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219화 (219/315)

219화

The first penguin

미국 유학 시절.

석중과 석호가 거주했던 도시는,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필라델피아였다.

높이가 1000피트에 육박하는 컴캐스트 센터(Comcast Center)와 같이 호화로운 마천루가 늘어서 있는 화려한 도시.

그와 동시에 반쯤 부서진 건물들에 꾀죄죄한 노상(路上) 주류판매점, 그리고 우범지대와 홈리스들이 공존하는 도시.

과거 미국의 수도이기도 했던 필라델피아는 미국의 변천사가 그대로 담겨있는 도시였고.

석호는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와 명암을 전부 다 가지고 있는 이 도시에 거의 10년 가까이 거주하였다.

그리고 그가 살았던 주택가는, 필라델피아가 가진 빛과 어둠의 경계에 있던 곳이었다.

고급 주택가에 살았던 석중과 달리, 집안의 지원을 받지 못했던 석호가 살았던 곳은 부촌과 빈민가의 경계에 가까웠던 곳.

석호가 일했던 갤러리는 이곳 필라델피아 북부에 세워진 <페른힐 아트 갤러리>였다.

“저는 페른힐 아트 갤러리의 첫 번째 직원이었습니다. 처음 갤러리가 오픈할 때, 큐레이터로 취직했었죠.”

<페른힐 아트 갤러리>는, 필라델피아 출신 건축가인 ‘카일 니슨’의 첫 번째 작품이었다.

브루노처럼 세계적인 건축가는 아직 아니었지만, <페른힐 아트 갤러리>를 설계했던 사십 대 초반부터 빠르게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유망한 건축가.

회백색 벽돌을 쌓아 지은 미니멀(Minimal)한 직육면체 형태의 이 아트 갤러리는, 필라델피아 북부의 오래된 구도심에 예술이라는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원래 이쪽 제르멘타운 인근에는, 페른힐 파크를 제외하면 별다른 랜드마크도 없었습니다. 이 페른힐 아트 갤러리도,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건축이라고 생각했지요.”

석호가 페른힐 아트 갤러리에 취직했던 이유는, 단순히 그를 정식 큐레이터로 일할 수 있게 해줬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어지간한 유명 갤러리들은 이제 갓 학부를 졸업한 동양인을 큐레이터로 써줄려고 하지 않았는데, 신생 갤러리였던 페른힐 아트 갤러리에서는 그를 기꺼이 고용해줬던 것이다.

게다가 석호의 집에서 거리까지 가까운 편이었으니, 이야말로 금상첨화.

물론 석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무기였던 펜실베니아 대학교의 졸업장이 아니었더라면, 이곳 페른힐 아트 갤러리에서도 정식 큐레이터가 되지는 못했을 터였다.

“처음 취직했을 때만 해도 저는, 2년 정도 경력을 쌓은 뒤에 유명 갤러리로 이직할 생각이었습니다.”

“오호, 어째서죠?”

“지역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처음부터 갤러리의 컬렉션은 괜찮은 수준이었지만, 그 또한 매니아들 사이에서 화제성을 만들어낼 수준은 아니었다고 생각했었죠.”

“지역적인 한계라는 게……?”

“그때만 해도 저는, 예술을 있는 자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어쨌든 페른힐 아트 갤러리의 입지는, 낡은 구도심이었으니까요.”

석호의 이런 이야기들은 조금 뜬금없었지만, 나머지 세 사람은 흥미롭게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석중이야 필라델피아 생활을 함께 했었기에 예전 이야기가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고.

디자이너인 우진과 브루노는, 석호의 이야기에서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었으니까.

석호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갤러리가 오픈하고 일 년이 지날 즈음. 이곳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기적이요?”

반사적인 우진의 물음에, 석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술과는 거리가 멀었던 공업 도시에, 조금씩 문화예술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겁니다.”

석호는 그것을, 건축의 기적이라고 설명했다.

페른힐 공원의 풍경과 기묘하게 어우러지는, 세로로 길쭉한 직육면체 형태의 미니멀한 디자인의 갤러리 건물.

이 건물은 필라델피아의 빈민가의 전경에 그대로 녹아들면서도 모던하고 세련된 디자인적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고.

그 건축적인 느낌 자체가 <페른힐 아트 갤러리>의 컬렉션과도 코드가 맞아떨어지면서, 콜렉터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는 것이다.

“제가 처음 책임 큐레이터가 됐을 쯤……. 그러니까 갤러리가 오픈하고 4년 정도가 지났을 쯤에는, 어느새 필라델피아 북부의 명소 중 한 곳이 되어있었죠.”

“갤러리를 말씀하시는 거죠?”

“바로 그렇습니다. 덕분에 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잠시 뜸을 들인 석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갤러리가 가지고 있는 컬렉션들만큼이나, 갤러리 자체의 건축적 가치와 아름다움도 정말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석호의 이야기는 좀 더 이어졌지만, 결국 그 내용 자체는 여기까지였다.

두 건축가의 앞에서 갤러리를 짓고 싶다는 자신의 꿈에 대한 이야기도 당연히 하고 싶었으나.

초면에 그런 이야기까지 꺼내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으니까.

다만 석호는 자신이 건축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두 뛰어난 건축가들과 나눌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오늘 이 자리에 만족할 수 있었다.

“언젠가 그 <페른힐 아트 갤러리>라는 곳에 꼭 가 보고 싶군요.”

브루노의 이야기에, 석호가 기분 좋게 대답했다.

“하하, 멋진 곳입니다. 두 분이시라면 분명 그곳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으실 수 있을 테지요.”

우진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한 마디 더했다.

“저는 갤러리는 물론, 카일 니슨이라는 그 건축가도 한번 만나보고 싶네요. 그런 멋진 건축을 한 사람이라면 분명 배울 점이 많은 분이겠지요.”

석호가 웃으며 말했다.

“저야 친분은 없지만……. 갤러리 관장님께 요청드린다면, 그 건축가분도 연결 가능할 겁니다.”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네 사람은 한 시간 정도 더 대화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 있는 네 사람 모두가 평범한 삶을 살아온 이들이 아니었으니.

각자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꽤 즐거운 대화가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는 아주 길게 이어질 수는 없었다.

케이터링 행사가 끝날 시간도 다 되었거니와, 브루노와 우진도 일정이 있었으니까.

“덕분에 몰랐던 분야에 대한 식견을 넓혔습니다.”

우진의 인사에 석호가 악수를 청하며 답했다.

“저도 뜻밖에 멋진 건축디자이너님을 알게 되어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이어서 석호는 자신의 명함을 꺼내 들며, 우진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

“괜찮으시다면, 조만간 연락 한번 드려도 되겠습니까?”

우진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다음에 석중 형님과 함께 뵙죠.”

“좋습니다.”

명함을 지갑에서 빼어 든 우진은, 석호와 교환하였다.

그리고 우진이 받아 든 명함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 Artpia –]

[Art invest agency]

[Art curator]

[Director Seok-ho Lim]

* * *

석호가 페른힐 아트 갤러리에서 일한 것은 정확히 십 년이었다.

그동안 계속해서 갤러리는 유명해졌고, 그곳에서 열정을 불태운 석호도 점차 실력 있는 큐레이터가 되어갔다.

굳이 브루노와 우진이 있는 자리에서 자랑하지는 않았지만.

칠 년 차 정도가 되었을 때에 석호의 업계 인지도는, ‘필라델피아의 미다스의 손(Midas touch)’ 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을 정도였다.

그가 초기에 컨택하여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었던 신인 작가들이, 전부 다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으니까.

이것은 친한 친구인 석중조차도 제대로 모르는 사실이었는데.

석호가 미국에서 미술품 투자를 위해 따로 세웠던 사업자인 ‘아트피아(Artpia)’는, 따로 운영하는 갤러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추정 자산이 천만 달러에 가까울 정도였다.

괜히 대기업 총수인 석호의 아버지가, 고집을 꺾고 그를 인정해 줬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업계에 인지도를 쌓아가던 석호에게는, 한 가지 꿈이 생겼다.

모국인 한국에 돌아가면, 자신이 그간 수집한 컬렉션들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아트 갤러리를 가져보고 싶다는 꿈 말이다.

그리고 그 꿈의 첫 발짝은, 그 갤러리를 지어줄 건축가를 찾는 것이었다.

브루노‧우진과 헤어져 나와 신사동으로 향하는 길.

석중과 석호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그 브루노라는 건축가를 만난 거였어?”

석중의 물음에, 석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물론 그런 세계적인 건축가가 내 갤러리를 지어주면 좋기야 하겠지만, 내가 원하는 건 조금 다른 맥락이거든.”

석호가 찾고자 하는 건축가는, 단지 세계적으로 뛰어나고 유명한 건축가가 아니었다.

석호는 명성 있는 건축가보다는, 그가 가진 예술적 감성과 그의 콜렉션들을 이해하고, 그에 가장 어울릴 수 있는 갤러리를 디자인해줄 수 있는 건축가를 원했다.

다만 건축에 대한 식견이 부족하다 보니, 세계적인 건축가인 브루노와 대화를 하여 그 식견을 조금이라도 넓혀보고 싶었던 것.

그런데 이러한 목적으로 나왔던 자리에서, 석호는 우진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파빌리온을 우진이 디자인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그의 머릿속이 번뜩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원하는 갤러리는 그의 예술적 감성이 담긴 컬렉션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건축이었는데.

우진의 파빌리온은, 브루노가 디자인한 공간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같은 건축가의 작품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아하. 그러니까 결국 네 말은, 우진이한테 갤러리 디자인을 맡기고 싶다는 거네.”

석중의 말에 석호가 피식 웃었다.

“아직 그렇게 확정적인 수준까지는 아니야.”

“그래?”

“내가 일단 그 친구한테 꽂힌 게 맞기는 하지만, 그래도 좀 더 알아봐야지.”

“우진이 실력을?”

“아니. 실력이야 이미 그 파빌리온 하나로도 증명됐다고 생각해.”

“그럼 뭘 알아보는데?”

“그 친구의 건축적 성향이 내 감성을 담아줄 수 있을지.”

“…….”

이쪽 분야에 문외한에 가까운 우진은 잘 몰랐지만.

만약 석호의 회사인 ‘아트피아’의 갤러리를 우진이 짓게 된다면, 그것은 우진에게 국제적으로 꽤나 내세울 수 있는 포트폴리오가 될 것이었다.

석호가 가진 컬렉션들은 지금 현재로도 이미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진 것들이었고.

앞으로 시간이 좀 더 지난다면, 정말 세계적인 수준까지 성장할 만한 작품들이었으니까.

아트 갤러리의 컬렉션은 곧 그 갤러리의 인지도와 직결되는 부분이었는데, 그 컬렉션과 어우러지는 멋진 건축을 우진이 성공적으로 해낸다면.

건축디자인도 함께 그만한 인지도를 얻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휴우. 아무튼, 필요하면 내가 이어줄 테니까 언제든 말해. 우진이 걔 진짜 괜찮은 녀석이니까.”

“흐흐, 고맙다.”

그리고 친구의 이런 이야기들을 들은 석중은, 그 나름대로 기대하기 시작하였다.

석호는 그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석호보다도 더 기가 막힌(?) 인물인 우진이 그와 인연이 생긴다면, 어떤 결과가 만들어질지 벌써부터 궁금해진 것이다.

오늘의 이 만남이 앞으로 우진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석중은 그것이 너무도 기대되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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