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개장(開場)
<천년의 그대>의 여주인공 인서는, 천 년전 동방제국의 신녀였다.
달의 신을 모시는 신녀이자, 인세(人世)의 ‘밤’을 주관하는 신녀.
신녀는 신격을 타고난 존재였지만, 그와 동시에 인격을 가진 존재이기도 했다.
인간과 신의 피가 절반씩 섞인 반신(半神)의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신녀는 수명이 무한한 신들과 다르게, 대를 잇고 후손을 만들어야 했다.
신격을 지녔지만 평범한 인간들처럼 인세에 머물며 결혼을 하고, 자신의 딸에게 다시 자신의 운명을 대물림 해줘야 하는 존재.
‘인서’는 그러한 운명을 타고난 신녀였고, 그래서 스물이 되기 전까지는 여느 신녀들처럼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랬던 그녀의 운명이 달라진 것은, 남자 주인공 ‘서후’를 만나게 됐을 때였다.
“대본을 이미 보셨을 테니 아시겠지만, 서후는 천신궁의 순혈입니다. 그러니까 인서와 다르게 완전한 신격을 가진 존재였지요.”
원래대로라면 서후와 인서가 만날 일은 없었다.
서후는 천계에 사는 신들 중 한 명이었고, 인서는 인세에서 신을 모시는 신녀의 운명을 타고난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천년에 한 번.
천신궁의 북쪽에 있는 ‘천신탑’에 인간계로 통하는 길이 열리게 되는데, 이때 서후는 인간계로 내려오게 되었다.
하계에 대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인간계에 내려온 것이다.
“인간계에 내려온 서후는 운명처럼 인서를 만나게 됐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죠.”
“말하자면, 금단의 사랑인 거잖아요?”
“그렇죠. 신녀는 인간과 혼인해야만 하는 존재니까요.”
둘은 서로의 정체를 오해한 채 사랑에 빠졌다.
서후는 인서가 평범한 여인이라 생각했으며, 반대로 인서 또한 서후가 평범한 남자라고 생각했으니까.
천계의 신인 서후는 인간과 정을 통하는 순간 신격을 잃게 되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 또한 하나의 평범한 인간이 되어 인서와 사랑을 나누고, 그렇게 소멸한다면.
그것으로 서후는 아무런 미련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인서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사랑을 나눈 두 사람은 천신의 진노를 받게 되었고.
그에 대한 형벌로 천 년 동안 기억을 잃는 벌을 받게 된 것이다.
신격을 가진 서후는 천년 뒤에 기억을 찾게 되겠지만.
인간과 같은 유한한 수명을 가진 인서의 머릿속에서는, 사실상 서후에 대한 기억이 지워지는 잔인한 형벌.
그렇게 인서는 서후에 대한 기억을 잃은 채 소천(召天)하였고, 서후는 천 년 동안 기억을 잃은 채 인간계에서 살게 되었다.
그리고 천년이 지났다.
“작중에서 천신탑은, 인간계에도 존재하고 천계에도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세계관 상에서 인세와 천계에 동시에 존재하는 유일한 장소인 거네요.”
배우 성하영의 물음에, 피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런 셈이죠.”
“그럼 여기가 처음 인간계에 내려온 서후와 인서가 만나게 되는 장소이면서……. 천년 뒤에 환생한 인서를 서후가 다시 만나게 되는 장소이기도 한 건가요?”
유피디가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장소는 맞지만, 환생한 인서를 처음 만나는 장소는 아닙니다.”
“그럼……?”
“이 부분은 아직 대본이 픽스되지 않았을 텐데…….”
잠시 뜸을 들인 피디가 설명을 이었다.
“서후가 다시 천신궁으로 돌아가기 직전, 인서가 기억을 찾는 장면이 있거든요.”
“아……!”
“사실상 드라마의 클라이막스나 다름없는 장면인데, 그 부분이 여기서 촬영될 겁니다.”
피디의 설명을 듣던 성하영이, 천신탑 세트장을 꼼꼼히 살피며 감탄하였다.
처음 개략적인 스토리의 얼개를 들었을 때에는, 사실 조금 진부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이뤄질 수 없는 금단의 사랑’이라는 클리셰 자체가, 단물이 빠지다 못해 사골로 우려내도 국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만큼 오래된 설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인물의 설정값과 디테일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듣기 시작하자, 그 진부함 속에 생동감이 가득 들어찼다.
생동감이 생기자 진부한 클리셰조차 더 이상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고, 그것은 반대로 장점이 되었다.
진부하게 느껴지던 모든 부분들이 익숙함으로 다가오면서, 오히려 몰입에 도움을 준 것이다.
그것이 바로 뒤늦게 하영이 이 드라마에 합류하게 됐던 이유였다.
뻔한 클리셰라는 주변의 평가 때문에 여전히 불안함이 남아있긴 했지만, 스토리 라인이 너무 마음에 들었으니까.
“이렇게 실제로 촬영장에서 설명을 들으니, 더 생동감이 넘치네요, 피디님.”
“하하. 그렇지요? 사실 완성된 세트장은 저희 제작진도 오늘 처음 와보는 건데……. 솔직히 저희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요?”
“서우진 대표님이 신경 많이 써주신다고는 했는데, 이렇게까지 퀄리티가 뽑힐 줄은 몰랐거든요.”
그런데 오늘 완성된 세트장에 와서 대본 속의 장소를 만난 순간.
하영은 남아있던 그 불안감마저 싹 다 날려버릴 수 있었다.
세트장의 신비로운 분위기와 웅장하고 아름다운 공간감.
그 안에 숨어있는 디테일들과 자칫하면 유치하게 만들어질 수 있는 부분들을 그럴싸하게 살려놓은 설정상의 소품들까지.
‘세트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드라마에 얼마나 큰 공이 들어갔는지가 느껴지네.’
대본을 보며 상상만 했던 장소들은 상상 이상으로 아름답고 멋지게 구현되어 있었으며.
단지 그 장소에 발을 디딘 것만으로 하영은 ‘인서’가 된 것 같았다.
그녀는 이제껏 수많은 작품들을 찍었고 그중에는 블록버스터급 드라마도 여럿 있었지만.
개중에 이렇게 특별한 느낌을 받았던 세트장은 단연코 한 곳도 없었던 것이다.
‘오늘, 오길 정말 잘했어.’
그래서 하영은, 이런 기가 막힌 세트장을 디자인한 사람이 문득 궁금해졌다.
최근 유명세를 타고 있는 건축가 서우진의 작품이라는 것을 듣기는 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사실 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궁금증은, 곧 풀릴 수 있었다.
‘천신탑’의 입구에서부터 이어진 나선형의 계단으로, 두 남녀가 천천히 걸어 올라오고 있었으니까.
* * *
이 천신궁의 세트장을 디자인하고 설계하면서, 우진이 가장 고심하고 애를 먹었던 부분은 바로 전통건축의 현대적인 재해석이었다.
드라마의 설정상 천신궁은, ‘전통의 느낌이 나는 건축물이면서도 천년이 지난 시점에도 세련된 공간’ 이었는데.
이게 사실 말이야 쉽지, 실제 이런 느낌이 들 만한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것은 난해하기 그지없는 문제였으니 말이다.
심지어 이 측면에 있어서만큼은, 드라마를 봤던 전생의 기억조차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흥행몰이를 했던 <천년의 그대>가 가장 많이 까였던 부분이 바로 이 건축디자인에 대한 부분이었고.
우진 또한 그 세트장에 실망하여 절대로 그렇게 디자인하지는 않아야겠다고 다짐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래서 이 설정을 재해석하여 실제 건축물로 뽑아내는 과정은 오롯이 우진에게 달려있었다.
지금 이천에 지어진 이 세트장이, 전적으로 우진의 디자인적 역량 안에서 탄생한 작품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오늘 이 자리에 나온 모든 관계자들 전부를 감탄시키고 있었다.
특히나 <천년의 그대>라는 드라마의 제작과정 전반을 총괄하며, 드라마에 대한 이해도가 가장 높은 유인건 피디는, 그들 중에도 가장 격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은 건지.
우진과 이제 두 번째 만나는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속사포처럼 질문세례를 퍼붓는 유 피디였다.
“대표님.”
“예, 피디님.”
“대체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하신 겁니까?”
유 피디의 질문에, 우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반문하였다.
“네……?”
“저기 보시면 처마가……. 아니, 일단 처마는 맞죠?”
“일단 그렇다 치죠.”
“어쨌든 저 처마 아래 받쳐있는 서까래를 보면, 금속 철골로 만들어져 있잖습니까.”
“그렇죠.”
“보통 전통건축이라 하면 나무골조에 청기와부터 떠오르는데, 완전히 상반된 소재를 쓰셨으면서도 전통건축의 느낌이 나니까 신기한 거죠.”
솔직히 유인건은, 대본에 묘사되어있는 느낌의 공간이 디자인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건축디자인에 문외한인 그가 생각하기에도, 답이 없는 요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단지 전통적인 느낌을 가진 세트장을 퀄리티있게 완성해주는 정도를 우진에게 기대했을 뿐.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세트장은 유인건이 어렴풋이 상상했던 그 느낌 이상을 표현해내고 있었고.
그것은 보면 볼수록 신기한 수준이었다.
“솔직히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머리를 쥐어짜다 보니, 어떻게든 방법이 나오더라고요.”
우진은 이 디자인을 뽑아내기까지, 수많은 상상과 시도를 하였다.
처음에는 전통의 소재와 문양을 마감재로 현대적인 건축구조를 만들어 보기도 하였으며.
최근 우진이 연구하고 있는 패러매트릭 디자인을, 전통건축에 접목시켜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런 시도들은 결과적으로 우진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는 느낌이 들기보다는, 뭔가 어설프게 뒤섞여있는 혼합물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그래서 우진이 최종적으로 채택한 방식은, 각각의 롤(Role)을 명확하게 나누는 것이었다.
소재와 건축기법은 현대적인 것에서 가져오고, 조형성과 공간구조는 전통건축에서 가져온 것이다.
모든 측면에서 전통과 현대의 감성을 섞기보다는.
‘조형성’과 ‘소재’라는 다른 측면에서 각각의 감성을 온전하게 살리는 방향으로 디자인 프로세스를 바꾼 것.
“점점 더 짧아지는 까만 철골구조를 상방으로 덧대어, 양 끝으로 말려 올라가는 처마의 조형성을 구현한 겁니다.”
“저 반짝거리는 기와? 저건 소재가 뭘까요?”
“처마 위에 올라간 건, 일정한 크기의 모듈로 제작된 사각 강화유리 패널이에요.”
“아……!”
“기와의 모양은 아니지만, 전통건축에서 기왓장이 얹히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일정한 규칙성에 맞춰서 끼워 넣었고……. 그러다 보니 완전히 다른 재질과 형태를 가졌음에도, 자연스럽게 기와라는 생각이 떠오르게 되는 거죠.”
그리고 이 방식은, 우진이 생각하는 방향성을 충족시키는 해답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디자인된 건축물의 외관은 분명히 전통건축의 조형성을 담고 있었지만.
그 조형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현대건축의 모던한 감성까지 함께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정 과정도 크게 어려울 것이 없었다.
최초에 설계한 규칙은 난해할지 몰라도, 한번 규칙성을 적립하고 난 뒤에는 같은 방식으로 다른 구조들을 전부 해석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이런 얘기를 해봤자, 우진을 제외한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말이다.
유 피디에게 신나게 설명하는 우진의 이야기들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소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하다는 건 알겠네요.”
“…….”
힘 빠지는 표정이 된 우진을 향해, 소정이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결과가 좋으면 된 거 아니겠어요?”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맞는 말씀이죠.”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이쪽으로도 사업을 확장해 보시는 건 어때요?”
“네?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드라마 세트장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부서를 하나 만든다거나. 그런 쪽으로 자회사를 하나 따로 설립한다거나…….”
소정의 말을 들은 우진은 말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번 프로젝트야 즐겁게 했고 결과물도 훌륭하게 뽑혀 나왔지만.
더 이상 이쪽 일을 할 생각은 딱히 없었으니 말이다.
우진이 <천년의 그대> 세트장 디자인을 수락한 가장 큰 이유는 건축적으로 재해석이 가능한 독특한 설정 때문이었는데.
일반적인 드라마 세트장의 경우, 보통 기존에 있는 것들의 ‘재현’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디자인과 건축에 어떤 귀천이 있다고 생각지는 않았지만, 우진이 가고자 하는 방향성과는 다소 동떨어진 게 사실이었다.
이번에는 미술감독 구형욱이 입을 열었다.
“마감재가 올라오기 전까지도 솔직히 긴가민가 했었는데……. 진짜 대단하십니다, 서 대표님.”
“하하, 과찬이십니다.”
“사실 미술감독으로서 제가 도움 드린 것도 별로 없는데 말이지요.”
촬영감독은 지금까지도 세트장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조명감독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수첩에 뭔가 메모하기 바빴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우진이 오늘 처음 만난 유일한 사람.
곧 이 세트장에서 연기를 하게 될 <천년의 그대> 여주인공 성하영이, 우진을 향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런 멋진 세트장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대표님.”
멋쩍은 표정이 된 우진이 대답했다.
“이 공간을 설계한 사람은 저겠지만, 완성하는 건 여기 제작진분들과 배우님들이십니다.”
우진이 눈을 찡긋하며 한 마디 덧붙였다.
“저는 영상 속에서 멋지게 완성될 천신궁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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