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Warming up
툭-
탁자 위에 던져놓은 잡지 책의 표지를 보며, 우진이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이게 뭡니까?”
“보면 모르세요? 잡지잖아요. 건축디자인 잡지.”
“아니, 그거야 당연히 아는데…….”
그것을 슬쩍 집어 든 우진이, 앞뒤로 살피며 다시 물었다.
“이거 어느 나라 말이에요? 이태리어?”
“빙고.”
“이걸 갑자기 왜 주시는…….”
고개를 갸웃하는 우진을 보며, 민주영이 피식하고 웃었다.
“한번 펼쳐 보세요. 한 30페이지쯤 보시면 될 거예요.”
“음?”
민주영으로부터 받은 의문의 잡지 책을 펼쳐 넘기던 우진은, 잠시 후 민망한 표정이 되었다.
몇 페이지 스르륵 넘기자, 그가 너무도 잘 아는 얼굴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오늘 아침 샤워 후 머리를 말릴 때도 봤던 바로 그 얼굴.
그것은 다름 아닌, 보름 전 우진의 모습이었다.
AA스쿨 컨퍼런스 홀의 단상 위에서 열변을 토하는 우진의 얼굴이, 풀 컬러로 아주 대문짝만하게 찍혀있었던 것이다.
“이…… 건 어디서 났어요?”
가장 중요한 건, 사진이 아주 못 생기게 나왔다는 점이었다.
입에 침까지 튀어 가며 열변을 토하고 있어서인지,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표정이었던 것이다.
우진이 슬쩍 잡지를 덮어버리자, 그것을 냉큼 잡아챈 민주영이 다시 펼쳐 들었다.
“이태리 다녀오는 길에, 공항에서 샀어요.”
“샀…… 다고요?”
“아, 물론 대표님 얼굴 보려고 산 건 아니에요. 원래 좋아해서 자주 구독하던 잡지였거든요.”
“…….”
앞쪽으로 의자를 당겨 앉은 민주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뭐가요?”
그리고 그녀는, 우진의 사진 위에 큰 폰트로 박혀있는 문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I giovani architetti orientali portano un nuovo vento nell'architettura digitale >
“여기 보이시죠?”
“저 이태리어 할 줄 모릅니다.”
“동양의 젊은 건축가, 디지털 건축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오다.”
“……. 꽤, 거창하군요.”
“그러게요, 서 대표님.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창한 사람이었더라고요.”
“…….”
“EAC라니.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20대에 EAC에서 마이크를 잡아 본 건축가는 전 세계를 통틀어 아무도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꽤 흥분한 민주영을 향해, 우진은 천천히 설명을 시작하였다.
이미 한국에서는 EAC에서 우진의 활약이 몇 번 기사화됐던 적이 있지만, 해외로 돌아다니던 주영은 이번에 잡지에서 처음 본 모양이었다.
“민 대표님, 제가 브루노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건 아시죠?”
“알죠.”
“그럼 혹시 마테오라는 건축가도 아세요?”
“스페인의 마테오 말씀이시죠?”
“네.”
“그럼요. 모를 리가요.”
우진은 그간 있었던 일들을 담백하게 전해주었지만, 민주영은 그것만 듣고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우진의 이야기에 담겨있는 사실 하나하나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민주영이 만약 업계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우진의 이야기를 들었더라도 막연한 감탄 정도가 다였을 것이다.
EAC라는 행사가 한국에서는,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민주영은 자재 사업을 하는 사업가이기 이전에 유럽에서 건축디자인 대학을 나온 전공자였고.
때문에 EAC의 위상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암튼, 대단하시다니까.”
주영의 말에, 우진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비행기 그만 태워 주세요. 너무 높게 띄워주셔서 떨어지면 아플 것 같습니다.”
“걱정 마시죠. 제 생각엔 떨어질 일 없을 것 같으니까요.”
“…….”
우진이 당황하는 모습이 재밌었는지, 주영은 히죽히죽 웃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오늘 그녀가 우진의 사무실에 온 목적은 당연히 리빙페어와 관련된 프로젝트 논의 때문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EAC에 대한 이야기만 삼십 분째 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휴우.”
주영의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우진이, 준비해뒀던 서류를 꺼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EAC이야기는 이쯤 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뭐, 그러죠.”
“오늘 정해야 하는 사안이 제법 많은 걸로 아는데…….”
우진의 말이 이어지자, 주영의 눈이 반짝였다.
“맞아요. 이제 물량 확보에 필요한 시간에다 공사 기간까지 생각하면……. 예산안을 절반 정도는 픽스 해야 할 시점이니까요.”
지금부터는 우진과의 친분을 떠나서, 비즈니스를 시작해야 할 때였다.
* * *
서울에 돌아온 뒤로, 우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점검하는 것이었다.
서울숲 옆에 짓고 있는 WJ 스튜디오의 신사옥부터 시작해서, 패러필드 로비에 들어갈 파빌리온. 그리고 크고 작은 인테리어 사업장들까지.
이제 WJ 스튜디오에서 동시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숫자가 10개를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아직까진 모든 프로젝트에 직접 관여하는 우진이었다.
‘핵심 디렉팅은 최대한 내가 해야지.’
하지만 그중에서도 최근 가장 신경 쓰는 프로젝트는, 단연 2012년의 리빙페어라고 할 수 있었다.
리빙페어 자체에서 얻어낼 수 있는 인지도와 홍보 효과는 물론, 서울시 디자인재단과의 연계. 그리고 KSJ엔터의 <천 년의 그대>까지.
이 다양하고 커다란 가치들이 촘촘하게 연계되어있는 이번 프로젝트는, 우진이 지금까지 해 온 그 어떤 프로젝트보다도 덩치가 큰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민 대표와의 미팅은, 무척이나 중요한 지점이었다.
오늘 미팅을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이번 프로젝트에 매몰될 비용을 최대한 줄일 수 있을 테니까.
벨로스톤즈에서 최대한 자재비용을 많이 부담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효율적인 디자인과 촘촘한 계획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적시에 자재를 수급하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공사 기간을 줄이는 것이야말로, 비용을 절약하기 위한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달력을 펼쳐 놓은 두 사람은, 각자 체크 리스트를 펼쳐 놓고 일정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일단 가장 처음에 할 건, 조립식으로 이전 가능한 모듈의 범위를 정하는 거예요.”
“아무래도 그렇죠. 페어에 옮겨 갔다가 다시 현장으로 가지고 돌아올 수 있는 규모를 산정해야 하니까요.”
조립식 모듈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조립할 수 있게 설계된 파트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드라마 촬영 시에도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유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면서, 세트장이 지어질 이천과 리빙페어가 열릴 코엑스까지도 충분히 옮길 수 있도록 설계되는 부분.
이 부분을 어떻게 만들어 내느냐는, 꽤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드라마 촬영은 언제부터라고 했었죠?”
“그건 왜요?”
“혹시나 세트장 준공이 가을 이후면, 페어에 출품할 부분부터 먼저 작업을 요청드리려는 거죠.”
“아하, 그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어차피 페어가 시작될 쯤에는, 이미 드라마를 촬영 시작한 상황일 테니까요.”
“그렇군요.”
“오히려 드라마 촬영 일정과 리빙페어 일정이 겹치지 않게 조율하는 게 중요할 것 같은데……. 이건 강소정 대표님과도 얘기를 나눠봐야겠네요.”
“좋아요. 그럼 이 부분은 해결됐고…….”
가장 먼저 두 사람은 세부 일정을 쭉 써 내려간 뒤, 그 일정 사이사이에 필요한 것들을 삽입해 넣었다.
일정이 계획된 대로 굴러갈 수 있도록, 필요한 자재들과 인력을 체크 하는 것이다.
“벨로스톤즈 쪽에서 감리가 한 분 정도 와주시는 게 좋겠죠?”
“물론이에요. WJ 스튜디오의 감리를 당연히 믿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이런 부분은 크로스 체크 하는 게 더 좋으니까요.”
“그럼 1월 일정까지는 그대로 픽스해도 좋을 것 같아요.”
“그 이후 일정은 내년 초에 상황 봐가면서 다시 구체화하는 게 좋겠죠?”
“민 대표님만 문제없으시다면요.”
“문제라면……?”
“자재 수급 일정이요.”
“아, 전 좋습니다.”
점심 이후 시작된 민주영과의 미팅은, 거의 퇴근 시간이 다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오늘의 미팅 자체가 세부 일정을 조율하는 것이었으니, 고민해야 할 부분이 상당히 많았던 것이다.
이렇게 두 대표가 세부 일정을 잡아놓아도 어차피 실무진 미팅이 추가적으로 진행돼야 하겠지만.
결정권자인 두 사람이 최대한 많은 것을 정해놓아야 실무진이 일하기도 더 편한 법이었다.
“후우. 얼추 마무리된 것 같네요.”
머리를 쓸어 올린 뒤 기지개를 켜는 민주영을 보며, 우진이 빙긋 웃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군요.”
우진의 대답에 주영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오래 걸리다니요? 전 솔직히 오늘 다 못할 줄 알았어요.”
“그래요?”
우진의 반문에 민주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사실 타 업체 기준으로 놓고 보면, 이 정도 규모 미팅이면 거의 일주일은 왔다 갔다 해야 해요.”
“그 정도나요? 대체 왜……?”
“여기야 서 대표님이 결정권자이면서 실무적인 부분까지 전부 다 꿰고 계시지만, 다른 업체는 그렇지 않거든요.”
“아하.”
“보통 뭐 하나 제안하면 올라갔다 내려오는 데 며칠씩 걸리니까……. 일주일도 짧게 잡은 거죠 뭐.”
민주영의 칭찬에, 우진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 그녀가 한 이야기는, 반대로 벨로스톤즈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부분이었으니까.
물론 자재회사인 벨로스톤즈보다 디자인 설계 회사에 가까운 WJ 스튜디오가 훨씬 더 복잡하게 굴러가는 회사였지만 말이다.
민주영이 미팅 자료를 정리해 가방에 집어넣고 일어서자, 우진 또한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대표님.”
우진의 말에, 민주영이 엄지손가락을 뒤로 가리키며 말했다.
“거의 저녁시간 다 됐는데, 같이 식사나 한 끼 하시는 건 어때요?”
우진이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오늘은 뒤에 또 일정이 있네요.”
“저녁 약속?”
“뭐, 그렇게 정해져 있지는 않은데……. 아마 그렇게 될 확률이 높겠죠?”
민주영이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는 오늘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EAC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유럽의 유명한 건축가들에 대해 평소 궁금한 것도 많았던 그녀였으니까.
“어쩔 수 없죠 뭐. 그럼 다음을 기약해요.”
우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뭐 이제 페어 열릴 때까지는, 한 달에도 서너 번 이상 봬야 할 테니……. 다음에 맛있는 밥 한 끼 대접하겠습니다.”
“좋아요. 잊지 않겠어.”
엘리베이터 앞까지 주영을 배웅 나간 우진은, 그녀를 태운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걸음을 돌리며 곧바로 스마트폰을 열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로 곧장 전화를 걸었다.
“네, 상무님. 미팅 방금 끝났습니다.”
우진이 전화를 건 상대는, 다름 아닌 박경완 상무.
[무슨 미팅을 그렇게 오래 해?]
“중요한 건이라서요. 오늘 약속이랑 연관도 있는 미팅이고…….”
[오호, 그래? 어떤 연관?]
“시장님께서 관심 있어 하는 프로젝트거든요.”
[아, 그 리빙페어?]
“네 상무님.”
스마트폰을 귀에 댄 채로 대표실에 들어온 우진은, 빠르게 가방을 챙기고 코트를 입었다.
[여튼 우린 지금 출발했다. 늦으면 큰일 나는 거 알지?]
“당연하죠.”
[주차장에서 만나서 같이 올라가자.]
“아무래도 그게 좋겠죠?”
[그럼 좀 있다 보자고.]
뚝-
박경완과의 전화를 끊고 차 키를 챙긴 우진은, 곧장 다시 사무실을 나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우진이 오늘 약속이 있는 곳.
그곳은 바로, 서울시청이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