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대미(大尾)
EAC는 총 1박 2일 동안 진행된다.
첫날 4~5시간 정도에 걸친 발표회가 끝난 뒤, 그날 저녁 참석자들 간 교류의 장이 열리고.
그다음 날은 조금 더 짧은 세 시간 정도의 토론회가 낮에 열린 뒤, 간단한 행사와 함께 폐막하게 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1박 2일 동안, 우진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과장 없이 EAC 참석자들 중 절반 정도는, 우진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 했으니 말이다.
우진이 보여준 디자인은, 그만큼 파격적이고 멋진 것이었다.
“반갑습니다, 우진. 오늘 발표는 정말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자리에 초청될 수 있어서 영광일 따름입니다.”
“패러매트릭 디자인을 적용한 우진의 건축물은 아직 없습니까?”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좀 있지만, 아쉽게도 아직 완성된 프로젝트는 없네요.”
“우진의 프로젝트는 한국에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내년에는 한국에 꼭 한번 방문해야겠군요.”
“와주신다면, 제가 맛있는 식사라도 대접하겠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EAC의 E는 Europe의 E였지만, 우진이 참석했듯 전 세계 각국의 디자이너들이 다양하게 모여 있었다.
덕분에 우진은 정말 많은 인맥을 만들 수 있었고, 그만큼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다들 세계 최고 수준의 건축가인 만큼, 우진이 배울 점도 많았던 것이다.
사실 우진이 발표한 디지털 건축과 관련된 분야들이 지금 시점에서 새롭고 파격적인 분야였던 것이지.
기존의 건축적인 역량으로 따지자면, EAC에 참석한 대부분의 건축가들이 우진보다 뛰어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모든 컨퍼런스 일정이 끝나고 AA스쿨을 나서면서.
우진이 가장 먼저 떠올린 한 가지는, 바로 이것이었다.
‘정말 세상은 넓고, 뛰어난 건축가들은 많구나.’
전생을 포함해 이 업계에 이십 년을 있으면서 수 없이 느꼈던 사실이지만, 이번처럼 그것이 뼈저리게 느껴졌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주차장에서 차에 타기 직전, 우진은 마지막으로 브루노, 마테오와 인사하였다.
“두 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진의 인사에, 두 사람 모두 기분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틀 내내 건축가들에게 시달리느라 핼쑥해진 우진의 얼굴이 재밌었는지, 브루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우진이야말로 고생 많으셨지요. 하하.”
이번 컨퍼런스에서 우진보다도 더 바빴던 마테오는 멋쩍은 표정이었다.
“좀 더 챙겨드리지 못해서 제가 죄송하군요. 우진 덕에 오랜만에 EAC에서 단상 위에도 서봤는데 말이지요.”
마테오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우진은 손사래를 쳤다.
“제 덕이라니요. 저야말로 두 분 덕에 너무 귀한 경험을 했지요.”
물론 마테오가 우진의 덕을 본 것도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 얻은 것은 우진이 더 많았다.
그의 설계에 참여함으로써 이미 스타디움 설계자에 이름도 올린 데다 설계비용까지도 두둑이 받았는데, 그 덕에 EAC에서 발표까지 해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진은 무척이나 민망한 표정이었고, 그런 그를 향해 마테오가 껄껄 웃어 보였다.
“한국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저녁이나 한 끼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저야 좋습니다.”
“귀국 일정이 며칠 뒤에 잡혀 계시죠?”
“말일 오후에 귀국합니다.”
우진의 말에 스마트 폰을 켜 달력을 확인한 마테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일이면 수요일……. 그날을 제외해도 아직 삼일 정도 남았군요.”
“그렇죠.”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스페인의 건축가들과 인사를 나눈 뒤.
우진은 이번 컨퍼런스에서 안면을 익힌 다양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하여 그렇게 주차장에서만 이십 분가량 돌아다닌 우진은, 거의 탈진 직전의 상태로 운전대를 잡았다.
이제는 제이든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오빠……. 괜찮지?”
축 늘어진 우진을 보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는 소연.
긴장이 풀려서인지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오는 우진이었지만, 그래도 얼굴은 밝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이지. 일단 가서, 오늘 하루 푹 쉬면 될 것 같아.”
“그래, 고생했어.”
그리고 잠시, 우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연이, 소심한 목소리로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어제오늘, 정말 멋졌어 오빠.”
* * *
영국에서의 남은 며칠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컨퍼런스가 끝난 26일 하루는 완전히 죽은 사람처럼 푹 누워서 보냈으며.
27일과 28일에는 제이든, 석현, 소연과 신나게 영국 관광을 했다.
이미 우진이 컨퍼런스에 참여하는 이틀 동안 신나게 놀고 있었던 제이든과 석현이었지만, 체력은 마지막 날까지도 남아도는 듯 보였다.
“우진, 내일은 해리포터 테마 파크에 갈까?”
“아니. 내일은 약속이 있어.”
“What? 영국에 친구라도 있었던 거야, 우진?”
“그럴 리가. 단지 마테오와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을 뿐이야.”
“그럼 나도 같이 가!”
“마테오에게 한번 물어봐는 줄게.”
“Holy! 우진은 역시 거짓말쟁이야.”
“또 뭐가.”
“제이든에게 이미 잘해주고 있다며.”
“……?”
“제이든을 위한다면 이미 말해뒀어야지!”
분노하는 제이든을 보며,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석현이랑 둘이 호그와트로 떠나버려.”
“Bloody Hell!”
11월 29일 화요일.
결국 영국에서 우진의 마지막 일정은, 다 같이 마테오의 초대를 받는 것이었다.
마테오는 통 크게 런던에서 유명한 씨 푸드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렸으며, 그곳에 브루노를 비롯한 많은 스페인 건축가들까지 초대한 것이다.
제이든과 석현 또한 함께 맛있는 저녁 식사를 했고, 그것으로 우진의 영국 관광은 아주 기분 좋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한국행 비행기가 예약되어있는 11월 30일.
영국에서의 마지막 날.
공항까지 데려다준 제이든의 부모님 덕에, 우진은 편하게 히스로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행기에 타기 전 우진은, 제이든의 가족과 공항에서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오랜만에 재밌는 일주일이었어요, 우진, 석현. 그리고 소연.”
수진의 인사에, 우진이 대답했다.
“저희야말로 두 분 덕에 편히 머물다 갑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이번에는 콜튼이 말했다.
“조만간 다시 봅시다, 우진.”
콜튼의 말에, 우진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이제 한국에 돌아가면 또 정신없이 밀린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런던에 또 올 일이 있을지조차 불투명했으니 말이다.
“조만간……이요? 언제 영국에 또 올 수 있을지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콜튼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와 수진은, 내년에 아마 다시 한국으로 들어갈 겁니다.”
“오……! 정말요?”
“그때까지만 우리 제이든을 잘 부탁드립니다.”
수진도 한 마디 덧붙였다.
“제이든 때문에 항상 걱정이 많았는데, 이렇게 든든한 친구들이 있어 정말 다행이에요.”
콜튼과 수진의 마지막 말에 제이든이 또다시 날뛰었지만,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네 사람은, 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우우우웅-!
달아오르는 비행기 엔진 소리를 들으며, 우진은 창밖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자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널따란 평야가 펼쳐진 런던의 풍경이, 우진의 망막에 고스란히 맺혔다.
런던에서 좋은 기억만을 남긴 우진은, 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 * *
벨로스톤즈의 대표 민주영은, 최근 들어 무척이나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2010년까지도 그녀의 사업은 꾸준히 확장되고 있었지만, 올해는 말 그대로 ‘물이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인천에 작게 차려두었던 사무실은 포화상태가 되어 서울에 새로 큰 사무실을 알아보고 있었으며.
한 달에도 두세 곳 이상의 새로운 업체들이 벨로스톤즈의 자재를 공급받기 위해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올해 코엑스에서 열렸던 리빙 페어에서, 성공적인 성과를 거둔 덕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올해 평범한 페어에서도 이렇게까지 큰 효과를 봤는데……. 내년은 정말 기대 좀 해봐도 되겠어.’
코엑스의 리빙페어는 국내 최대 규모의 인테리어 전시였지만, 그럼에도 ‘평범’하다고 한 이유는 12년도에 열릴 리빙페어의 규모 때문이었다.
국제적으로 수 많은 업체들과 바이어들을 초대하는 12년도의 리빙페어는, 지금까지 열렸던 어떤 리빙페어보다도 더 큰 규모였으니 말이다.
서울 디자인재단과 콘텐츠 진흥원은 물론, 새로 부임한 서울시장까지 물심양면으로 밀어주고 있는 행사였으니.
단순히 매년 주기적으로 열리던 페어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
‘못해도 올해의 세 배는 되는 규모일 거야.’
게다가 이 페어에서 벨로스톤즈는 무려 메인 부스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파급력이 얼마나 클지는 민주영으로서도 가늠할 수 없는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판이 더 커져 버렸어.’
그래서 민주영은 그녀의 인생에 온 이 어마어마한 기회를, 최대한 극대화시키기 위해 다방면으로 뛰는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품질 좋은 자재를 수급하고, 그것으로 다른 업체들에 제안해볼 수 있는 고급스런 디자인을 개발하고.
나아가 인테리어업계를 넘어 건축업계까지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더 많은 물량을 확보할 루트를 뚫어놓기 위해서 말이다.
이 모든 인프라를 구축하고 사업확장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벌어들인 모든 돈을 남김없이 투입해야 했지만, 민주영은 한 치 망설임도 없이 모든 것을 배팅하였다.
그녀는 지금껏 그렇게 사업을 확장해 왔으며, 그녀의 눈에 비친 이번 기회는 리스크조차 크지 않았으니까.
그녀에게는 여러 가지 믿는 구석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든든한 버팀목은 바로 우진과 WJ 스튜디오였다.
민주영은 이번 프로젝트에 우진을 끌어들인 것이, 정말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서 대표님 덕에 서울시 쪽이랑 커넥션도 더 단단해졌고……. 심지어 컨텐츠 산업까지도 연결고리가 생겨버렸으니까.’
우진에게 너무 고마운 주영은, 그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도 그녀는 새롭게 양질의 대리석을 공급받을 루트를 뚫기 위해, 이탈리아로 출국해 있었다.
정확히는 이탈리아 남부, 작은 도시의 채석장에 와 있었다.
“베르타(Berta), 반가워요. 메일로 인사드렸던 벨로스톤즈의 민주영이라고 합니다.”
주영의 이탈리아어 실력은, 완전히 현지인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그녀는 영어도 잘했지만, 이탈리아어를 훨씬 더 잘했다.
유학 생활을 워낙 오래 하기도 했으며 사업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유통사업이라는 것은 본래 필터가 하나 늘어날수록 마진이 줄어드는 것이 당연했고.
때문에 이태리 현지어를 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대리석 판로를 만드는 게 불가능했다.
“반가워요, 민 대표님. 메일은 잘 받아봤습니다. 이렇게 빨리 찾아오실 줄은 몰랐군요.”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번에 보내주셨던 샘플의 품질이 너무 좋아서,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왔지요.”
“민 대표님께선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이미 메일로 이야기는 대부분 된 상황이었기에, 주영은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담당자와 대화하였다.
코끝이 찡할 정도로 쓴 이태리의 에스프레소도, 이제는 완전히 적응한 그녀였다.
“그럼, 본격적인 물량을 받아내는 건, 내년 봄이 되야겠군요?”
“그렇습니다, 대표님. 저희도 생산량 확보가 덜 된 상황이어서요.”
“괜찮습니다. 그 정도면 일정은 충분히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도 기분 좋게 목적을 달성한 민주영은, 한국으로 귀국하기 위해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왕복만 수백만 원이 깨지는 비행기 표를 끊고 고작 이틀 머물렀다 가는 그녀였지만, 그 돈이 아까울 리는 없었다.
이렇게 현지의 거래처 한 곳 새로 뚫는 것은, 그 이상의 값어치를 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으, 피곤해……. 이제 한동안 출국 일정은 없는 게 다행이야.”
공항 라운지에서 출국 수속을 마친 민주영은, 게이트에 들어가기 위해 캐리어를 끌고 줄을 섰다.
긴 비행시간에 무료하지 않기 위해, 현지에서 잡지도 한 권 구매했다.
매달 건축과 인테리어의 트랜드를 소개하는, 주영이 애독하는 이태리 현지의 잡지 브랜드였다.
그녀는 매달 수많은 건축 잡지들을 보며, 스크랩하는 것이 취미인 사람이었다.
‘이번 달도 래퍼런스로 써먹을 만한 괜찮은 디자인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잡지를 한 장씩 넘기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 그녀는, 비행기에 올라 자리에 착석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어……?”
잡지 한 켠에 시선이 꽂힌 민주영의 두 눈이, 왕방울처럼 휘둥그레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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