훌쩍 넘는 수준이었으니 너무도 당연한 사실.
그럼에도 주열은 많은 후배들 중에서도 준호를 가장 아꼈는데, 여기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준호.”
“예, 선배님.”
“도면은 어디까지 나왔어?”
일단 첫 번째 이유는, 그가 무척이나 빠릿빠릿하다는 점이었으며.
“기본설계 이미 들어갔죠.”
“벌써?”
“빡시게 준비 중입니다. 하하. 선배님께서 이렇게 밀어주시는데, 떨어지기라도 하면 쪽팔리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 이유는 눈치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점이었다.
“너, 인마. 나한테 컨셉 스케치도 아직 안 보여줬잖아?”
“흐흐, 그랬죠.”
“내가 고문인거 몰라? 검수는 받고 넘어가야지.”
“하핫, 선배님. 제가 누굽니까.”
“니가 준호지 누구냐.”
“제가 이미 검수 서류는 작업 싹 다 해놨지 말입니다.”
“뭐?”
“선배님 자리에 서류봉투 올려 뒀습니다. 검토해 주시고, 도장만 찍어서 보내 주시면 됩니다.”
“흐음…….”
“어차피 제 설계가 곧 선배님께 전수 받은 설계 아닙니까.”
“…….”
“선배님 그렇잖아도 바쁘신데, 굳이 귀찮게 해드릴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하하.”
준호의 말에, 주열이 허허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 이 자식은, 진짜 말이나 못 하면…….”
주열은 준호에게 꿀밤이라도 놓으려는 듯한 시늉을 하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주열은 이번 성수 전략정비구역 설계 공모에서, 준호를 밀어주기로 하였다.
이미 준호를 비롯하여 국토부에 있는 후배와 이야기도 다 끝내 놓은 상태였으며.
준호의 설계에 고문으로 이름도 올려놓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오늘 준호와 이호 설계사무소 관계자들을 부른 이유는, 공모에 들어갈 준호의 설계를 검수하기 위함.
어차피 이런 절차 자체가 형식적인 것이었지만, 나중에 다른 말이 나오지 않기 위해서는 엄연히 서류화하여 남겨두어야 했으니까.
그런데 준호는 주열이 해야 할 그 최소한의 작업조차 미리 싹 다 작업하여 사무실로 들고 온 것이었다.
주열의 입장에서는 알아서 그의 수고까지 전부 덜어주는 후배가, 예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오늘 여긴 왜 온 거야?”
“예?”
주열이 자신의 방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저 서류철만 등기로 쐈어도 됐잖아? 내가 도장 찍어서 다시 보내줬을 텐데.”
주열의 말에, 준호가 실실 웃으며 대답하였다.
“에이, 그래도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선배님 존안을 뵙겠습니까.”
준호의 아부에, 주열이 피식 웃으며 핀잔을 줬다.
“존안은 무슨, 얼어 죽을.”
준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선배님께서 사주셨던 고깃집 있지 않습니까?”
“아, 저기 삼청동 쪽?”
“예, 선배님. 오늘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야, 밥은 선배가 사야지. 무슨 소리야?”
“아닙니다. 제가 항상 얻어먹기만 해서, 죄송해서 그렇습니다.”
“죄송하기는…….”
“이번에 이렇게 좋은 기회도 제게 주셨는데, 제가 사게 해주십시오.”
준호의 이야기에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난 주열은, 사무실을 정리하고 그를 따라 자리를 나섰다.
직원들을 시켜 자리를 싹 정리하고 나서는 준호를 보며, 주열은 속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다른 녀석들이, 진짜 준호 반만 닮아도 정말 좋을 텐데 말이지.’
하는 짓 하나하나 예쁘기 그지없는 후배 덕에, 주열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졌다.
이번 일에 준호를 밀어준 것이,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주열이었다.
‘그래. 준호 정도면 내 지원까지 받고 공모 떨어질 일은 없을 테지. 워낙에 실력도 괜찮은 녀석이니까.’
준호의 차에 올라탄 주열은, 최근 들어 가장 좋은 기분이었다.
준호가 대접하겠다는 고깃집도 주열이 가장 좋아하는 단골집 중 하나였으니.
맛있는 저녁 식사까지, 그야말로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기분이 괜찮군.’
하지만 주열의 그 좋았던 기분은, 고깃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대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조수석에 앉아 한참 준호와 대화하던 중.
위이잉-!
갑자기 그의 휴대폰으로 걸려온 전화가, 바로 그 발단이었다.
“전화 받으세요, 선배님.”
“어, 그래. 잠깐만.”
전화의 발신인은, 평소에 그의 비서 역할을 하던 협회의 실장이었고.
“어,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그와의 통화내용은, 주열의 좋았던 기분을 그대로 박살 내기에 충분하다 못해 남았으니 말이었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약속을 못 잡았다고?”
[말씀드린 그대롭니다, 협회장님. 시장님께서 용무가 있으시면 공식적인 절차를 밟으시라고…….]
“야, 그 새끼. 동준이 후배 아니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흐뭇한 표정이던 주열의 얼굴이, 어느새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