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The first penguin
펭귄은 육지에 산다.
하지만 그들은 먹잇감을 구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바다에 뛰어들어야만 한다.
그들에게 이것은 딜레마다.
바다 속에는 펭귄이 좋아하는 먹잇감들이 풍부하게 있지만, 반대로 범고래나 바다표범 같은 천적들도 득실거리고 있으니까.
펭귄에게 ‘바다’라는 곳은, 먹잇감을 구할 수 있는 장소임과 동시에 죽을지도 모르는 공포의 장소인 것이다.
그래서 펭귄들은 바다에 들어갈 때 머뭇거린다.
“어떤 분야든 마찬가지고, 디자이너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우진은 브루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검증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에 쉽게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보수적인 성향은, 누구든지 당연히 갖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브루노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은 우진뿐만이 아니었다.
국내 수많은 디자인 저널의 기자들부터 잡지사의 에디터들. 그리고 해외에서 나온 취재진들까지.
브루노의 세계적인 명성 탓에, 이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모여 있었으니까.
“그래서 저는 우진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머뭇거리는 무리 안에는, 용감하게 먼저 뛰어드는 한 마리의 펭귄이 있다.
그러면 다른 펭귄들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잇따라 뛰어든다.
더 퍼스트 펭귄.
이것은 ‘선구자’ 혹은 ‘도전자’라는 의미를 가지는 관용어였고, 브루노는 이 말이 우진에게 아주 잘 어울린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물론 우진은, 멋쩍은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과찬이십니다, 브루노. 디지털 건축을 제가 처음 시작한 것도 아니고, 저는 그저 이 새로운 흐름에 좀 더 빠르게 편승한 많은 디자이너분들 중 하나가 되었을 뿐입니다. 퍼스트 펭귄이라기엔, 많이 부족하지요.”
장내는 자유로운 기자회견에 가까운 분위기였고.
취재를 나온 사람들은 인터뷰를 한다고 하기보단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애초에 기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인터뷰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지금 우진과 브루노의 대화는, ‘우진이라는 디자이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한국 기자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던 것.
상큼한 샴페인을 홀짝이며 우진의 말을 듣던 브루노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저는 우진이 ‘디지털 건축’을 했기 때문에 퍼스트 펭귄이라는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닙니다.”
“예……?”
“저는 우진의 히스토리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WJ 스튜디오 라는 스튜디오를 설립하고, 키워 오신 그 과정에 대해 말이지요.”
어리둥절한 우진의 표정을 보며, 브루노가 빙긋 웃었다.
“아마 한국도 그렇겠지만, 세계 어디에도 학부 시절에 우진처럼 도전적으로 꿈을 실행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저는 우진의 그 도전정신과 실행력을, 그 어떤 부분보다도 높이 삽니다.”
“하, 하핫.”
“꿈을 꾸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꿈을 실행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브루노의 칭찬에 우진은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한 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브루노가 칭찬한 부분은, 우진이 가지고 있는 ‘본질’ 안에 있었으니까.
‘디지털 건축에 대한 칭찬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네.’
만약 브루노가 우진의 ‘디지털 건축’ 때문에 그를 퍼스트 펭귄이라 칭했다면, 우진은 기분이 좋기보단 부끄러움이 더 컸을 것이었다.
그가 이렇게 디지털 건축 분야에서 선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우진의 능력보다는 전생의 기억이 더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회귀라는 트리거와 관계없이 과거에도 항상 우진은 도전적이었고 주도적이었다.
다만 회귀 이후의 삶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었을 뿐.
그래서 우진은 낯이 뜨거움과 동시에 브루노의 칭찬이 너무도 고마웠다.
우진은 브루노가 일부러 기자들의 앞에서, 자신에 대한 낯 뜨거운 칭찬들을 아낌없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이 한 마디 한 마디는, 우진을 스타 디자이너로 만들어주는 데 지대한 도움을 줄 게 분명했으니까.
그렇게 질문에 대한 브루노의 대답이 일 단락 되고 나자, 다양한 질문들이 이어서 쏟아져 나왔다.
“브루노, 혹시 다음 프로젝트는 준비 중이신 부분이 있습니까?”
그 질문에 브루노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오……. 저는 이제 좀 쉬고 싶습니다. 사실 글래셜 타워 준공 때도 한동안 쉬려 했었는데……. 이번 프로젝트가 너무 욕심이 나서 좀 무리했던 겁니다. 하하.”
“그럼 이제 스페인으로 돌아가시겠군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질문과 응답은 무척이나 훈훈하고 밝은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고, 당연히 기자들의 질문은 우진에게도 이어졌다.
이렇게 많은 기자들이 모인 이유는 당연히 브루노의 명성 때문이었지만.
그들이 이 자리에서 가장 관심 있는 이슈는 ‘서우진’이라는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와 ‘브루노’라는 세계적인 건축가의 관계였다.
‘세계적인 건축가가 감탄한 한국의 20대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은, 적어도 국내에서는 막대한 트래픽 후킹이 가능한 최고의 문구였다.
“서우진 대표님께선, 이번에 멋진 파빌리온을 디자인하셨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혹시 이번 파빌리온을 디자인하시게 된 계기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야 브루노와의 인연 덕분이지요.”
“인연이라면…….”
“제 디자이너로서의 첫 데뷔는 SPDC에서였습니다. 브루노는 그 해의 심사위원이셨죠.”
“아……!”
“그때의 인연으로, 브루노께서 제게 좋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한 일이지요.”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동안, 우진은 한 가지 사실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의 인터뷰들로 인해, 디자이너 서우진의 인지도가 크게 올라갈 것임을 말이다.
그래서 인터뷰가 생각보다 길어짐에도 불구하고, 우진은 최대한 성실하고 구체적으로 모든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때문에 점심 식사를 겸한 케이터링과 함께 열두 시 정각에 시작됐던 인터뷰는, 거의 두 시가 다 되어서야 끝날 수 있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브루노.”
우진의 감사 인사에, 브루노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별말씀을요. 제가 없는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브루노의 인터뷰는, 인지도 측면에서는 사실상 제게 치팅이나 다름없지요.”
“그럴 리가요. 미래의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성장에, 제가 한 숟갈 얹은 겁니다. 허허허.”
인터뷰가 끝나고 장내가 조금 더 조용해지자, 두 사람은 샴페인을 홀짝이며 사적인 대화들을 더 나누었다.
우진은 브루노가 앞으로 어떤 작품활동을 할지 무척 궁금했으며, 그것은 브루노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브루노와의 이 대화가 끝나면, 우진은 패러필드를 나설 생각이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우진의 역할은 파빌리온에 한정되어 있었으니, 케이터링 행사가 끝난 뒤에까지 굳이 남아있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잠시 후 우진의 귓전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며, 그래서 우진의 계획은 조금 바뀔 수밖에 없었다.
“어엇, 우진아!”
우진을 부른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당연히 석중이었다.
* * *
“엇……! 형님?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나야 친구가 볼 일이 좀 있다고 해서 따라왔는데…….”
우진과 인사를 나눈 석중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진이 이 공사에 참여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지금 정황을 보면 이 준공식에 거의 메인 디자이너로 대접받고 있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건축가 브루노라는 이름 바로 밑에 건축가 서우진이라는 이름이 걸려 있었고, 방금전까지 기자들이 그 둘을 인터뷰하고 있었으며.
친구인 석호의 말에 의하면 무척이나 유명한 건축가라는 브루노가, 우진을 무척이나 친근하게 대하고 있었으니까.
“브루노, 여기는 친한 형님입니다.”
“반갑습니다. 스페인의 건축디자이너 브루노라고 합니다.”
“아, 반갑습니다, 브루노. 여기 우진의 친구이자 카페 프레스코의 CEO인 강석중이라고 합니다.”
“오, 카페 프레스코의 대표님이셨군요.”
“저희 회사를 아시나요?”
“하하. 우진에게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얼마 전 용산에 오픈한 매장을 가 본 적도 있습니다. 커피가 맛있더군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한편 석중이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그와 함께 나타난 석호는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분명 브루노에게 용무가 있었던 사람은 자신이었는데, 얼떨결에 따라온 석중이 먼저 인사를 나누고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 건축에 참여한 디자이너라는 젊은 남자와도 꽤 친분이 있어 보였으니, 이것은 정말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디자인이나 예술 쪽에는 관심도 없던 놈이……. 이런 인맥은 어떻게 생긴 거지?’
당황스러움이 가시고 나자, 그다음에 떠오른 감정은 궁금증과 흥미였다.
석중과 저 젊은 디자이너가 어떤 인연인지도 알고 싶었으며, 그가 이 건축에 얼마나 참여했는지도 궁금했다.
석호의 눈에 이 패러필드라는 공간은 너무도 아름다웠고.
이런 아름다운 공간이 디자인되는 데 크게 기여한 젊은 디자이너라면, 분명히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뛰어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석중 덕에 브루노와 좀 더 편하게 대화할 수 있게 된 것도 의외의 수확이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임석호라고 합니다. 뵙고 싶다고 미리 연락을 드렸었던…….”
“아……! 현장 실장님께서 말씀하셨던 바로 그분이군요. 반갑습니다, 브루노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화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석호는 더욱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석중이 대화에 끼자 자연스레 우진의 이야기들이 먼저 대화의 주제로 떠올랐는데.
그 내용 하나하나가 전부 믿기 힘든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일단 처음 우진의 나이를 들었을 때부터가 놀람의 시작이었으며…….
“여기 우진이는, 아마 올해 스물넷 일거야. 맞지?”
“네, 맞아요, 형님.”
“헉…….”
카페 프레스코의 디자인 브랜딩을 디렉팅한 장본인이자 연매출 100억대 규모의 회사를 키운 CEO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니까 여기 서우진 디자이너님이……. 아니, 대표님께서 카페 프레스코 브랜딩도 디렉팅 하셨다는 거야?”
“그렇다니까. 내가 전에도 말한 적 있을 텐데? 디자인하는 친한 동생 덕을 많이 봤다고.”
“아……!”
한국에 들어와서 처음 카페 프레스코 매장에 가봤을 때, 석호는 진심으로 감탄했었다.
미국에 있을 때만 해도 예술이나 디자인 쪽으로는 완전히 문외한이었던 그의 친구가, 어떻게 디자인적으로 이렇게 멋진 브랜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디자인을 디렉팅 한 사람이 정말 대단한 사람일 것이라고 짐작했었는데, 그가 이렇게 어린 디자이너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카페 프레스코를 누가 디자인했는지 정말 궁금했었는데……. 하하.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다니 정말 기분이 좋군요!”
“제 디자인을 좋게 봐 주시니, 저로서는 감사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놀라운 사실들 중에서도 석호를 가장 당황하게 만든 것은, 바로 마지막에 나온 이야기였다.
“잠깐. 브루노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저 로비에 있는 거대한 파빌리온을 디자인한 디자이너가, 여기 서 대표님이 시라는 건가요?”
“허허, 그렇습니다. 이 파빌리온 덕에 제 공간이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었지요.”
브루노의 이 한 마디는, 석호가 두 눈을 부릅뜨게 만들었던 것이다.
‘방금 봤던 그 파빌리온이……. 이 젊은 디자이너의 작품이라고?’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
석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불현듯 스쳐 갔다.
그가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국내 최고의 아트 갤러리.
그것은 어쩌면 그 갤러리를 디자인해줄 적임자가, 바로 이 남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