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달콤한 열매
석중은 요즘 들어 꽤 자주 왕십리에 들르고 있었다.
해외에 살던 그의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최근에 왕십리로 이사 왔기 때문이다.
그 친한 친구란 유학 시절 석중과 동고동락했던 친구였는데, 둘은 꽤 죽이 잘 맞아서 아직까지도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어이, 석호. 오늘 우리 보기로 한 거 맞지?”
[다섯 시에 보기로 했었잖아. 그 새 까먹은 거냐?]
“아니, 기억하니까 이렇게 전화한 거지 인마.”
[늦지 말고 다섯 시까지 신사동으로 와라. 오늘 유리아 씨 사인받아주기로 한 거 기억하지?]
“알지. 오늘 어차피 리아 씨랑 미팅도 있어.”
[미팅? 무슨 미팅.]
“우리 프레스코 전속모델이시잖냐.”
[아, 맞다. 그랬었지?]
“근데 너 좀 더 일찍 볼 수는 없냐?”
[더 일찍? 왜?]
“내가 세 시부터 시간이 비어서, 놀아 줄 사람이 좀 필요하거든.”
[아씨. 나 바쁜 사람이야 인마.]
“한량 주제에, 비싸게 굴기는.”
[시간 비면 네가 두 시쯤 왕십리로 먼저 오던가.]
“뭐야, 너 집에 있는 거야? 집이면 그냥 가로수길로 바로 튀어나오면 되지, 왜 날 거기로 불러?”
[아니, 왕십리가 전부 내 집이냐?]
“응?”
[오늘 패러필드 오픈하잖아. 개장식 행사 때문에 가봐야 돼.]
“아하.”
석중이 재벌 3세라면, 석호는 재벌 2세였다.
석호의 아버지가 바로, 유통 공룡이라 불리는 기업인 패러마운트 그룹의 회장이었으니까.
하지만 석호는 위로 형이 네 명이나 더 있었기 때문에, 회사 경영권에서 거리가 있는 것은 석중과 비슷한 처지였다.
애초에 석중처럼, 회사를 물려받는 것에 관심이 없기도 했고 말이다.
그나마 석중은 카페 프레스코를 창업하면서 자신만의 회사를 일궈냈지만, 석호는 그런 것도 관심 없었다.
석중이 항상 부르는 석호의 별명은 ‘한량’이었다.
“그럼 나보고 패러필드로 오라는 건가?”
[오랜만에 와서 우리 아버지 얼굴도 보고 가라. 아버지 요즘 너 좋아하셔.]
“뭐? 원래 나 엄청 싫어하셨잖아. 너랑 맨날 놀러 다닌다고.”
[카페 프레스코 때문이지 뭐. 나한테도 자꾸 뭐라도 좀 하라시는 데, 귀찮아 죽겠다니까.]
“크크, 너 패러필드에 코 꿰는 거 아니냐?”
[뭐? 끔찍한 소리 마라. 패러필드는 동호 형님이 경영 아주 잘하고 계신다.]
“동호 형이, 셋째 형님이셨나?”
[맞아.]
친구와 실없는 이야기를 좀 더 나눈 석중은, 곧 전화를 끊고 나갈 채비를 하였다.
두 시까지 패러필드로 가기로 했으니, 시간이 그렇게 넉넉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패러필드라……. 여기 우진이도 참여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석중은 건축에 대해 잘 모른다.
그래서 우진이 파빌리온이니 뭐니 이야기하며 왕십리 패러필드에 대해 언급했던 적이 있지만.
그랬던 적이 있다는 사실 정도만 기억날 뿐, 그 이상은 기억하지 못했다.
“가면 우진이 녀석도 볼 수 있는 건가?”
우진에게 연락을 넣어볼까 했던 석중은, 귀찮은지 스마트폰을 다시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어차피 오늘은 만난다 해도 다른 일정이 있었으니, 미리 연락을 줄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한 층만 내려가면 볼 수 있는 이웃사촌이었으니, 굳이 오늘 볼 이유도 없었고 말이다.
얇은 봄 코트를 가볍게 걸친 석중이 차 키를 들고 집을 나섰다.
* * *
석중은 석호를 항상 한량이라고 부르지만, 그가 정말로 한량처럼 빈둥거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유학 시절 석중이 외식사업과 커피에 빠져있었다면, 석호는 소위 말하는 ‘예술병’에 빠져있던 사람이었으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석호의 꿈은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갤러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석중의 취미가 커피를 연구하는 것이었으면, 석호의 취미는 아트 컬렉팅(Art Collecting)이었다.
석호가 가장 좋아하는 문구는, [예술가의 작품은 그 삶의 꽃이다.] 라는 프랑스 화가의 명언이었다.
“예술만큼 삶에 위안이 되어주는 것도 없지.”
혹자는 재벌 2세이기 때문에 가능한 취미생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석호는 부모님께 받은 돈으로 흥청망청 사고 싶은 미술품을 사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부모님이 반대하던 미술사 전공을 하였고.
때문에 생활비가 거의 끊기다시피 했었으니까.
그는 미국의 유명한 갤러리에서 일을 배우며 열심히 모은 돈으로 유망한 신인 작가의 그림에 투자를 하였고.
그렇게 거의 십 년에 걸쳐 미술품 투자로 돈을 불려, 결국 그 방면에서는 아버지인 패러마운트 회장에게까지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예술을 포기하기 전까지는 한국에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었지만, 결국 석호는 자신의 고집을 지킨 채 올봄에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결국 네가 이 애비를 이겼구나.”
“부자간에 누가 이기고 지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버지.”
“그래. 진실된 열정과 꾸준함만 있다면 어디에든 길은 있는 법인데……. 애비의 시야가 너무 좁았구나.”
그래서 사실 석중에게 너스레를 떤 것도, 반쯤은 엄살이었다.
아버지는 이제 그에게, 가업과 관련된 어떤 부담도 주지 않았으니까.
때문에 오늘 패러필드의 행사에 가는 것도,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 시켜서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가 오늘 패러필드에 가는 이유는, 세계적인 건축가인 브루노를 만나보고 싶어서였다.
‘예술이란 결국……. 어떤 분야든 다 통하게 되어 있는 법이니까.’
왕십리에 사는 석호는, 패러필드의 완공된 모습을 이미 지나다니면서 여러 번 보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적잖이 감탄했었다.
아직 내부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아 외관밖에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건물이 가진 아름다운 조형성을 여지없이 느낄 수 있었으니까.
물론 ‘건축’을 콜렉팅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만, 이런 멋진 건축을 한 예술가라는 인맥은 너무도 탐이 났다.
‘이런 건축물을 디자인한 사람이라면, 그와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집에서 슬슬 걸어 나온 석호는, 약 15분 만에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패러필드의 준공식에는 패러마운트 사의 관계자들부터 시작해서 꽤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지만, 석호는 일부러 조용히 안쪽으로 들어갔다.
괜히 회사 관계자에게 발견되면, 귀찮은 일들만 생길 것이었으니 말이다.
미리 받아둔 VIP 표찰은 가지고 있었으니, 내부로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현장 앞에서 석중을 만난 석호는, 그에게도 VIP 표찰을 하나 건네었다.
“아버지 어디 계신데?”
석중의 물음에, 석호가 웃으며 되물었다.
“너 정말 우리 아버지 만나러 온 거야?”
“인사 한번 드리라며.”
“그냥 한 소리지. 아버지 왔다가 바로 가셨을 거야.”
“아하.”
“잠깐 따라 들어와. 나, 사람 하나만 만나고 바로 나갈 생각이니까.”
사실 석호가 도착한 시점은, 이미 어느 정도 준공식이 진행된 뒤였다.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행사를 피해서, 일부러 조금 늦게 도착했으니까.
그래서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 패러필드의 내부는 한창 케이터링 된 음식들과 음료를 마시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누굴 만나려는 건데?”
“브루노라고, 여기 설계해 주신 스페인 건축가 있어.”
“아, 그래? 약속은 되어 있고?”
“당연하지. 사업부 실장님께 미리 부탁드려 놨거든.”
패러필드 내부는 무척이나 넓었고, 준공식 행사가 진행되는 곳은 최하층 로비였다.
그래서 바삐 걸음을 옮긴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층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잠시 후.
띵-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석호의 걸음이,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
“뭐야. 갑자기 왜 멈춰?”
“자, 잠깐만.”
의아한 표정이 된 석중이, 석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거의 3층 높이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파빌리온이 세워져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석중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오……!”
그는 석호와 달리 예술의 예자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그냥 파빌리온을 발견한 순간 아름답다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것을 넋 놓고 보는 친구를 향해, 석중이 궁금하다는 듯 물어봤다.
“야, 이 조형물이, 네가 만나고 싶은 그 건축가의 작품인 거야?”
파빌리온의 디자인을 다른 사람이 했다고 생각하지 못한 석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하였다.
“아마도…… 그렇겠지?”
“크……! 한량이 갑자기 왜 가업에 관심을 갖나 했네.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더 많았고만?”
옆에서 석중이 이죽거렸지만, 석호는 그것이 들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브루노가 설계한 동선 상.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위치는, 유리천장에서부터 파빌리온을 따라 떨어져 내리는 빛의 흐름의 종착지였고.
이 조형물과 공간의 아름다움을 관찰하기 가장 좋은 위치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석호는 아트 콜렉터답게 이 파빌리온을 보는 순간, 가장 먼저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건축조형물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다니…….’
석호의 눈에 비친 파빌리온은, 어떤 건축조형물이라기보다는 설치미술의 느낌이었다.
멋지게 디자인된 건축 공간 안에, 그대로 녹아들며 어우러지는 설치미술.
그는 이 아름다운 조형성 자체가 놀랍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조형물의 스케일이었다.
이렇게까지 섬세하고 복잡한 조형성을 가진 조형물이, 이런 어마어마한 스케일로 설치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느끼기 힘든 스케일감은 시각적으로 강렬한 효과를 주는 것이 당연했는데, 그런 스케일을 가졌으면서도 투박하지 않고 섬세한 조형성이 담겨있는 이 파빌리온은.
석호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을 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석호는 오늘 만나기로 한 브루노 라는 건축가를, 더욱 만나보고 싶어졌다.
이제까지 브루노를 만나보고 싶다는 감정이 호기심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이제는 그것을 넘어 갈망하게 된 것이다.
‘그 건축가가 작업한 조형물 같은 게 있다면……. 작은 것이라도 꼭 하나 갖고 싶군.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동을, 조금이라도 담아갈 수 있도록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파빌리온을 감상하던 석호는, 곧 아쉬운 표정으로 다시 걸음을 떼었다.
파빌리온이야 앞으로 항상 이 자리에 있을 테니 언제든 다시 볼 수 있었지만.
브루노라는 건축가는 지금 당장 만나지 않으면 언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으니까.
“가자, 석중.”
“다 봤냐?”
“아니, 좀 더 보고 싶은데,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하여 그렇게 두 사람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금세 브루노를 찾을 수 있었다.
이 현장에 백발의 서양인은 브루노 한 사람뿐이었으니, 복잡한 가운데도 쉽게 눈에 띈 것이다.
그런데 브루노를 발견한 바로 그때.
석호의 뒤를 따라 걷고 있던 석중은, 두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바로 옆에서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석중에겐 아주 익숙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