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97화 (197/315)

197화

대미(大尾)

한국의 속담 중에,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이 비슷한 뜻을 가진 속담은, 당연히 영어에도 있다.

Teach a fish how to swim.

물고기에게 수영하는 법을 가르치다.

지금 단상위에 올라와 있는 우진을 보는 에단이 딱 그 짝이었고.

그래서 에단은, 점점 더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어제 하이드파크에서, 우진에게 했던 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학생, 디지털 건축이라는 건, 그렇게 간단한 분야가 아닐세.]

[그런 식으로 설계가 가능하다면, 전 세계 굴지의 건축가들이 대체 왜 수직 수평의 구조를 고집하겠는가.]

[건축디자인이란 현실적인 제약 안에서 최고의 아름다움을 뽑아내는 학문이라네. 그리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제법 큰 편이지.]

[가상의 공간 안에 3D프로그램으로 모델링을 한다고, 건물이 뚝딱 지어지지는 않거든.]

분명히 우진의 설명들을 들었을 때, 에단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 모든 설명들은 젊은 혈기에서 나온 치기 어린 몽상들이라고 말이다.

1970년대부터 건축을 해온 에단에게는 이미 건축이라는 분야에 대한 자신만의 확고한 틀이 있었고.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어린 동양인의 이야기만으로, 그 틀을 깨어버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애초에 에단은 우진을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얘기했기에, 그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들을 수 없었다.

우진과 대화할 때 에단은, 무조건 자신이 옳다는 대전제를 이미 깔아놓고 대화를 시작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여기 이 자리는 세계 최고의 건축가들이 모여 있는 EAC였고.

이 EAC는 에단이 가진 틀을 충분히 깨부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권위를 가지고 있는 행사였다.

그래서 에단은 말없이,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단상 위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 마테오의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게 가장 직관적으로 다가온 키워드는 바로 열정이었습니다.”

수많은 건축가들 앞에서도 일체의 위축됨 없이.

“축구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클라이언트의 열정.”

담담한 어조로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우진.

“그리고 그 축구라는 스포츠를 상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동감.”

우진은 에단으로서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말로 발표를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거의 동시에 통역되어 통역사의 목소리로 한 번 더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에너지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건축보다도 다이나믹한 실루엣의 파사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에너지를 스케치하여 하나의 파라미터(Parameter)로 적용한 패러매트릭 디자인이라면……. 그 어떤 건축디자인의 방법론보다도 훌륭히 이 키워드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금 수많은 세계적인 건축가들은, 우진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테오가 그 ‘열정’과 ‘생동감’을 스케치로 표현했다면, 저는 그 스케치를 알고리즘과 3차원 설계라는 매개체를 통해 풀어내는 역할을 담당한 셈이죠.”

우진은 마테오의 건축 프로세스를 소개하면서, 자연스레 패러매트릭 디자인의 방법론에 대한 설명을 곁들였다.

덕분에 패러매트릭 디자인이라는 장르가 생소했던 건축가들조차도, 그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명확한 래퍼런스를 보여주며 구조 하나하나에 적용된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머리에 쏙쏙 들어온 것이다.

“흠……. 이제는 하다못해 건축가가 프로그래밍까지 배워야 하는 시기가 온 건가…….”

“멋지군. 올해 컨퍼런스에 참석하길 정말 잘했어.”

“어떻게 저런 실루엣을 설계도로 뽑아낼 수 있었나 했더니……. 저런 비밀이 숨어있었군.”

이곳에 있는 건축가들의 실질적인 능력치와 실력을 떠나서, 2011년인 지금은 아직 패러매트릭 디자인이라는 장르가 모두에게 생소한 시기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우진의 발표 한 마디 한 마디는 파괴력 있는 것이었다.

우진이 이름 모를 어린 동양인 건축가라는 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 우진은, 마테오의 권위를 등에 업고 있었으니까.

한 차례 <올라스 페로시스(Olas feroces)>의 건축디자인 프로세스에 대한 설명이 끝난 뒤.

단상 위에 놓여있던 생수로 목을 축인 우진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떤 디자이너는, 툴을 단순한 도구의 개념으로만 생각합니다.”

시작부터 의미심장한 이야기에, 사람들의 눈에 흥미가 어렸다.

“툴을 다룰 줄 모르더라도 조형성을 볼 줄 아는 안목과 건축에 대한 이해만 있다면, 도구 정도는 충분히 대체 가능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죠.”

디자이너의 길을 걸은 사람들이라면.

그중에서도 높은 자리에 올라있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충분히 생각해봤을 법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우진이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혹시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 있습니까?”

잠시 뜸을 들인 우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

“과연 도구가 없었더라면,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생겨날 수 있었을까? 건축이라는 분야가 생길 수 있었을까?”

우진이 던진 생각지도 못했던 화두에, 사람들은 저마다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이어져 나올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디지털 건축과 3차원 설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단상 위에 올라온 사람이 꺼내 들은 이야기치고는, 꽤 생뚱맞은 측면이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도구를 사용할 수 있었기에 나무를 벨 수 있었고. 그 베어낸 나무들이 있었기에 그것으로 가구를 만들고 집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생뚱맞은 이야기는, 하나의 논점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도구가 정교해질수록 우리가 쓸 수 있는 재료들은 더 다양해졌고, 재료가 다양해질수록 건축의 가능성은 계속해서 더 커졌습니다.”

이제는 우진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조금씩 감이 오기 시작하는 사람들.

“우리는 오두막을 지을 수 있었기에 벽돌집을 생각할 수 있었고. 지어진 벽돌집을 경험할 수 있었기에 우리는 철골과 시멘트로 만들어진 집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한 차례 쭉 둘러본 우진이, 마른 침을 한 차례 집어삼킨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제가 여러분께 소개한 삼차원 설계와 스크립트를 활용해 설계된 패러매트릭 디자인은, 우리가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줄 것입니다.”

우진이 레이저 포인트를 꾹 누르자, 스크린의 화면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 스크린에는, 우진이 설계한 패러필드의 파빌리온 설계도가 떠올라 있었다.

“우리는 빛이 흘러가는 경로를 상상할 수 있지만, 그것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우진이 포인터를 한 차례 더 누르자, 그 설계도 위에 새하얀 빛의 물결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경로를 따라 점진적으로 펼쳐지고 뒤틀리는 이런 패턴을, 3차원의 공간에 한 땀 한 땀 그려낼 수는 없을 겁니다.”

우진이 보여준 생각지도 못했던 이미지에, 사람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그것은 그들이 감탄했던 <올라스 페로시스(Olas feroces)>와 비교하더라도, 전혀 부족함 없을 정도로 신선하고 멋진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는 알고리즘을 활용한 삼차원 설계라는 새로운 툴을 익힘으로써 지금까지 해보지 못했던 방식의 새로운 건축을 시도할 수 있었고…….”

이번에는 스크린 위에, 선으로 만들어진 도면의 이미지가 아닌 완전해진 조형물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지금껏 보지 못했던 조형성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름다웠다.

“저 젊은 동양인. 한국의 건축가라고 했나? 이름이 뭐지?”

“저기, Woojin Seo 라고 쓰여 있는 것 같군.”

“어떻게 저 나이에 이런 수준의 디자인을 할 수 있는 거지?”

“정말 대단하군. 컨퍼런스가 끝나고 나면, 연회장에서 대화를 한번 해보고 싶어.”

처음에는 마테오라는 거장을 등에 업었기에 이 무대 위로 올라올 수 있었던 우진이었지만.

그의 말이 한 마디 한 마디 이어질 때마다, 우진은 점점 커다란 그림자 밖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진이 가진 능력과 그릇이 결코 마테오라는 건축가의 그림자 안에 갇힐 만한 것이 아님을.

이 짧은 시간 안에 스스로가 증명해 내고 있는 것이다.

우진이 처음 단상 위로 올라올 때만 하더라도 디자이너들의 관심사가 마테오의 건축 프로세스에 있었다면.

이제 모두의 관심사는 오롯이 ‘우진’이라는 건축가에게 모여 있었다.

“어쩌면 나는, 너무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던 건축가였는지도 모르겠어.”

“나도 마찬가지야.”

그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이미 이런 경험을 한 번 해봤던 브루노는, 기분 좋은 미소를 베어 문 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 멋지군. 자존심 세고 고지식한 EAC의 건축가들을,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휘어잡은 프레젠테이션이라니.’

처음 SPDC에서 우진을 봤을 때부터 훌륭한 디자이너가 될 수 있는 원석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자신만의 모양새를 갖춘, 어엿한 건축가이자 디자이너가 된 우진이었다.

“저는 오늘 컨퍼런스에서 저의 이 멋진 경험들을 최대한 공유하고자 합니다.”

우진의 스승이자 우진만큼이나 이 분야에 열정이 있는 조운찬 또한, 감탄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기술적으로는 우진이 운찬을 아직 넘어설 수 없는 게 당연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운찬은 이 새로운 분야를 우진만큼 매력적으로 다른 건축가들에게 소개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우진의 오늘 프레젠테이션은, 운찬조차도 자극할 정도로 특별한 열정과 철학을 담고 있었다.

“대단한 녀석…….”

그렇게 모두가 감탄하는 사이, 우진은 준비했던 모든 것들을 쏟아 내었고.

어느새 우진에게 주어졌던 30분이라는 시간이 전부 지나갔음에도, 아무도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한 사람.

단상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던 영국의 노신사 에단만이, 유일하게 쓴웃음을 머금었을 뿐이었다.

‘나도 은퇴할 때가 된 것인가…….’

에단은 이제 눈을 질끈 감고 있지도,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지도 않았다.

물론 허탈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그 안에 이제 불쾌감 같은 것은 이제 남아있지 않았다.

에단은 아직까지도 단상 위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는 우진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과분하게도 저를 EAC라는 훌륭한 행사에 초대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에단과 눈이 마주친 우진의 얼굴은, 빙긋 웃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제가 여러분께 공유한 이 경험들이, 더욱 멋지고 아름다운 소스가 되어 제게 되돌아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2011년 11월 25일 금요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오늘의 컨퍼런스에서.

우진은 ‘디자이너 서우진’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처음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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