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공백 空白
최근 며칠 사이.
윤치형 교수와 꽤 자주 통화했던 우진은, 해외 산학협력이 아주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브루노의 스튜디오와 관계가 돈독한 마드리드 공과대학의 경우, 바로 이번 학기부터 협력 사업을 진행하자는 이야기가 오고 갈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첫 학기는 벌써 한 달이 넘게 지났고, 여러 가지 서류심사를 감안하면 당장 이번 학기부터 본격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윤치형 교수는 프로세스 적립 겸, 2012년 상반기에는 일단 교환학생 시스템과 연계하여 시험적 운영을 하기로 했었다.
기존에도 K대에서 운영 중이었던 교환학생 시스템을 활용하여, 서로 자원자 한 사람씩만 교환키로 한 것이다.
그래서 우진도 같은 과 학생들 중 한 사람이 스페인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건,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게 소연이 되었을 줄은 생각조차 못 했지만 말이다.
‘하긴. 생각해보면 소연이만큼 적임자도 없긴 한데…….’
소연은 이미 브루노와 일 년 가까이 일을 했고, 자신의 능력을 검증받았다.
브루노와 친분이 있는 마드리드 공과대학에서는 첫 교환학생이자 산학협력 대상 학생을 브루노에게 추천받은 것이 당연했고.
다시 브루노의 입장에서는 소연을 추천하는 게 너무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교환학생으로 넘어가기 딱 좋은 3학년.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었다.
별생각 없이 치킨을 우걱우걱 뜯어 먹는 제이든을 보며, 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교환학생이 확정된다고 해도, 출국은 5월이잖아?”
우진의 물음에, 제이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우진. 하지만 학교를 나올 필요는 없겠지.”
“아……!”
“어차피 소연은 이번 학기부터 마드리드 공과대학의 학점을 적용받을 텐데, 굳이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잖아?”
“생각해보니 그러네.”
“그런데 생각해보니, 어제는 수업 들으러 나오긴 했어.”
“……?”
“어리석은 소연. 대체 왜 나왔던 거지?”
고개를 갸웃한 제이든은 또다시 치킨을 한 조각 집어 들었고.
치킨 바구니는 어느새 반쯤 비어버렸다.
치킨이 전부 사라지기 전에 얼른 한 조각을 집어 든 우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제는 전공 수업이었으니까. 학점 상관없이 공부하러 나왔나 보네.’
소연은 K대 디자인학부의 동기들 중에서도, 정말 열심히 사는 멋진 친구였다.
가끔 우진조차도 감탄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치이익-
치킨이 느끼했는지 콜라 캔을 하나 더 딴 우진은, 그것을 홀짝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처음 소연이 스페인으로 가게 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당황했던 게 사실이었다.
소연은 우진에게, 여러 가지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제이든을 포함해 가장 친한 동기이기도 하면서.
또 어떤 측면으로는 우진과 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성.
그리고 마음속 한 편에, 항상 조금의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사람.
‘내가 며칠 학교에 못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중요한 일이 있으면 전화 한 통 주지.’
콜라를 한 모금 마신 우진은, 주머니 속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소연에게 전화하여, 저녁에 커피라도 한잔하자고 얘기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음…….”
우진은 더욱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워낙 정신없이 바빴던 탓에 몰랐었는데, 정확히 2일 전에 소연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던 것이다.
급 미안해진 우진이, 곧바로 소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수신음이 울린 뒤, 익숙한 소연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들려왔다.
[응, 오빠. 무슨 일이야?]
“아, 아니. 그제 전화했길래. 미안해, 바빠서 확인을 이제 했네.”
소연의 목소리를 들은 우진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활기찼으니 말이다.
[아아. 괜찮아. 오빠 요즘 하루 종일 바쁜 거 뻔히 아는데 뭐.]
하지만 우진의 다음 말이 이어졌을 때.
소연은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 가게 된 것 때문에 전화했던 거지?”
우진이 이 얘기를 그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먼저 들었을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어, 으응. 맞아. 그 얘기 하려고.]
그리고 잠시동안 이어진 침묵.
먼저 다시 입을 연 것은 우진이었다.
“음……. 소연아. 오늘 저녁에 혹시 시간 될까?”
[시간? 오빠가 바쁘지, 나야 뭐……. 어학원만 다녀오면 저녁은 널널해.]
“어학원?”
[오늘부터 단기로 스페인어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거든.]
“아하.”
잠시 오늘 스케줄을 머릿속에 떠올린 우진이,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일곱 시쯤, 성수역 쪽에서 보자.”
[좋아. 저녁 먹는 거야?]
“맥주나 한잔 하던가.”
[좋지!]
우진은 소연과 몇 마디를 더 나눈 뒤 전화를 끊었다.
할 말은 좀 더 많았지만, 저녁에 만나서 나눌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우진의 통화를 듣던 눈치 없는 제이든이, 해맑은 표정으로 물었다.
“오우, 오늘은 저녁도 치맥인 거야 우진? 나도 같이 먹는 거지?”
물론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응, 아니야. 제이든.”
* * *
우진은 눈치가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아주 빠른 편이라고 하는 게 맞았다.
물론 우진의 눈치가 빠른 것은 사업적인 부분과 사회생활의 영역에서 그런 것이었지만.
일적인 부분에서 눈치가 빠른 사람이, 일상이라고 해서 눈치가 느릴 리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진은 알고 있었다.
비록 소연이 본인의 입으로 직접 얘기를 꺼낸 적은 없었어도.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실 이건 눈치의 영역을 떠나서, 모르면 바보인 게 맞았다.
아마 제이든이 우진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몰랐을 리 없는 수준이니까.
“휴우.”
하지만 우진은 지난 이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러한 사실을 외면해 왔다.
하루 24시간이 일과 꿈으로 가득 차 있는 우진에게, 다른 무언가에 신경 쓸 수 있는 여력 같은 것은 없었던 것이다.
우진은 전생에서 남들만큼 연애를 해봤고, 그래서 지금의 자신에게는 연애 같은 것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정성스레 물을 주며 가꿔나가도 아름답게 피어나기 힘든 것이 연애의 감정일진대, 지금의 우진에게는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그것이 물리적인 여유든 감정적인 여유든. 그 어떤 것이든 간에 말이다.
아마 지금 우진이 연애를 한다면, 상대는 빈껍데기와 연애하는 기분이 들 터.
이런 생각을 하던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모든 부분들을 감안하더라도, 우진의 이런 처사는 이기적인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우진은 소연에게, 항상 여지를 남겨놨었으니까.
‘결국 핑계야, 핑계.’
만약 우진에게도 마음이 전혀 없었다면, 정확히 선을 그어놨어야 하는 게 맞았다.
직접적인 의사 표현이 아니더라도, 사실 얼마든지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기에 친구로서 그녀를 잃기 싫었다는 변명도, 사실상 핑계에 불과했다.
부우웅-
외부 미팅을 마친 우진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성수동으로 향했다.
오늘 뭔가 거창할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속을 터놓고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그리고 우진이 성수에 도착했을 때.
“대표님, 오셨어요?”
“……. 뭐야, 그 뜬금없는 컨셉은.”
“신입사원 컨셉.”
“신입사원……?”
오랜만에 꾸미고 나온 소연이, 예쁘게 웃으며 우진을 반겨주었다.
* * *
소연이 우진을 데려간 곳은, 성수동 골목 안의 조용한 양꼬치 맛집이었다.
오랜만에 예쁜 원피스에 한껏 꾸미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소연은 고상한 레스토랑보다는 고기를 선택하였다.
“갑자기 신입사원 컨셉은 뭔데?”
“제이든한테 얘기 들었다며.”
“아, 스페인……?”
“명목상은 교환학생이지만, 산학협력도 같이하는 거야. 사실상.”
“그렇겠지.”
“스페인으로 넘어가면, 브루노의 스튜디오 본사에서 일하게 될 거야. 신입사원이지 뭐.”
“잘됐네.”
“맞아, 나한테는 엄청 좋은 기회지.”
소연의 말을 들은 우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이미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우진의 입장에서야 산학협력과 연계된 해외 유학이 아무런 메리트가 없었지만.
일반적인 학부 3학년 학생의 기준에서 지금 소연에게 온 기회는, 어마어마한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으니 말이다.
절대 값으로 보면 마드리드 공과대학의 건축과가 K대의 공간디자인과보다 더 레벨 높은 학교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국내 대학의 졸업장만 가지는 것보다는 유럽 명문 건축대의 커리어도 함께 쌓는 것이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될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단순한 교환학생도 아니고 브루노의 스튜디오 본사에서 인턴까지 할 수 있는 기회다.
전 세계의 건축디자인 스튜디오 중에서도, 최소 열 손가락 안에는 항상 꼽힐 세계적인 스튜디오.
이 모든 과정을 마치고 학부를 졸업했을 때, 소연은 세계 어디서든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인재가 되어있을 것이었다.
물론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 달콤한 만큼 앞으로 더욱 고된 학업을 감내해야 하겠지만.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스페인행을 결심했을 소연이 아니었다.
“동기들도 다 알아?”
“뭘?”
“네가 이번에 스페인으로 가게 된 거.”
우진의 물음에 소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친한 몇몇 빼고는 몰라.”
“애들, 부러워했겠네.”
“히히. 축하해 주지 뭐.”
양꼬치가 나오자마자 직접 불판 위에 올려 굽기 시작하는 소연을 보며, 우진은 또 한 번 실소를 머금었다.
친구가 부리는 자부심 중에 최고의 자부심은 역시 고기 굽기 자부심.
심지어 소연은 고기를 잘 굽는 편이었다.
한참을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시시덕거리던 두 사람의 목소리는, 맥주를 한 잔, 두 잔 마실수록 점점 잦아들었다.
사실상 오늘의 만남은, 소연이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 단둘이 보는 마지막 만남.
그래서 소연은 우진이 갑자기 둘이서 보자고 한 것이 조금은 불안하기도 했다.
두 사람 관계의 애매한 부분을, 오늘 결정 내려 드는 것은 아닌가 해서 말이다.
이것은 여자로서 직감 같은 것이었는데, 우진이 미안해하던 것과 달리 사실 소연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이 우진과 이성으로서 잘 되는 방향이든, 그렇지 못한 방향이든 말이다.
일단 우진에게 거절당하는 것은 당연히 생각조차 하기 싫은 상황이었고.
반대로 당장 우진과 잘 되는 것도 바라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여전히 우진을 좋아하고 동경하지만, 당장에 결정 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꿈과 사랑이라는 것은, 본래 취사 선택이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다.
소연 또한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오빠가 내 마음을 받아준다 해도, 그 행복함은 오래 갈 수 없을 거야.’
만약 일 년 전의 소연이었더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을지도 모른다.
뒷일은 전부 떠나서 그녀가 동경하는 우진과 잘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지난 시간 동안 감정을 키워오면서, 오히려 소연은 더욱 성숙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진이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소연은 자신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모든 준비가 될 때까지.
혹은 우진에게 충분한 여유가 생길 때까지.
지금의 관계를 유지하며, 그렇게 순수한 동경(憧憬)을 지키고 싶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슬슬 진지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소연은 조심스레 한 마디를 꺼내었다.
“오빠.”
“응?”
“내가 스페인에 몇 년 가 있는다고 해서, 딱히 달라지는 건 없잖아?”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한 우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음……. 게 무슨 말이야?”
그러자 잠시 망설이던 소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여기에 계속 머물던, 스페인에 있던……. 오빠는 여전히 바쁠 거고, 나는 여전히 오빠를 좋아할 거고.”
“……!”
갑자기 훅 들어오는 소연의 말에, 우진은 순간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우진이 당황하던말던, 소연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오해할까 봐 이야기를 더하면, 오빠에게 어떤 약속을 바라지 않아. 내가 무슨 오빠 여자친구도 아니잖아.”
우진은 소연의 눈을 마주보았다.
어쩌면 소연의 입장에서는 씁쓸할 수 있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전혀 어두운 표정이 아니었다.
아니, 반대로 오히려 후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냥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지금처럼, 오빠는 앞만 보고 달려주면 돼. 그렇게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아주면, 그게 내겐 가장 행복한 일일 거야.”
소연에게서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들을 들은 우진은, 잠시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자신을 배려하고 위해주는 진심이 느껴졌으니까.
그래서 우진은 고민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해주는 것이 가장 현명할지.
여기서 어떤 말을 해야 후회가 남지 않을지.
그렇게 두 사람은 말을 멈추고 서로를 마주 보았고, 잠시 동안 침묵이 흘러갔다.
그리고 그 침묵이 끝났을 때, 우진은 이렇게 말했다.
“기다리란 말은 하지 않을게. 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야.”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