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Europe Architecture Conference
당연한 얘기겠지만 영국과 한국은 참 다른 점이 많은 나라이다.
특히 런던 땅을 처음 밟았던 우진이 가장 먼저 느꼈던 것은, ‘산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서울 어디에서도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높게 솟아있는 산을 볼 수 있는 게 서울이었는데, 영국은 그야말로 널따란 평원이었다.
북한산의 웅장하고 멋들어진 산세도 분명 아름다웠지만, 끝없이 펼쳐진 평야의 개방감도 가슴이 탁 트이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해외 나온 느낌이 난단 말이지.’
그리고 우진이 두 번째로 느낀 것은, 도로에서 느껴지는 감성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번쩍거리는 커튼월 룩의 빌딩들이 즐비한 서울과 달리, 현대적인 디자인의 건물들과 근현대 중세풍의 건물들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도시가 런던이었다.
꼭 런던의 거리가 서울보다 아름답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확연히 다른 운치가 있는 풍경이라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지하철은 가능한 타지 말아야겠어. 런던이라는 도시의 풍경을 최대한 두 눈에 많이 담아가야지.’
그래서 우진은, 과감히 지출(?)을 좀 하기로 하였다.
괜찮은 자동차를 한 대 렌트하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 제이든의 집 근처에 꽤 큰 자동차 렌트 매장이 있었고, 우진은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살짝 당황한 소연이 우진에게 물었다.
“오빠, 여기서 운전하려면 국제면허 같은 거 있어야 하는 것 아냐?”
“당연하지. 미리 준비했어.”
“올……!”
우진이 차까지 렌트하러 들어가자, 소연의 얼굴에 은근한 기대가 어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데이트였지만, 시작부터 나쁘지 않았으니 말이다.
매장 안으로 들어간 우진이, 잠시 여기저기 기웃거리더니 차를 선택했다.
“음, 이 차가 좋겠어.”
우진이 고른 차는, 제이든이 한국에서 태워줬던 적 있던 벤츠 E클래스.
그 차를 잠시 보던 소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우진에게 물었다.
“이거, 제이든이 가끔 몰고 나오던 차랑 같은 거 아냐?”
“맞아. 그때 타보니까 편하더라고.”
“뭐, 편하기야 하던데…….”
우진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바로 옆에 전시되어있는 오픈카도 꽤 끌리긴 했지만, 평소 영락없는 보수적인 성향의 40대(?)였던 우진은 선뜻 손이 가질 않은 것이다.
“사실 저걸 타볼까 했는데, 오픈카를 타기엔 좀 뭔가 얼굴이 팔리는 느낌이랄까.”
우진의 변명에, 소연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런던 사람들은 아무도 오빠 얼굴에 관심 없을걸?”
“그래도.”
“게다가 랜트 가격도 큰 차이 없는데…….”
“아무튼 이 차로 할 거니까, 직원한테 얘기나 좀 해줘.”
“칫.”
입을 삐죽 내민 소연은, 근처에 있던 여직원을 불러 유창하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입을 여는 소연의 표정에는, 묘하게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벤츠 E클래스, 카브리올레로 해주세요. 색상은…… 블랙으로요.”
“알겠습니다, 고객님. 여기 이 차 말씀하신 것 맞죠?”
직원이 오픈카를 손으로 짚으며 확인차 묻자, 소연이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앗, 맞긴 한데, 티 내지 말아주세요.”
“왜요?”
“사실 오빠는 E클래스 세단을 빌리자고 했거든요.”
소연은 우진이 오픈카 앞에서 꽤 오래 머뭇거리는 것을 봤다.
딱히 차에 관심이 있거나 좋아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왠지 오늘은 기분을 좀 내고 싶기도 했고.
우진도 결국에는 좋아할 선택지라고 생각해서 장난을 좀 친 것이다.
“아하.”
멀뚱히 서 있는 우진을 힐끔 본 직원이, 장난스레 웃으며 다시 말했다.
“애인분이 영어를 잘 못 하시나 봐요?”
애인이라는 말에 소연은 살짝 움찔했지만, 굳이 그것을 정정해 주지는 않았다.
기분이 조금 묘하긴 했지만, 그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으니까.
“아마도요……?”
“후훗, 알겠습니다. 서류 금방 작성해서 가지고 나올게요.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그렇게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직원과 작당 모의를 한 소연은, 아주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직원의 안내에 따라 얼떨결에 오픈카에 올라탄 우진은, 떨떠름한 표정이 되어 소연에게 물었다.
“뭐야, 분명히 E클래스를 빌렸었잖아?”
소연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러게. 분명히 이클래스 달라고 했는데, 이걸 줬네? 오빠도 들었지?”
“그, 그랬던 것 같은데…….”
소연과 직원의 대화를 어중간하게 이해한 우진은, 이것이 소연의 음모(?)라는 것을 까맣게 몰랐다.
어쨌든 직원이 내온 차도 E클래스 카브리올레였으니, 뭔가 소통 과정에서 착각이 생겼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도 운전대를 잡고 매장 밖으로 나서자, 기분이 좋아지는 우진이었다.
전면 창을 제외하면 뻥 뚫려있는 벤츠 카브리올레는, 지금껏 차를 운전하면서 느껴보지 못한 개방감을 주는 것이었으니까.
‘확실히 기분이 더 나는 것 같기는 하네.’
그렇게 무려 벤츠 오픈카를 빌린 우진은, 소연과 함께 하이드 파크로 향했다.
* * *
제이든의 집이 있는 켄싱턴의 바로 북측.
어지간한 하나의 동(洞)만큼 커다란 크기를 자랑하는 하이드 파크(Hyde Park)는, 왕립 공원이자 영국 런던의 중심부에 있는 가장 큰 공원 중 하나였다.
서울의 공원과 비교하자면, 일반적인 작은 공원이 아닌, 커다란 넓이를 자랑하는 서울숲과 비슷한 느낌.
켄싱턴 가든(Kensington Gardens) 남쪽의 대로를 따라 운전해 올라온 우진은, 인근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거대한 정원의 입구로 들어섰다.
소연이 가고 싶다 했던 하이드 파크는 서펜틴 호수(Serpentine Lake)를 중심으로 켄싱턴 가든과 이어져 있었는데, 어차피 오늘 시간도 많았으니 천천히 아래쪽부터 둘러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처음 이곳에 들어선 우진과 소연이 느낀 것은, 넓지만 그만큼 사람도 많다는 것이었다.
“와, 평일 오전인데 사람 왜 이렇게 많아?”
소연의 탄성에, 우진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다들 관광객이겠지.”
“음, 그런가?”
“그래도 진짜 사람 많긴 하다. 공원이래서 좀 여유롭고 한산한 느낌을 기대하긴 했었는데.”
“그러게.”
공원을 가로지르는 큰길을 따라 나란히 걸은 두 사람은, 곧 공원 한복판의 커다란 호수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호수를 발견한 소연은, 우진의 손을 잡아끌어 옆길로 빠져나왔다.
“여기 길 알아?”
“아니. 그냥 호숫가를 따라서 걷고 싶어서.”
“아하.”
“이쪽은 사람도 좀 없는 것 같고. 운치도 있고.”
“좋아. 그러지 뭐.”
호숫가를 따라 걷자, 켄싱턴 가든과 하이드 파크의 다양한 조형물들이 우진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재밌는 것은, 다양한 동물들이 무척이나 많다는 점이었다.
중세 고딕풍으로 지어진 작은 쉘터들과, 기하학적인 형상을 한 아름다운 조형물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자연스레 어우러져 있는, 작은 새들과 다람쥐들.
결국에는 인공적으로 설계된 공원이겠지만, 자연과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꽤 인상 깊게 느껴진 우진이었다.
저벅- 저벅-
소연과 나란히 걷던 우진은, 문득 옆에 걷는 그녀의 옆모습을 슬쩍 응시하였다.
제이든만큼은 아니지만 활달하게 말 많은 편인 그녀가 조용하게 있으니, 문득 궁금해진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우진의 물음에, 소연이 어깨를 으쓱하였다.
“그냥. 날씨도 좋고. 풍경도 좋고. 오랜만에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아서.”
소연의 대답에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우진 또한 아주 잘 느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게. 날씨 진짜 예술이네.”
물론 런던에 온 것도 관광목적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일 생각을 내려놓고 한가로이 걷다 보니 마치 짧은 휴가라도 나온 듯한 기분.
‘이렇게 마음 편히 산책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한국과 달리 흐린 날이 많은 런던이었지만, 오늘은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푸르고 맑은 하늘이었다.
그리고 그런 우진의 기분을 느낀 것인지, 소연이 소매를 슬쩍 잡아당기며 물었다.
“여기 오길 잘했지?”
“아니라고 할 수가 없네.”
“히히.”
“그런데 넌, 하이드 파크에 왜 와보고 싶었어?”
“작년에 교양과목 교수님께 들은 적이 있었거든.”
“음?”
“영국에서 유학하던 분이셨는데, 한창 유학생 시절에 힘들 때마다 하이드 파크에서 위안을 얻으셨었대.”
“아하.”
“호숫가를 따라 걷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힘이 나셨다나?”
“그렇구나.”
“뭐, 그냥 그때 들었던 얘기가 생각나서, 한번 와 보자고 한 거야.”
“잘했어. 어디 관광지나 가 봐야, 사람만 미어터지지 뭐.”
서펜턴 호수는 길쭉한 방향으로 수평선이 보일 정도로 널따란 호수였다.
관광객에게 보트를 빌려주는 보트 대여 시설이 한 켠에 있을 정도.
그래서 두 사람은 호숫가를 따라 꽤 오래 걸어야 했고, 그렇게 걷다 보니 호수 가에서 커다랗게 설치된 조형물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조형물은, 지금까지 봤던 다른 조형물보다 우진의 시선을 더 크게 끄는 것이었다.
‘파빌리온이잖아?’
하이드 파크 안에 설치되어있던 다른 조형물들이 설치미술에 가까운 조형물들이었다면, 지금 두 사람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조형물은 건축적인 성격을 띈 파빌리온에 가까운 것이었던 것.
소연도 관심이 동했는지 그쪽을 향해 걸음을 틀었고, 두 사람은 더 가까이서 그것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와, 가까이 오니까 더 크네?”
“그러게? 오빠가 패러필드에 디자인한 파빌리온이랑 거의 비슷한 크기겠는걸?”
멀리서 볼 때에는 커다란 원형 타워 느낌이었던 파빌리온은, 가까이 다가가자 또 다른 느낌을 우진에게 주었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던 특이한 구조설계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크고 작은 수많은 크기의 육면체를 철봉으로 연결하여, 가까이서 올려다볼 때에는 마치 거미줄처럼 또 다른 느낌의 패턴을 연출하는 파빌리온.
최근 패러필드에 설치할 파빌리온의 구조체를 고민 중이던 우진으로서는, 공원 한복판에 설치된 이 거대한 파빌리온이 흥미롭게 느껴지는게 너무 당연했던 것이다.
“자세히 보니까 철봉이 이어진 패턴이, 무슨 벌집처럼 생겼다. 그지?”
“맞아. 이거 하나하나 전부 다 따로 설계한 것 같은데……. 누가 설계했는지는 몰라도 노가다 엄청 하셨겠는걸?”
우진의 이야기를 듣던 소연이, 흥미로운 표정이 되어 우진을 향해 물었다.
“크기가 전부 다른데, 당연히 하나씩 따로 설계해야 하는 것 아냐?”
“지금 모형대로라면 그렇긴 한데, 알고리즘으로 짜서 만들면 조금 모양이 달라지겠지만 비슷한 느낌을 연출할 수 있어.”
“아, 그 오빠랑 제이든이 요즘 공부하던 그래스하퍼로?”
“맞아. 그거지.”
“서울숲에는 파빌리온 설치할 만한 곳 없나? 한번 WJ 스튜디오도 이런 작업 해보는 건 어때?”
“흐흐, 기회만 생기면 바로 하지. 다음에 시장님 만나 뵐 일 있으면 한번 여쭤보기나 할까?”
“시장님이 오빠를 왜 만나냐?”
“내년에 프로젝트 진행하다 보면 한 번쯤은 뵐 일 있지 않을까?”
“그런가?”
뜻밖에 만난 전문 분야에 조금 흥분(?)한 우진은, 파빌리온의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신이 나서 설명을 계속했다.
이 웅장한 파빌리온의 구조를 하나하나 뜯어보다 보니, 여기저기 아쉬운 부분이 보이면서도 새로운 영감을 많이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때 아닌 열띤 토론(?)은, 그렇게 오래 이어질 수 없었다.
두 사람의 근처로 다가온 누군가가, 우진의 말을 끊으며 불쑥 나타난 것이다.
“저기, 실례합니다만…….”
대략 예순쯤 되었을까?
짙은 회색빛의 넉넉한 수트를 입은, 까만 중절모의 한 노신사.
그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우진은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고.
그런 그를 향해 노신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두 사람, 건축디자이너입니까?”
노신사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우진은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이 살짝 굳어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