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개장(開場)
드라마 <천년의 그대>의 제작사는 ‘미디트리(MediTree)’이다.
액면 상으로만 따지자면 자본금 5억 정도에 업력 1년.
심지어 포트폴리오 하나 없는, 완전한 신생 드라마 제작사.
하지만 겉으로만 신생일 뿐, 미디트리는 이미 업계에서도 조금씩 주목받고 있는 회사였다.
일단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KSJ엔터의 대표 강소정이 지분을 절반 이상 소유하고 있는 데다, 대표자부터 시작해서 실무진들까지 다들 빵빵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일단 미디트리의 대표는 베테랑 피디 출신이자 소정의 오랜 지인인 유인건 피디였으며.
사외이사로 등재되어있는 우민철은 떠오르는 KBC의 전 드라마국 국장이자 미디트리의 지분을 10퍼센트나 가지고 있는 대주주였다.
게다가 <천년의 그대>를 찍기 위해 세팅해 놓은 인원은 유인건 피디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왔던 그의 팀이었으니.
사실상 미디트리는 신생업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신생 제작사의 드라마가 100억을 넘는 투자를 무리 없이 유치할 수 있었던 데에는 전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임 감독.”
“아니, 제가 뭐랬습니까? 스토리가 엄청 재밌게 뽑혔으니, 편성만 잘 받으면 대박 날 거라는 말씀을 드린 거죠.”
“방금 말했잖아. 우 국장님. 아니, 우 이사님이 전 KBC 방송국장 출신이라니까?”
“아……. 그럼 이미 편성까지 다 확보된 거네요?”
“거의 그렇다고 봐야지. 아직 서류상으로 픽스는 아니지만 말이야.”
“하긴. 이번에 성하영 배우님까지 합류하셨으니, 조금 아쉽던 출연진 네임밸류도 상당히 보강됐고…….”
그리고 오늘 이 미디트리의 이사진들은, 다 같이 유인건 피디의 차를 타고 이천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뜬금없이 이천으로 향한 이유는, 당연히 <천년의 그대> 촬영 세트장 때문.
오늘 세트장이 완공되는 날이었으니, 직접 이 촬영장을 사용할 실무진이 실물을 확인하러 오는 것이다.
유 피디의 차는 7인까지 탈 수 있는 널찍한 대형 SUV였고.
여기에 미술감독과 촬영감독. 그리고 조명감독까지, 총 네 사람이 차에 올라 타 있었다.
“으……. 그나저나 저는 오늘, 갑자기 좀 걱정되네요.”
촬영감독의 말에, 유인건 피디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뭐가?”
“일단 도면으로 봤을 땐, 구조가 꽤 마음에 들었었는데……. 기대보다 그림이 별로면 어쩌나 해서요.”
“그림……?”
“사실 이 세트장이 저희 촬영장소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이잖아요?”
“그렇지.”
“여기 퀄리티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 드라마 비주얼 자체가 달라질 테니……. 갑자기 좀 걱정돼서요.”
촬영감독의 이야기를 듣던 유인건은,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그의 말대로 이천 세트장의 중요도는, 생각보다 꽤 큰 것이었으니까.
“그때 소정 대표님이 뭐라 셨더라…….”
“뭐가요, 피디님?”
“세트장 제작비 말야.”
“아하.”
“원래 제작비 10억 정도 들인다고 하지 않았었나?”
유인건의 말에, 촬영감독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가 걱정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이었으니까.
“저희, 세트장에 제작비 거의 안 태웠어요.”
“뭐……?”
“원래 10억 태우자고 했다가, 그 서우진 대표가 지분 투자하는 방식으로 변경하면서 저희 쪽에서 세트장 시공부담금 빼는 방식으로 갔거든요.”
“헐, 정말?”
“그래서 제가 걱정하는 거예요.”
“그 서우진 대표라는 사람이, 사실상 자기 돈으로 하는 거니까?”
촬영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여기서 아끼면 아낄수록 본인 돈이 세이브되는 거니까, 좀 싼마이로 작업하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거죠.”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 이천으로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촬영감독의 걱정을 듣고 보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요즘 유명해진 디자이너인 서우진의 작품이라 해서 별다른 걱정 없던 유인건 피디도, 은근히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였다.
“음, 소정 대표님이 믿어도 된다 하시기는 했는데…….”
잠시 중얼거리던 유인건 피디의 시선이, 뒷좌석에서 가만히 얘기만 듣고 있던 미술감독을 향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 형욱이는 이미 몇 번 보지 않았었나?”
유인건의 물음에, 나머지 두 사람의 시선도 그를 향했다.
<천년의 그대>의 미술감독을 맡은 구형욱은 당연히 세트장이 제작되는 동안 WJ 스튜디오와 여러 번 컨택을 하였고.
때문에 그는 이 촬영장에 이미 몇 번 먼저 와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형욱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야 두 번 정도 여기 왔었죠.”
“그래? 어땠어?”
“뭐, 그땐 괜찮았었는데…….”
“그런데?”
“사실, 제가 마지막으로 와본 게 1월이었거든요. 그땐 아직 마감 공사 거의 안 됐던 상황이었고, 그래서 제대로 완성된 실물은 저도 오늘이 처음이에요.”
“사진으로는 계속 전달받았을 것 아냐?”
“그게…….”
잠시 뜸을 들인 형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진으로 봤을 땐, 진짜 장난 아니었어요.”
“뭐가?”
“진짜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간지나더라고요.”
“그래……? 그 사진 좀 보여줄 수 있어?”
“메일에 공문으로 보낸 거라, 폰에는 없어요.”
“그렇군.”
“어쨌든 그래서 전 기대 엄청 하고 가는 중이었는데……. 촬영 감독님 말씀 듣고 나니, 실망할까 봐 걱정되네요.”
“사진 멋있었다며?”
“사진이야 사실, 포샵으로 얼마든지 장난질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요.”
형욱의 그 말에, 유인건은 입맛을 다셨다.
결국 직접 도착해서 봐야, 어떨지 감이 올 것 같았으니 말이다.
“흠……. 오늘 가서 보면 알겠지, 뭐.”
하여 한 차례 일단락된 네 사람의 대화는 다른 방향으로 다시 이어졌고, 그사이 유인건의 차는 이천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끼익-
“피디님, 도착했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텅-!
어느새 세트장에 대한 걱정은 잊었는지, 다른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이며 차에서 내리는 네 사람.
“우리가 좀 일찍 왔나?”
“그러게. 아직 한 이십 분 남았네.”
“미리 들어가서 한번 둘러보죠, 뭐.”
“그럴까?”
“먼저 좀 봐도 상관 없잖아요?”
“그러지 뭐.”
세트장 앞 공터에 주차된 차에서 내린 그들은 휘적휘적 세트장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높다란 담장을 지나 내부에 들어선 순간.
“……!”
“우, 우와……!”
“잠깐. 이게 뭐야?”
네 사람은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가장 처음 드러난 커다란 현관(玄關) 앞에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네 사람이 차 안에서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 * *
“와, 진짜 미쳤다.”
소정의 탄성에, 우진이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가요……?”
“그러니까 지금 이걸, 반년 만에 뽑아낸 거잖아요?”
“정확히는 5개월 걸렸죠.”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예요?”
“무슨 수를 쓰긴요. 그야 열심히…….”
우진의 대답에, 이번에는 소정이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과 2천 평이라는 넓은 부지.
물론 2천 평의 세트장 중 초반부의 촬영에 쓰일 800평 정도만 먼저 완공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녹록치 않은 일정이었다.
그런데 이런 조건 속에서 우진이 뽑아낸 결과물은, 소정이 볼 때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무슨, 교과서만 열심히 읽었어요도 아니고…….’
다시 한번 세트장의 입구를 둘러본 소정이, 우진을 향해 엄지를 치켜 올리며 입을 열었다.
“진짜, 서 대표님 꼬시기를 정말 잘했다니까.”
그에 우진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소정 대표님은 마음에 드시나 봐요?”
“마음에 들다마다요.”
“아직 입구밖에 못 봤는데?”
“사실 다 볼 필요도 없어요.”
“네……?”
“제가 원했던 바로 그 느낌! 이거거든요. 전통 건축의 느낌이 나면서 신비로운 분위기가 풍겨야 하고. 그러면서도 약간 현대적인 감성도 담겨야 하는……!”
흥분해서 침을 튀기며 떠들기 시작하는 소정을 보며, 우진은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소정의 칭찬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녀의 해석이 참 낯간지러웠으니 말이었다.
‘역시 꿈보단 해몽이라더니……. 이 디자인을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거구나.’
물론 세트장의 디자인이 잘 뽑혔다는 것은, 우진도 자부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미디트리 쪽에서 받았던 디자인 래퍼런스들을 최대한 차용하기도 했으며, 전통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실제로 전통 건축의 디자인 구조를 열심히 연구한 결과물이었으니까.
프로젝트가 재밌어서 열심히 작업하기도 했다.
항상 현대적인 건축물들만 디자인하던 우진에게, <천년의 그대>라는 드라마의 배경과 컨셉은 신선한 자극을 줬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다.
덕분에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이 사람들은, 대체 어딜 간 거지?”
“이 사람들이라니요?”
“들어오면서 주차된 차 봤잖아요.”
“아하.”
“그거 유 피디님 차거든요. 아마 감독님들도 같이 오셨을 텐데…….”
“세트장 구경 중이신가 보네요.”
“그러게요. 안쪽으로 들어가 보죠.”
우진에게 칭찬을 쏟아낸 뒤에도 세트장 곳곳을 면밀하게 살피던 강소정은, 세트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서도 연신 탄성을 내뱉고 있었다.
‘진짜. 카메라를 어느 방향으로 돌려도 그림이잖아?’
보통 이런 외주 작업을 맡기면 의뢰 내용보다 나은 결과물이 나오기 쉽지 않았는데.
지금 우진의 손에서 탄생한 이 세트장은, 사실상 의뢰서와 별개의 새로운 창작 작품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특히나 소정이 감탄한 부분은, 구조물들의 디테일에 있었다.
‘디테일 좀 봐. 진짜 미쳤어.’
마치 이 드라마의 대본을 쓴 작가가 직접 건축물을 디자인하기라도 한 듯.
대본을 열 번도 넘게 읽은 소정조차도 잊고 있었던 디테일들을, 건축물 여기저기에 꼼꼼히 살려 놓았으니까.
‘진짜 대본 속 서후가 살고 있는, 천신궁(天神宮)을 그대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아.’
단순히 외주를 맡았다는 마인드가 아닌 진짜 주인의식이 있어야만 가능한 설계.
우진이라는 사람에 대한 소정의 호감과 신뢰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우진이 이렇게까지 드라마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지구상에서 <천년의 그대> 드라마를 시청했던 유일한 애청자이기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이쪽이 본궁인거죠?”
“그렇죠, 대표님. 여기가 <천년의 그대> 첫 등장 씬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와, 흠잡을 데가 없네, 진짜. 촬영 감독님 좋아하시겠어.”
연신 감탄하는 소정의 뒤를 따라가며, 우진도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드라마 보면서 아쉬웠던 부분들, 재해석해놓은 것도 좀 있는데……. 다행히 마음에 드시나 보네.’
은근히 불안했던 부분들까지 괜찮은 반응이 나오자, 세트장 디자인에 대한 확신이 더욱 생긴 것이다.
‘세트장 북쪽에 만들어 놓은 천신탑 보여드리면, 그땐 어떤 반응이실지 볼만 하겠어.’
세트장 안에 있는 회심의 역작(?)을 떠올린 우진이,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천년 전의 남주와 여주가 처음으로 만나는 장소이자, <천년의 그대>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바로 ‘그 장면’이 촬영되는 그곳.
드라마 팬으로서 우진의 사심(?)이 들어간 그 장소는, 우진이 정말 공을 들여 설계한 공간이었으니 말이다.
강소정 대표에게 몇 군데를 더 안내하며 십여 분 정도 더 걸음을 옮기자, 우진이 떠올렸던 천신탑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미, 몇 명의 선객이 도착해 있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