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94화 (194/315)

194화

짧지만 강렬한

영국의 건축가 에단 클라크(Ethan Clark)는, 런던 출신의 명망 있는 건축디자이너였다.

영국 왕립 건축가 협회(RIBA)의 이사장이자, 영국 최고의 건축 아카데미인 AA스쿨의 명예교수.

선대에서부터 클라크(Clark) 가문은 건축가의 가문이었고, 에단 클라크 또한 런던에만 수많은 건물을 직접 디자인하고 설계했으니.

에단은 영국 건축업계에서는 꽤 이름 있고 권위 있는 건축가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 건축업계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것과 별개로, 그가 브루노처럼 스타 건축가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수많은 설계와 디자인을 했지만, 그중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생긴 건축물은 아직 없었으니까.

그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꾸준한 건축가’라고 할 수 있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아직까지 현역에서 활동하며 건축을 하고.

스타성 있는 최고의 건축을 보여주지는 못할지언정, 언제나 평균 이상의 뛰어난 건축을 해내는 사람.

항상 건축 디자인에 임함에 있어서 기본을 강조하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영국의 많은 후배 건축가들에게 존경받는 사람.

에단 클라크는, 그런 건축가였다.

[교수님, 컨퍼런스에는 오시죠?]

“물론이네. 당연히 가야지. 얼마 만에 런던에서 열리는 컨퍼런스인가.”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교수님.]

“허허. 그러도록 하세.”

그리고 AA스쿨의 명예교수인 만큼, 에단 클리크는 당연히 내일 열리게 될 EAC(Europe Architecture Conference)에도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유럽 어디에서 열리든 항상 컨퍼런스만큼은 참석하던 그였으니.

코앞이나 다름없는 런던, 게다가 그가 십 년 이상 교수로 있었던 AA스쿨에서 열리는 컨퍼런스에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용무는 그뿐이 아니었다.

최근 그의 스튜디오에서 하이드파크에 파빌리온 프로젝트를 하나 진행 중이었고, 이제 곧 완공이 며칠 남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겸사겸사 하이드파크에도 한번은 들러야 했다.

[영국 건축계의 거장 ‘에단 클리크’의 파빌리온. 런던 하이드파크에, 11년 11월부터 전시.]

[하이드파크 서펜타인 호수에 설치되는 '마스타바'는, 에단 클리크가 런던의 야외 공공장소에 선보이는 첫 파빌리온이다.]

[8천 개가 넘는 철제 육면체와 그 세 배가 넘는 숫자의 길고 짧은 철봉을 연결하여 만들어지는 대형 파빌리온이며…….]

사실 하이드파크의 파빌리온은, 에단 클리크가 직접 설계한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그의 스튜디오에 함께 근무하는 후배 건축가들이 진행한 프로젝트였는데, 어쨌든 그의 손도 닿았고 프로젝트의 주체가 그의 스튜디오였으니.

기사에는 가장 먼저 에단 클리크의 이름이 걸린 것이다.

‘사진으로는 괜찮았는데, 실물은 어떤지 한 번 봐야지.’

그래서 에단은 오늘 하이드파크에 왔다.

컨퍼런스가 열리기 하루 전.

미리 숙소도 잡을 겸 해서 런던에 먼저 도착한 것이다.

하이드파크에 들어서자, 자신의 후배들이 설계한 파빌리온이 멀찍이 서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에단은 흡족한 미소를 띄고 그곳을 향해 걸었다.

웬 어린 동양인들의 대화가 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자세히 보니까 철봉이 이어진 패턴이, 무슨 벌집처럼 생겼다. 그지?”

“맞아. 이거 하나하나 전부 다 따로 설계한 것 같은데……. 누가 설계했는지는 몰라도 노가다 엄청 하셨겠는걸?”

두 동양인 남녀는 에단이 모르는 언어로 열심히 대화했다.

‘중국인인가? 아니, 중국의 억양은 아닌 것 같고……. 일본?’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지나치려 했었다.

파빌리온을 보며 열심히 떠들고 있었지만, 그저 건축에 관심이 많은 평범한 학생들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들인가? 좋을 때로군 좋을 때야.’

하지만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는, 잠시 후 다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크기가 전부 다른데, 당연히 하나씩 따로 설계해야 하는 것 아냐?”

“지금 모형대로라면 그렇긴 한데, 알고리즘으로 짜서 만들면 조금 모양이 달라지겠지만 비슷한 느낌을 연출할 수 있어.”

“아, 그 오빠랑 제이든이 요즘 공부하던 그래스하퍼로?”

“맞아. 그거지.”

대화 자체는 당연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전문적인 건축용어들이 두 사람의 입에서 계속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흠…….’

그래서 일부러 그 근처로 걸음을 옮겨 다가가던 에단은, 결정적으로 두 사람에게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

둘이 단순히 파빌리온을 감상하는 줄 알았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 어떤 품평을 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특히 두 사람 중 남학생은, 파빌리온 내부 구조를 향해 손짓까지 해 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언어는 알 수 없는 것이었지만, 건축 관련 용어들을 꺼내 들며 구석구석 가리키는 것만 봐도 충분히 그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어린 친구들이 겉멋만 잔뜩 들어가지고는…….’

특히 그래스하퍼와 패러매트릭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에단의 기분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삼차원 설계에 대한 부분은 에단의 스튜디오에서도 이제야 막 R&D를 시작한 최신 트랜드이자 하이테크 설계기법이었는데.

딱 봐도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어린 동양인 남자가 그런 이야기들을 떠들자, 신경이 거슬린 것이다.

사실 이번 파빌리온을 제작하면서 에단의 스튜디오에서도 일부분이지만 삼차원 설계기법을 사용했는데, 결과물이 크게 다이나믹하지 않아서 아쉬웠던 참.

에단은 이 어린 동양인 청년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인지 몹시 궁금해졌다.

그래서 에단은, 슬쩍 그들에게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 실례합니다만…….”

에단이 말을 걸자, 두 남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혹시 두 사람, 건축디자이너입니까?”

두 사람이 영어를 할 줄 모른다면 그냥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단의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곧바로 여자가 대답하였다.

“건축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입니다만. 혹시 무슨 일이신지요?”

에단의 주름진 두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 * *

자신을 에단 클리크라고 소개한 이 영국의 노신사는, 아무래도 뭔가 불만이 있는 모양이었다.

우진은 그의 말을 절반 정도만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눈치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여기서 떠들어댄 게 기분이 나빴나?’

유럽이 인종차별이 많다는 이야기는, 과거에도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처음 노신사가 말을 걸었을 때, 백인우월주의가 있는 꼰대 할아버지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잠시 후.

소연의 도움을 통해 그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자,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영국의 노신사는, 이름은 들어본 적 없지만, 영국의 건축가인 듯했다.

“우진이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그는 우진에게, 가장 먼저 패러매트릭 디자인에 대해 물어봤다.

“우진은 3차원 설계와 패러매트릭 디자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에단의 질문에 우진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지만, 아는 대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설명의 매개체는, 바로 옆에 서 있는 철제 파빌리온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디자인을 했을 거다.

알고리즘을 활용하면 이런 구조를 더 정교하고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우진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노신사의 표정은 점점 더 나빠졌다.

“학생, 라이노 프로그램은 만능이 아닙니다.”

“그렇기는 하죠.”

“지금까지 건축을 하면서, 그런 방식으로 설계를 한 사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군요.”

“음……. 아직은 딱히 없으려나요?”

우진의 반응에, 노신사는 더욱 열을 올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눈앞의 이 건축물이 사실 네가 말하는 바로 그 패러매트릭 디자인이 쓰인 작품이며, 어떤 방식으로 구조설계가 이뤄졌는지.

그리고 현실적으로 우진이 말한 방식의 설계들은, 시공 과정에서 수 많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될 것이라는 사실들까지도.

그 이야기들을 조용히 듣던 우진은, 조금 놀라기는 했다.

처음에는 그저 그런 평범한 건축가라고 생각했는데, 말하는 이야기들에는 제법 깊이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진이 보기에 이 에단 클리크라는 건축가는, 과거의 방식에 매몰되어있는 발전 없는 건축가일 뿐이었다.

“뭐, 어떻게 말씀하시든, 저는 이미 그런 방식으로 설계를 하고 있고, 실제로 시공에 들어간 프로젝트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진의 말에, 에단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그가 허세를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학부생 정도로 보이는 녀석이 패러매트릭 디자인을 접목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고, 심지어 그런 프로젝트를 여러 개 가지고 있다고?’

에단은 그가 옆의 예쁘장한 동양인 여자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허세를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숨이 푹 나왔다.

어린 마음에 그러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철없는 동양인과 이렇게 오래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이 갑자기 시간이 아깝고 후회가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처음 그에게 말을 건 것은 약간의 불편한 기분과 호기심 때문이었지만.

원래 이렇게까지 오래 이야기를 나눌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진이 생각보다 디지털 건축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아 이렇게 열까지 올리면서 오래 대화를 하게 됐던 것인데.

결국 허세 가득한 어린 동양인의 헛소리였다고 생각이 들자 기분이 상한 것이다.

그래서 에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실망한 표정으로 걸음을 돌렸다.

“잘 알겠습니다, 우진. 당신이 이야기한 대로 그래스하퍼를 활용할 수 있다면, 정말 멋진 조형성을 가진 프로젝트겠군요.”

“결국 알고리즘을 잘 짜더라도 그것은 툴일 뿐, 건축물의 조형성을 결정짓는 것은 디자이너의 설계에 대한 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제 프로젝트를 보고 싶으시다면, 내일 이후 EAC의 홈페이지를 확인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AA스쿨에서 열릴 그 EAC를 말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에단.”

우진의 입에서 EAC까지 나오자, 에단은 어이없는 것을 넘어 기가 차기 시작했다.

“당신이 EAC에 참석하신다는 건가요?”

“짧게나마 제 프로젝트를 소개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EAC에 참석 자격을 가진 동양인 건축가가 스무 명도 채 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단순히 참석을 넘어 발표까지 한다고 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좋습니다. 그럼 내일 뵐 수 있겠군요.”

에단의 말에, 이번에는 우진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에단도 EAC에 참석하시나요?”

에단이 EAC에 초대받았을 정도로 인지도 있는 건축가라고 생각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를 무시했다기보다, 하이드 파크 한복판에서 그만큼 인지도 있는 건축가를 마주쳤을 것이라고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럼 내일 뵐 수 있겠군요.”

“꼭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뼈가 있는 에단의 말에, 우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 영국의 건축가는, 분명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에단 클리크가 걸음을 돌려 떠나자, 우진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 할아버지, 왜 저래?”

기분 나쁜 표정이 된 소연의 물음에, 우진도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글쎄. 모르겠네. 좀 오지랖이 넓으신 분인 듯.”

“저 할아버지도 내일 컨퍼런스에 오는 거야?”

“아마 그렇겠지?”

“으, 별로 다시 보고 싶지 않은데…….”

그리고 생각했다.

‘내일 정말 제대로 준비해서 보여줘야겠네.’

원래도 대충 발표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우진은 더욱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비단 저 에단 클리크라는 사람뿐 아니라, 자신을 무시하는 건축가가 컨퍼런스에 또 있을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괜히 여기서 떠들다가 기분만 상했네. 다른 데로 가자 소연아.”

“그, 그래. AA스쿨 가보고 싶다고 했지? 그쪽으로 갈까?”

“좋아.”

해서 소연과 런던을 한 바퀴 돌아본 뒤 제이든의 집으로 돌아온 우진은, 노트북을 켜고 발표 자료들을 다시 한 차례 정비하기 시작했다.

이미 한국에서 수십 번도 넘게 검토하고 읽어본 PPT였지만, 더욱 완벽을 기하기 위해 다시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해가 지고 난 뒤 제이든과 석현이 돌아왔고, 제이든의 집 앞마당에서는 바비큐 파티가 시작되었지만.

방에 틀어박힌 우진은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드디어 하루가 지나, 컨퍼런스 당일의 아침이 밝았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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