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Warming up
퇴근 시간대에 성수동에서 시청까지는 꽤나 험난한 여정이다.
직선거리로 따지자면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지만, 워낙에 막히는 서울의 구도심을 지나야 했으니까.
그래서 우진은 민주영 대표와의 미팅이 끝나자마자 최대한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던 것이었고, 그래서 겨우 시간에 맞춰 시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청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자, 우진은 조금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다.
펼쳐진 광경이, 우진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으니까.
‘아, 생각해보니……. 아직 신청사가 지어지기 전이구나.’
우진은 회귀 이후, 딱히 서울시청에 와볼 일이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지날 일이야 꽤 있었지만, 정말 오랜만에 청사 건물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그 통유리 외관의 신청사 건물을 생각하고 시청에 도착한 우진은, 의외의 광경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2011년 겨울, 서울시청의 신청사는, 아직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한창 공사 중인 신청사 건물과, 그 앞에 펜스로 절반 이상 가려져 있는 본관 건물.
‘그래서 시청 건물이 아니라 시의회 별관으로 오라고 하신 거였군.’
밀리는 시청 앞 로터리에서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본 우진은, 잠시 후 쓴웃음을 지었다.
서울시청의 신청사 건물과 관련된, 몇 가지 에피소드들이 떠올랐으니 말이다.
내년 상반기에 완공될 이 신청사 건물은, 디자인적으로 수많은 혹평을 받았던 비운의 건물이기도 했다.
‘탁상행정과 이해관계……. 건축법 측면에서도 정말 고통 많이 받았던 건축이지.’
서울시 신청사는, 무려 다섯 번이나 설계가 변경된 끝에 탄생한 건물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문화재법’상 덕수궁의 경관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난해한 조건이 붙었기 때문.
문화재 근처의 고층건물은 법적으로 제한되어 있고, 때문에 건축허가를 얻기 위해서는 문화재청의 승인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네 번이나 연속으로 거절당한 것이다.
이 조건이야말로 담당관의 판단에 따라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니, 설계 단계에서부터 적잖이 난항을 겪었던 건물이 바로 서울시청의 신청사 건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결과라도 좋았다면 모르겠지만, 미래에도 수많은 건축가들과 평론가들에게 디자인적으로 셀 수 없이 까이게 되는 비운의 건물.
이 신청사는 몇 년 뒤 있을 건축가들을 대상으로 한 한국 최악의 현대건축 설문에서, 당당하게 1위를 차지한 건물이기도 했다.
물론 2011년 12월인 지금, 완공된 건물의 자태(?)를 알고 있는 것은 우진 한 사람뿐이었지만 말이다.
‘처마선의 라인을 따온다는 컨셉 자체는 나쁘지 않았는데, 설계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잡음이 너무 많았던 거지 뭐.’
우진은 문득 2년 정도만 더 빠른 시점으로 회귀했다면 자신이 이 신청사 건물에 공모해볼 수 있지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2년 더 빠른 시점에 회귀했다면, 우진은 머리를 박박 밀고 훈련소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을 테니까.
‘후. 잠깐 상상만 했는데, 진짜 끔찍하네.’
뜻밖의 상상 덕에 순간적으로 식은땀을 흘린 우진은, 곧 목적지인 별관에 도착하였다.
우진이 도착했을 때, 이미 경완은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빨리 안 다니나, 서우진이.”
경완의 반가운(?) 인사에, 우진도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상무님은 못 뵌 사이에, 어깨에 뽕이 더 씨게 들어가신 것 같습니다?”
“뭐 인마?”
“흐흐, 멋있어지셨다고요.”
“능글맞기는 여전하네.”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젓는 경완을 향해, 우진이 다시 물었다.
“그나저나 아직 한 5분 정도 남은 거 아니예요?”
“시장님께서 불러주셨으면, 20분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어야지 짜샤.”
“저도 좀 더 일찍 오고 싶었는데, 바빠서 어쩔 수 없었어요.”
“어련하시겠어.”
“그럼 들어가시죠?”
“그럽시다.”
만나자마자 경완과 티격태격한 우진은, 나란히 약속장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우진은 그곳에서, 두 사람을 더 만날 수 있었다.
한 사람은 당연히 서울시장 구윤권이었으며.
“오랜만입니다, 서 대표님.”
“그간 잘 지내셨지요, 시장님?”
“하하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다른 한 사람은 바로…….
“시댕아, 왜 이렇게 늦어?”
“서 대표 기다리다가 늦은 겁니다!”
“아 그래? 그럼 뭐 늦을 수도 있지.”
“와, 어르신.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너무하긴 시댕아. 앉기나 해.”
패러마운트의 비리 척결 과정에서 우진을 크게 도와줬던 인물.
전 기재부 차관 출신의 거물급 인사인 황종호였다.
* * *
오늘 구윤권과의 약속 자리에, 처음부터 황종호가 포함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이번 자리가 성사될 수 있었던 이유는 꽤 복잡한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박경완이 함께하게 된 이유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의 약속이 성사된 발단은, 런던에서 돌아오자마자 걸려왔던 경완의 전화라고 할 수 있었다.
[야, 서우진이. 너 조만간 시간 돼지?]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말씀 이심까.”
[아니, 시간이 없어도 만들어야 돼, 짜샤.]
“없는 시간을 어떻게 만들어요?”
[신임 시장님이 조만간 보고 싶다 하시는데, 시간……. 없을 예정이야?]
“아닙니다. 만들어야죠. 없었어도 생겼습니다.”
[흐흐흐. 거봐. 되잖아.]
우진이 런던에 가 있던 사이, 서울시에서는 반포한강공원의 인공섬인 새빛섬 개조공사 입찰 공시를 올렸는데.
여기를 천웅건설에서 수주하게 되면서, 경완이 다시 한번 시장과 대면하게 될 일이 생겼던 것이다.
이때 구윤권 시장과 대화 도중 자연스레 우진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고.
이때 경완에게 EAC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구윤권이, 자리를 한 번 만들어달라고 이야기한 것.
이 이야기를 들었던 우진은, 또 한 번 여러모로 놀랐었다.
일단 천웅건설에서 새빛섬의 재공사를 입찰받은 것 자체가, 그가 알던 미래와 완전히 다른 것이었으니 말이다.
원래대로라면 처음 새빛섬을 시공했던 건설사에서 재공사까지 그대로 맡게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천웅건설로 바뀐 것이다.
‘변수는 결국 나 하나니까, 분명히 나 때문일 텐데…….’
그리고 우진의 말처럼, 이런 변화 또한 우진으로 인한 나비효과 때문이 맞았다.
우진이 아니었다면 도담요양원이 SPDC의 공모작으로 지어지지 않았을 것이었고.
그랬더라면 이 요양원을 천웅건설이 입찰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서울시장이 준공식에 올 일도 없었을 테니, 박경완이 구윤권 시장과 안면을 트게 만들어 준 것 또한 결과적으로 우진 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오늘의 자리가 만들어졌고 말이다.
그리고 또 재밌는 것은, 이 자리에 황종호가 추가된 경유였다.
[약속은 잡혔는데, 아마 손님이 한 분 더 오실 거다.]
“손님이요?”
[너 어르신 기억하지?]
“어르신이라면…….”
[황종호 어르신 말야. 지난번에 도와주셨던.]
“아, 그분이야 당연히 기억하죠. 그런데 황 어르신이 시장님 뵙는 자리에는 왜……?”
[알고 보니 어르신이, 기재부 시절에 구윤권 시장님 직속 선배시더라고.]
“네에……?”
[그리고 완전히 은퇴하신 줄 알았는데……. 이번에 다시 한자리 꿰차신 모양이야.]
“한 자리요?”
[청와대 비서실에, 정책실장으로 발령 나신 모양이더라고.]
“예?”
[본인 말로는 코 꿰였다고 투덜거리시던데, 우리 입장에서는 결과적으로 엄청 잘 된 거지 뭐.]
장관급 공무원인 청와대 정책실장이란, 정부정책과 국정과제와 관련해서 주요 현안을 결정하는 중요한 자리이다.
때문에 이 자리는 건설업계와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리였는데, 그 이유는 당연히 부동산과 관련된 정책들도 이 정책실장의 머리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우진이나 경완의 성향상 당연히 어떤 정경유착을 기대할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인맥 중에 이런 중요한 자리에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기업을 경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적어도 정부 정책 때문에 억울한 일 당할 일은 피할 수 있을 테니까.’
황종호는 그냥 자리가 재밌어 보여서 나오고 싶다고 했다지만, 그 이야기가 액면 그대로는 아닐 터였다.
의욕 넘치는 신임 서울시장과 이제 곧 발령 날 신임 정책실장.
근 2년 사이에 급성장하여 업계 최고의 건설사로 성장 중인 천웅건설의 상무와 얼마 전 EAC에서 최고의 화제가 되었던 젊은 건축가 우진.
이 네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는 데에, 단순히 사적인 이유만 있을 리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진은 오늘의 자리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분명히 처음 이야기는 내년에 있을 국제 리빙페어에서부터 시작되겠지만, 거기서 뻗어 나갈 수 있는 이야기는 한계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할 게 분명했다.
서울시장과 청와대 정책실장이란 자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다양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직책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원탁에 둘러앉은 우진은, 두근거리는 기분을 가라앉히며 찻잔을 조용히 홀짝이고 있었다.
간단한 인사가 오간 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칼칼한 목소리의 황종호였다.
“서 대표, 얼마 전에 런던에 다녀왔다며?”
우진은 사적인 자리에서 황종호와 두 번 정도 더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아주 불편한 사이는 아니었다.
“예, 어르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헐헐. 영국이라. 부럽구만 그래. 나도 청와대로 끌려오기 전에, 유럽여행이나 한번 다녀왔어야 하는데 말이지.”
“아니, 어르신. 서 대표가 무슨 여행 다녀온 줄 아십니까?”
“시댕이 너는 왜 갑자기 끼어들어?”
“아 왜 저만 미워하세요.”
“미워하긴 인마. 이게 다 애정이야. 애정.”
황종호와 박경완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며, 우진과 구윤권은 작게 웃었다.
윤권의 입장에서는 마냥 호랑이 같던 상사의 이런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에 재밌게 느껴졌던 것이었고, 우진은 몇 번 봤음에도 아직 적응이 되질 않았던 것이었다.
‘확실히 재밌는 분이시란 말이지.’
긍정적인 것은, 두 사람의 흥겨운(?) 대화 덕분에 자칫 무거울 수 있던 자리가 한결 편해졌다는 점이었다.
“듣자 하니 서 대표는, 런던에서 코쟁이 친구들 아주 박살을 내주고 왔다며?”
“하…… 하하. 박살이라뇨, 어르신. 저도 많이 배우고 왔죠.”
“허이고, 겸손은……. 내가 지난번에 왕십리에서 시커먼 놈들 조질 때부터 알아봤는데, 서 대표가 확실히 난 놈이여, 난 놈은.”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래, 그쪽에 갔던 이야기나 좀 풀어 봐. 여기 서울시장도 그게 제일 궁금했던 모냥이니까.”
하여 기분 좋은 분위기 속에서, 우진은 EAC에 갔던 이야기들을 가볍게 세 사람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경완조차도 처음 듣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동안 세 사람은 우진의 이야기를 경청하였다.
우진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그가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로 이어졌고, 종래에는 구윤권과 황종호에게 WJ 스튜디오의 작업물들에 대해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경완과 천웅건설. 그리고 SPDC까지 연계된 이야기들도 하게 되었고 말이다.
황종호와 구윤권은, 그 이야기를 무척이나 흥미롭게 들었다.
“그러니까 이게……. 전부 지난 2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는 말이지요?”
구윤권의 물음에, 우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런 셈입니다, 시장님.”
“하하. 선배께서 서 대표를 왜 그렇게 칭찬하시는지 확실히 알겠습니다.”
“껄껄, 그렇다니까? 난 처음에 저 시댕이가 왜 이렇게 서 대표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나 했었어. 그런데 몇 달 지켜보니까 금방 알겠더라고.”
“아, 어르신!”
“크흐흐흐.”
여전히 좋은 분위기 속에 네 사람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렇게 거의 한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창밖이 어둑해질 즈음, 그들은 미리 예약되어 있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이곳에서, 드디어 본론이랄 만한 이야기가 처음 시작되었다.
그것의 시작은, 구윤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사실, 서 대표님.”
“예, 시장님.”
“제가 서 대표님께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네? 어떤……?”
긴장된 표정의 우진을 보며, 윤권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뭐, 어떻게 보면 좀 두루뭉술하고 막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는데…….”
이어서 구윤권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전임 시장님이 추진하셨던 서울시 도시계획들에 관련해서, 몇 가지 의견을 나눠보고 싶었던 부분이 있었거든요.”
갑자기 훅 들어오는 구윤권의 이야기에 우진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것을 본 구윤권이 손사래를 치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닙니다. 그냥 최근에 가장 이슈가 되신 건축디자이너이면서 또 누구보다 젊은 피를 가진 서 대표님께선……. 이와 관련해서 어떤 생각들을 하고 계신지 궁금했을 뿐이니까요.”
구윤권의 말을 듣던 우진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집어삼켰다.
아무래도 오늘 이 자리는, 우진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묵직한 자리였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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