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공백 空白
WJ 스튜디오가 처음 창립되었을 때, 가장 먼저 회사의 멤버가 된 사람은 바로 석현이었다.
우진이 초기 WJ 스튜디오를 빠르게 성장시키기 위해 가장 처음 생각한 사업이 바로 건축모형 사업이었고.
그래서 가장 먼저 영입한 사람이 석현이었으니까.
그리고 석현과 거의 비슷한 시점에 세 번째로 영입한 사람이 바로 진태였다.
십 년이 넘는 경력의 베테랑 건설 목공 목수이기에 실무에 빠삭하면서, 다양한 건설사에 근무하여 인맥도 좋고 일머리도 빠른 훌륭한 인재.
게다가 진태는 우진의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라주던 사람이었으니, 사실상 사업 초기에는 대체가 불가능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WJ 스튜디오의 핵심 초창기 멤버였던 두 사람은 각각 2, 3번이라는 사번(Employee number)을 가지고 있었고.
이제 ‘이사’라는 직함을 달고 있었다.
그리고 직급이 높은 만큼, 회사에서 우진 다음으로 바쁜 사람이 바로 그 둘이었다.
오늘도 두 사람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이사님, 이번에 칠성건설에서 새로 발주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동탄 신도시 A-7 블럭이죠?”
“맞습니다.”
“크기는 어느 정도예요?”
“세대수 950세대 정도로 들었습니다.”
“일정은 세달 남은 거죠?”
“네, 이사님.”
“조금 빠듯하긴 하지만……. 한번 해 보죠.”
“그럼 진행하겠습니다!”
석현은 WJ 스튜디오 초창기 때만 하더라도, 자신보다 훨씬 나이 많은 사람들을 부리는 걸 무척 어색해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WJ 스튜디오를 설립할 때만 해도 스물둘이었던 석현은, 사회 초년생이라는 딱지를 붙이기에도 어린 나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난 2년 동안 석현은 우진의 밑에서 아주 다양한 경험을 했다.
WJ 스튜디오라는 회사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반적인 회사에 취직했다면 십수 년 이상 근무해야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이 짧은 시간 안에 아주 강렬히(?) 경험한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석현은 크게 성장하였고, 이제는 더 이상 ‘이사’라는 직함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뛰어난 인재가 되었다.
비단 모형 파트 뿐 아니라 설계나 디자인 파트와 관련된 일들까지도, 능숙하게 결재하고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업무에 익숙해진 석현.
그런데 오늘 석현은, 오랜만에 긴장된 표정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이 년 동안 그가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몇 안 되는 업무 중 하나를, 어쩌다보니 맡게 되었으니까.
“저희…… WJ 스튜디오에 지원하시게 된 동기가 있을까요?”
석현이 오늘 맡게 된 업무는 인사업무였다.
WJ 스튜디오와의 산학협력에 지원한, K대 디자인과 학생들의 면접을 석현이 맡게 됐던 것이다.
지금까지 WJ 스튜디오의 인사업무는 거의 우진의 몫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석현에게 일을 넘긴 것.
[석구!]
[응?]
[오늘, 면접 스무 명 정도 봐야 하거든?]
[뭐? 스무 명이나……? 우리 사람 뽑아?]
[자세한 건 인사팀장님께 듣고, 무튼 그거 네가 좀 대신 해줘라.]
[식구들 뽑는 건 어지간하면 직접 하겠다며.]
[오늘은……. 좀 바빠서…….]
[알겠어. 몇 시 부턴데?]
[오후 세 시.]
[오케이.]
그리고 면접이 시작됐을 때.
석현은 우진이 오늘의 면접을 자신에게 넘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면접자들의 이력서를 쭉 훑어보니,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우진과 같은 과 학생들이었던 것이다.
우진의 동기들이거나 후배들. 심지어는 학번이 더 높은 선배까지도 있었던 것.
‘우진이가 직접 들어왔으면 민망했겠네.’
심지어 지원자들의 열정은, 석현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대단한 수준이었다.
“EAC에서 인정받은 유일한 국내 건축 스튜디오에서 꼭 일해보고 싶었습니다.”
“어, 음……. 유일은 아닐 텐데…….”
“스타트업으로 시작해서 이년 만에 업계 최고까지 성장한 회사의 디자인 프로세스를 꼭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
“업계 최고라……. 으음……. 그렇군요.”
아는 사람이 없는 석현조차 면접을 보는 내내 낯 뜨거워질 정도로 어색했는데, 만약 우진이 면접을 봤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졌을지 알만 했던 것이다.
‘제이든이 지원해서 저기 앉아있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네, 진짜.’
제이든이 서류 탈락(?)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석현은 지원자 중에 영국인이 없다는 사실에 안심하였고.
스무 명 전원의 면접이 끝날 때까지 최대한 성실히 면접관의 역할을 다하였다.
면접이 끝나갈 무렵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까지 한 번 펼쳐졌다.
공간디자인과가 아닌 다른 학과에서 지원을 한 학생 중에, 우진을 꼭 만나보고 싶다는 여학생도 하나 있었던 것이다.
“저 혹시……. 회사에 지금 대표님 계신가요?”
“네? 대표님은 왜요?”
“면접 끝나고 가능하다면 잠깐이라도 만나 뵐 수 있나 싶어서요.”
“아, 계시긴 할 텐데 아마 바쁘실…….”
“잠깐 대표님 사인이라도 받을 수 없을까요?”
“예……?”
“대표님 정말 팬이거든요. 정말 꼭 좀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거의 세 시간가량 진행된 면접 시간동안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면접을 본 석현은, 면접자가 전부 다 돌아간 뒤 녹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면접 자체에 정신력이 많이 소모되기도 했지만, 대체 이들 중에 어떤 방식으로 우열을 가려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던 탓이다.
다들 명문대학교인 K대의 학생들이었던 만큼, 어디 하나 빠지는 사람도 잘 없었던 것.
‘어후, 이거 다시는 안 한다고 해야겠어. 차라리 밤새서 파빌리온 작업을 하고 말지…….’
이번에 WJ 스튜디오에서 뽑아야 할 인턴은 총 둘이었는데, 그 열 배수나 되는 인원의 면접을 보았으니.
누구에게 점수를 줘야 할지 아득할 수준이었다.
‘어차피 최종결정은 인사팀장님이 하시겠지만…….’
고민하던 석현은, 결국 마지막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한 여학생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줬다.
어차피 다른 평가항목들에 줄 수 있는 점수들은 고만고만하였고, 열정(?)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그녀만큼 기억에 남는 지원자가 없었으니 말이다.
[의상디자인학과 11학번 유수영]
그녀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친 석현은, 순간 재밌는 상상이 떠올랐다.
자칭 우진의 팬이라는 그녀가 인턴으로 회사에서 일하게 된다면, 우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진 것이다.
“뭐, 일도 똑 부러지게 잘할 것 같고……. 흐흐, 재밌겠는데?”
우진의 당황하는 표정을 상상한 석현은, 혼자 히죽히죽 웃으며 낄낄거렸다.
* * *
우진은 오랜만에, 제이든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Bloody Hell!”
“무슨 일이야 또?”
“우진은 너무해.”
“뭐가.”
“어떻게 이 제이든 님을 서류심사에서 탈락시킬 수가 있냐는 말이지.”
“서류심사?”
“설마 지금 모른 척을 하려는 거야?”
“아니 진짜 몰라서 그래. 대체 무슨 말이야?”
“후……. 그럼 이건 대체 누구의 음모지?”
“……?”
“자, 이걸 봐, 우진. 지난주 금요일에, 이런 충격적인 문자를 받았다고.”
[Web발신 : WJ 스튜디오와 K대학교의 산학협력에 지원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중략……
[아쉽게도 금년도 1분기 협력사업에는 함께하실 수 없게 되어…….]
……후략……
제이든이 내민 문자를 본 우진은,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를 하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사실 너무 바빠서 잊고 있기는 했었지만, 제이든이 말하는 그 음모(?)라는 것은 우진의 소행이 맞았으니 말이다.
산학협력 관련 공문을 전달해 주면서, 만약 제이든이 지원한다면 서류에서 잘라달라고 인사팀에 부탁한 사람이 바로 우진이었던 것.
‘뜬금없이 또 왜 이러나 했네.’
우진이 제이든을 거부(?)한 이유는 하나였다.
시한 폭탄같은 제이든이 회사에 상시 출근한다는 가정을 떠올려 보니, 정신이 아득해졌던 것이다.
예전이야 옹기종기 모여 과제 하듯 건축모형을 만드는 규모의 회사였으니, 히히덕거리며 일을 해도 별문제가 없었지만.
이제 WJ 스튜디오는 그런 구멍가게(?)가 아니었으니까.
직원들 다 보는 앞에서 “Bloody Hell! 우진!”을 외칠 제이든을 떠올린 순간, 우진의 마음은 그대로 굳어졌던 것이다.
물론 제이든의 디자인 감각과 실력은 누구보다 우진이 가장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이든과 인턴은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제이든이 우진이나 석현과 친분이 없었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제이든의 메일 오발송으로 브루노가 며칠 동안 고생했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어쩌면 우진의 결단에 한 몫 거들었을지도 몰랐다.
표정 관리에 성공한 우진이 담담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거.”
“음……?”
“내가 그런 것 맞아, 제이든.”
“Holy! 어리석은 우진!”
날뛰기 시작하려는 제이든을 재빨리 저지한 우진이, 침착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들어봐, 제이든.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으니까.”
“이유?”
흥분 직전인 제이든을, 우진은 열심히 구워삶기 시작했다.
“생각해봐, 제이든. 제이든은 나보다 모자랄 게 없는 뛰어난 디자이너잖아?”
양옆으로 눈알을 굴리던 제이든이,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지. 역시 우진은 똑똑해.”
1차 수습에 성공한 우진이 비장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만약 네가 우리 회사의 인턴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해봐.”
“흐음.”
“나는 너를 다른 인턴과 차별할 수 없고, 그럼 너는 하루 종일 도면만 그리게 되겠지. 이번에 WJ 스튜디오 인턴 자리에 T.O가 난 부서는 기본설계 부서거든.”
우진의 말을 들은 제이든은 기초제도 수업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진저리치며 외칠 수밖에 없었다.
기초제도는 제이든이 가장 싫어하는 수업이었다.
“Holy!”
그렇게 반쯤 감정이입 된 제이든을 보며, 우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건 국가적인 낭비야. 그렇지 않아 제이든?”
제이든이 격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당연해. 물론 제이든은 도면도 잘 그리고, 분명히 그 일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래도 제이든은 그것보다 다른 걸 좀 더 잘할 수 있으니까.”
우진은 제이든의 풍부한 공감 능력에 감사하며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너를 뽑지 않았어, 제이든.”
완전히 납득한 것은 아닌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고개를 주억거리는 제이든.
“그런 이유라면, 이해해 보도록 할 게 우진.”
그래도 양심에 조금 가책을 느낀 우진은, 오랜만에 제이든에게 밥을 사주기로 하였다.
학교 인근에서 제이든이 가장 좋아하는, 치킨집으로 데려간 것이다.
제이든과 한참을 웃고 떠들며 치킨을 뜯던 우진은, 순간 뭔가 생각났는지 제이든을 향해 물었다.
“그나저나 제이든.”
“응.”
“오늘 소연이는 같이 수업 안 들었어?”
“소연? 소연은 왜?”
“생각해보니까 요 며칠 동안, 학교에서 소연이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아……!”
열심히 닭 다리를 뜯고 있던 제이든은, 그것을 내려놓고 콜라를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우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진, 몰랐구나?”
“뭘?”
그리고 제이든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우진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그저께 UPM에서 연락 왔거든.”
“UPM이라면, 마드리드 공과대학교?”
“맞아, 거기.”
“……?”
제이든이 입안에 들어있던 치킨을 우물거리며, 가볍게 다시 말을 이었다.
“소연은 지난주에 스페인에서 산학협력 심사 통과했거든. 그래서 이번 학기부터 UPM에 교환학생으로 가기로 됐어. 장학금도 받고 갈걸?”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