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211화 (211/315)

211화

개장(開場)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4월 초.

<천년의 그대>는 촬영을 위한 모든 세팅이 끝났고 본격적으로 드라마 제작이 시작되었다.

총 21부작으로 제작계획이 픽스 된 <천년의 그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전제작으로 계획되어 있었고.

드라마가 제작되기 시작하자 강소정 대표가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하였다.

전 KBC의 드라마국장이자 미디트리의 이사인 우민철의 인맥을 통해 편성부터 빠르게 확보했으며…….

“네, 이사님. 미팅 잘 끝나셨나요?”

[물론입니다, 대표님.]

“그럼 편성은……?”

[12월로 일단 가일정 받아 왔습니다. 일정이 좀 촉박할 것 같긴 한데…….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에요. 딱 좋네요, 12월!”

확보된 편성과 배우들의 라인업.

그리고 투자자들의 인프라를 활용해, <천년의 그대>를 흥행시키기 위한 빌드업을 시작한 것이다.

“아, 네. 이사장님. 통화 괜찮으시죠?”

[오, 강 대표. 드디어 준비가 끝난 겁니까?]

“넵!”

[그렇지 않아도 콘진원(콘텐츠 진흥원) 쪽에서 어제 연락이 와서, 해외사업부 쪽에 넘길 자료가 필요하다고 요청해 왔습니다.]

“자료라면, <천년의 그대> 마케팅 자료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습니다.]

“일단 기본적인 마케팅 자료부터 먼저 메일로 드릴게요.”

[‘기본적인’이라는 말씀은……?]

“촬영이 좀 더 진행돼야 괜찮은 그림들이 나올 것 같아서요. 일단 보내드릴 수 있는 부분부터 먼저 보내드리겠다는 얘기죠.”

[아, 좋습니다. 그럼 이후 자료들은, 실무팀에 전달해 주세요.]

“네, 이사장님!”

작년 말부터 여기저기 엮인 사업적 연결고리들 때문에, <천년의 그대> 프로젝트의 덩치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상황이었다.

일단 기본적인 대작 드라마들이 하는 마케팅은 기본적으로 전부 깔고 들어간 데다.

콘텐츠 진흥원과 서울 디자인 재단까지 연결된 국가 차원의 지원과 마케팅이 더해지니.

처음 강소정이 생각했던 프로젝트의 규모보다도, 훨씬 더 크게 판이 깔려버린 것이다.

어떤 분야든 마찬가지지만, 마케팅을 할 때에는 그 규모가 클수록 시너지가 나게 된다.

처음 마케팅을 접했을 때에는 심드렁했던 사람이라도, 자꾸 같은 광고를 보게 되면 조금씩 마음이 동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니까.

게다가 드라마뿐 아니라 국제 리빙페어나 컨텐츠 페어 등, 다양한 방면에서 <천년의 그대>가 노출되게 되는 것이었으니.

이것의 시너지가 얼마나 크게 작용할지는 이제 출발 선상에 선 시점에서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사업가적 머리가 비상한 강소정은,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이 상황이 얼마나 큰 기회인지를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번 드라마, 무조건 성공시켜야 해. 내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기회야.’

그래서 소정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쁨에도 불구하고 에너지가 넘쳤다.

자신이 계획했던 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모든 상황이 굴러가고 있었으니, 물리적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힘이 솟아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바쁜 와중에, 가장 많이 만나게 되는 사람은 바로 우진이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우진이 맡았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세트장 공사야 끝이 났지만, 그 외에도 리빙페어 등, 그와 엮여있는 것이 많았으니까.

게다가 우진은, 지분도 가지고 있는 엄연한 <천년의 그대>의 투자자였다.

“어제 첫 촬영 들어갔어요, 서 대표님.”

퇴근 이후 성수동으로 온 소정은, 우진과 카페에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앉아있는 카페는, 우진과 석중의 집인 <서울숲 클라시아 포레스트>의 단지 상가 안에 있는 칵테일 바였다.

“생각보다 촬영이 빨리 시작됐네요.”

우진의 이야기에, 소정이 웃으며 대답하였다.

“12월에 편성 잡혔으니까요.”

그런데 그 가볍게 꺼내 든 대답에, 우진은 화들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네? 12월이라고요……?”

“왜 그렇게 놀라요?”

“아니, 너무 빠르니까…….”

“일정 나오는 대로 그대로 낚아챈 거죠 뭐. 시간대도 좋아요. 주말 저녁 10시.”

“제작 기간은 충분해요?”

“솔직히 충분하진 않죠. 촬영 스타트가 조금이라도 더 늦었으면, 스케줄 안 나왔을 테니까요. 하지만 가능하니까 걱정 마세요.”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천년의 그대>가 12월에 편성됐다는 이야기에 우진은 조금 놀랐다.

정확하진 않았지만, 천년의 그대는 원래 2013년 하반기에 방영을 시작하는 드라마였는데, 그의 기억보다 방영 일정이 훨씬 더 빨라졌으니 말이다.

물론 리빙페어나 한류 콘텐츠 페어와 시너지를 내기 위해서는 최대한 빠른 일정으로 드라마가 방영되는 것이 좋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빠른 시점으로 당겨질 줄은 몰랐던 것.

‘드라마 흥행에 영향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

작년 연말부터는 바뀐 미래를 보는 것이 새삼스럽지도 않은 우진이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담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뭐, 언제까지 미래지식에 의존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우진의 표정에 옅게 쓴웃음이 떠올랐다.

미래가 이렇게까지 크게 바뀐다는 것은 우진이 그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했으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칵테일을 한 모금 더 마신 우진이, 소정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능력도 좋으십니다. 공중파 편성을 그렇게 뚝딱 따오시고.”

그 말에, 소정이 새초롬한 표정으로 대꾸하였다.

“어마어마한 투자자님들께서 이렇게나 밀어주시는데……. 그 정도는 뚝딱 따 와야죠, 당연히.”

“흐흐, 덕분에 저도 거기 숟가락 잘 얹었습니다.”

우진의 말에, 소정이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숟가락이라뇨.”

“네?”

“제가 말한 어마어마한 투자자님들 중에, 서 대표님도 포함되는데요?”

“에이, 설마요.”

소정이 우진을 종종 만나는 이유는, 사실 단순히 그가 투자자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진은 소정이 지금껏 봐 온 여러 사업가들 중에서도 사업 머리가 가장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이 떠오르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오빠인 석중과 같은 아파트에 사니, 퇴근 후 늦은 시간에 커피한잔 하는 것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100평이 넘는 석중의 집에는, 사실상 소정이 언제든 와서 자고 갈 수 있는 방이 하나 따로 있었으니까.

원래 석중이 게스트 룸으로 꾸며놓은 방이었는데, 그게 사실상 소정의 방이 되어버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 설마가 맞습니다.”

“어마어마하다고 하기엔, 제 지분은, 고작 3퍼센트 뿐인데요?”

“지분 크기가 중요한가요.”

“당연하죠.”

“음, 그렇긴 하네요. 프흐흐.”

기분 좋게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칵테일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그리고 우진을 힐끔 쳐다본 소정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진짜 신기한 사람이라니까.’

겉보기에는 영락없는 20대로 보이는 우진이었지만, 그와 일을 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한 번도 20대라는 생각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사실 우진이 20대라는 사실이야말로, 소정이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일 중 가장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여기 칵테일 맛있네요.”

“그렇죠?”

“나도 성수로 이사 올까.”

“지금도 여기 주민 같으신데요?”

“프흐흐. 하긴, 제가 오빠 집에서 좀 자주 묵기는 하죠.”

오랜만에 사업적 목적 없이 사적으로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업 얘기를 위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

잠시 말없이 달달한 칵테일을 홀짝이던 소정이, 우진을 슬쩍 응시하였다.

그런데 우진은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고, 궁금해진 소정이 다시 그를 향해 물었다.

“무슨 생각 해요?”

소정이 의아한 목소리로 묻자, 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꾸하였다.

“아, 아닙니다. 드라마 일정이 예상보다 빨라지니, 생각할 게 좀 생겨서요.”

“생각이라면…….”

딱히 어떤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우진은 능숙하게 이야기를 돌렸다.

“드라마 방영 시작하면 저도 바쁘게 뛰기 시작해야 하니까요.”

순간적으로 우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소정이,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하였다.

“네?”

드라마 방영이 시작되는 것과 우진이 바빠지는 것 사이에서, 연결점을 찾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진의 다음 말이 이어지자, 소정은 두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발맞춰서 세트장 오픈해야 할 것 아닙니까.”

“아……?!”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죠.”

<천년의 그대>는 사전제작 드라마였고, 때문에 방영 시점에 세트장에서 촬영할 일은 없다고 봐도 된다.

우진은 드라마 방영 시점에 이곳을 관광지로 홍보하여, 드라마의 인기를 그대로 흡수해 먹을 생각이었다.

여기에는 이미 구체적인 계획까지 전부 다 서있었다.

‘생각만 해도 신나네. 계획대로만 되면, 갈퀴로 돈을 쓸어 담을 수 있겠지.’

드라마 세트장에 입장료를 크게 받을 생각은 아니었다.

관광객 수가 많아진다면 그 수입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우진의 목적은 세트장 입장료로 인한 직접 수익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저 최근에, 세트장 인근 부지 싹 다 매입한 거 아세요?”

“어……? 거기 부지를요?”

“그 인근을 <천년의 그대> 테마 관광지로 싹 다 꾸며 볼 생각이거든요.”

“네에……?”

우진의 계획은 이랬다.

천년의 그대가 방영 시작되기 전에 미리 최대한 싼값에 부지들을 충분히 확보해 두고.

본격적으로 드라마가 방영되어 흥행몰이를 시작하면, 이천시 쪽에 딜을 시도한다.

국제 리빙페어와 한류 콘텐츠 페어라는 래퍼런스도 미리 준비되어 있으니.

이 세트장의 관광 상품성을 어필하여 인근을 관광특구로 만들어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세트장 인근이 전부 관광특구로 지정되면, 지자체에서 개발을 위한 지원도 아낌없이 나온다.

<천년의 그대>가 방영될 세 달에 걸쳐 최대한 화제성을 펌핑하고.

그것으로 관광특구 지정까지 성공한다면.

매입한 땅의 부지 값이 천청 부지로 치솟는 것은 물론, 시장 활성화로 인한 관광수익 또한 어마어마한 수준이 될 게 분명했다.

<천년의 그대>는 단순히 국내 시장에서만 성공할 드라마가 아닌, 전 세계적으로 역대급 흥행을 하게 될 드라마였으니까.

우진의 개략적인 이야기를 들은 소정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연신 감탄만 터뜨렸다..

“와……. 세트장 소유권을 가져가신다는 얘길 할 때부터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흐흐. 이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닙니까?”

“이게 어떻게 당연해요. 처음 저랑 협상하던 날부터 여기까지 순간적으로 떠올리신 거잖아요?”

“뭐, 어느 정도는요.”

“진짜 대표님 만날 때마다 하는 생각이지만,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다니까요.”

“그거 칭찬이죠?”

“그럼요.”

“하하.”

우진의 사업 이야기를 들은 소정의 두 눈이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이 치밀한 플랜을 들었다고 해서, 우진에게 세트장 소유권을 넘긴 것이 아깝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런 계획이 세워질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우진이 세트장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소정은 사업가답게, 자신이 여기서 가져갈 수 있는 또 하나의 부분을 곧바로 머릿속에 떠올린 것일 뿐이었다.

“내일 출근하면, 굿즈나 관광상품 쪽으로도 사업회의를 열어봐야겠네요.”

“그거, 저 들으라고 하시는 소리죠?”

소정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땅이야 다 서 대표님 땅이겠지만, 설마 거기에 서 대표님이 전부 매장을 올릴 생각은 아니잖아요?”

“그야 당연합니다.”

“제일 좋은 자리들은, 저희 쪽에 먼저 분양해 줘야 되는 거 알죠?”

우진이 기분 좋게 웃었다.

“물론입니다.”

쨍-!

우진과 잔을 다시 부딪친 소정은, 절반 조금 안 되게 남아있던 칵테일을 그대로 들이켰다.

도수가 그리 높은 칵테일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취기가 올랐는지 소정의 양 볼이 살짝 발그레졌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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