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Europe Architecture Conference
제운그룹은 SH그룹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분야에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 기업 그룹이었다.
SH그룹이 반도체 분야에서 한국 최고의 기업으로 꼽힌다면, 제운그룹은 자동차, 건설 분야에서 최고의 기업으로 꼽히는 기업.
물론 건설 쪽이야 SH물산에게 역전당하게 될 예정이지만,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러했다.
‘역전된 후에도, 계속 도급순위 상위권은 지키는 회사가 제운건설이고…….’
인천공항 주차장에서 쉬고 있는 우진의 차도, 바로 제운자동차 브랜드의 것이었다.
석현이나 제이든은 우진이 산 차를 보고 실망(?)했었지만.
우진은 구매 이후 단 한 번의 잔고장도 없이 아주 만족감 높게 타고 있는 차가 바로 제운자동차의 중형 세단이었던 것이다.
제운건설이 아슬아슬한 업계 1위라면, 제운자동차는 압도적인 업계 1위의 기업인 것.
하지만 대략 5~7년 전쯤만 하더라도, 제운건설은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지 않았다.
건설업계와 마찬가지로, 다른 기업들과 비슷한 수준에서 상위권을 지키는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제운그룹의 자동차가 급격히 1위로 부상하게 된 계기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05년도 제운자동차의 신 모델 출시였다.
제운자동차가 아예 <크로노스>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하나 런칭하면서, 유럽의 프리미엄 자동차와 경쟁하기 위해 새로 출시한 모델.
크로노스는 우진이 샀던 중형 세단보다 체급도 작으면서 더 비싼 가격에 출시되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시도는 무척이나 성공적이었다.
크로노스의 첫 모델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얻게 되었고, 그것이 제운자동차가 급부상할 수 있었던 발판을 마련해 주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 우진의 눈앞에는, 이 <크로노스>라는 브랜드를 성공시킨 가장 유명한 주역이 앉아 있었다.
영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유명한 자동차 디자이너이자, 크로노스의 첫 모델을 처음부터 끝까지 디자인한 총괄 디렉터.
영국의 유명 자동차 브랜드 ‘재규어’의 수석디자이너 출신으로, 제운자동차에서 영입하여 파격적으로 부사장 자리에 앉혀 이슈가 됐었던.
천재적인 자동차 디자이너 콜튼 테일러(Colton Taylor)가, 바로 제이든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물론 우진이 콜튼의 얼굴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이름을 들은 순간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라고 느껴졌고.
자동차 디자이너라는 이야기까지 듣게 되자, 머릿속에 번개같이 떠오른 것이다.
‘제이든의 아버지가 콜튼이었다니…….’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제이든이 어째서 한국에서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나오게 되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콜튼 테일러가 처음 제운자동차에 영입됐던 해가 제이든이 고등학교를 입학하던 때였고.
지금은 영국에서 일하고 있을 지언정, 언제든 다시 한국으로 발령 날 수 있는 사람이 콜튼 테일러였으니 말이다.
우진이 알기로 콜튼은, 몇 년 뒤에 무려 제운자동차의 사장 자리까지 올라가게 되는 인물이었다.
‘부자일 만 했네. 제운에 영입되기 전에도 영국에서 디자이너 연봉으로만 수억 단위를 받던 사람일 테니…….’
그리고 한 가지 더.
결정적으로 우진이 콜튼과의 만남을 놀랍고 반갑게 여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미래에 디자인하게 될 제운자동차의 또 다른 신형 모델 때문이었다.
콜튼은 사실 2020년 즈음에 더 유명해지게 되는데.
그때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줬던 크로노스 브랜드의 신모델이, 지금 우진이 건축에 접목시키기 위해 연구 중인 패러매트릭 디자인이 적용된 디자인이었으니 말이다.
건축디자인과 운송디자인은 완전히 다른 카테고리의 디자인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콜튼과의 만남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당신이 우진이군요.”
“저를 아시나요?”
“하하, 제이든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많이 들었지요.”
“아…….”
“반갑습니다, 우진. 드디어 제이든의 Boss를 만나 보게 되다니, 이거 꽤 신나는군요.”
콜튼은 제이든보다도 훨씬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했다.
약간의 미묘한 발음만 아니라면, 거의 한국인으로 느껴질 정도.
그는 제이든의 어머니인 수진과 연애할 때부터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했었다고 했다.
정확히는 수진에게 고백하기 위해, 처음 한글을 배웠다고 했다.
그리고 제이든과 비견될 정도로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콜튼, 혹시 TMI가 뭔지 알아요?”
“흠. 글쎄요. 처음 듣는 용어입니다만…….”
“아 누군가 이런 말을 쓰는 것 같길래, 혹시 아시나 해서 물어봤어요.”
“그렇군요.”
차마 콜튼에게 투 머치 인포메이션이라고 할 수는 없었던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이든이 20년 정도 더 나이를 먹는다면, 딱 눈앞의 콜튼이 될 것 같은 느낌.
그래도 콜튼과의 대화는, 흥미로운 것이 더 많은 편이었다.
그가 한국어로 수진에게 어떻게 고백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지만, 디자인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꽤 재밌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콜튼이 제운자동차의 그 콜튼이었다니……. 정말 놀랍군요. 사실 제 첫차를 주문할 때, 크로노스를 주문할지 꽤 오래 고민했었거든요.”
“후후. 크로노스의 디자인에 아쉬운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최선의 디자인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제이든은 왜 크로노스를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을까요?”
“음……?”
“크로노스는 디자인이 별로니까 다른 차를 사라고 제이든이…….”
우진의 고자질(?)에, 콜튼의 고개가 휙 하고 돌아갔다.
“제이든.”
“우진은 비겁해.”
“제이든이 비겁하지.”
“Daddy. 전 사실을 말한 것뿐이라고요.”
“크로노스의 디자인은 훌륭해.”
“Daddy가 한국에 버리고 간 벤츠가 더 훌륭하죠.”
“그럴 리가.”
시작은 유쾌한 농담이었지만, 결국 디자인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 대화의 양상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콜튼, 오래전에 크로노스의 컨셉 카를 기사로 봤던 적이 있었는데, 그 파격적이고 멋진 디자인들이 왜 다 빠질 수밖에 없었을까요?”
“오, 우진. 건축에서도 그렇겠지만, 디자인은 항상 변화와 익숙함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 한답니다.”
“균형이라면…….”
“사람들은 항상 멋진 컨셉카의 디자인에 열광하지만, 그 차를 실제로 구입하지는 않아요.”
“어째서죠?”
“자동차는 조형물이 아니기 때문이죠.”
“음…….”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콜튼이, 빙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익숙하다는 건 다른 말로 검증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경청하겠습니다.”
“컨셉카는 일부 사람들에게 100점의 디자인 점수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50점 미만의 점수를 받을 수도 있죠. 하지만 익숙함과 새로움의 경계에서 디자인해 낸 크로노스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80점 정도를 받을 수 있는 자동찹니다.”
“대중성이라는 거군요.”
콜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파격적인 변화를 조금 더 주고 싶었지만, 사업부에서 꽤 여러 번 반려 당했습니다.”
“그래요?”
“이런 디자인으로 출시한다면, 한국에서 40대 이상의 고객을 대부분 포기해야 한다면서 말이죠.”
“아하.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쉽네요.”
“하지만 사업부의 판단이 결국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크로노스는 성공했고, 지금도 40대보다는 2,30대에게 더 인기 있는 자동차니까요.”
건축디자인과 자동차디자인은 다른 분야지만, 디자인이라는 공통분모는 확실하게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우진은 콜튼과의 대화에서, 꽤 많은 부분 인사이트를 느끼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건축은 자동차보다 좀 더 파격적일 수 있겠네요.”
“그런가요?”
“건축디자이너는 건축주 한 사람을 만족시키면 되지만, 자동차 디자이너는 다양한 취향을 가진 대중을 만족시켜야 하거든요.”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오십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아직까지 꿈을 꾸는 특별한 콜튼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언젠가 한 번 제 디자인 철학을 담은 건축에도 한 번 참여해 보고 싶군요.”
“오, 건축디자인에도 관심이 있으신 건가요?”
“제가 직접 디자인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럼……?”
“크로노스의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가진 디자인 건축물이 하나 지어져도 재밌겠다 싶어서요.”
“오호.”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아파트를 짓는 겁니다.”
우진이 콜튼의 말을 이었다.
“예를 들자면, 멋들어진 리버 뷰나 오션 뷰와 함께, 거실에 슈퍼 카를 전시해놓을 수 있는 그런 아파트 말인가요?”
“빙고. 바로 그겁니다. 내가 돈을 더 많이 번다면, 한강 앞에 그런 아파트를 하나 짓고 싶군요. 어쩌면 WJ 스튜디오에 의뢰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하.”
초롱초롱한 그의 눈동자를 보며, 우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콜튼이 꿈꾸는 그런 아파트가 곧 지어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진은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미국의 플로리다 주였나. 포르쉐 디자인 타워가 몇 년 지나면 지어질 테지.’
포르쉐 자동차의 디자인 스타일을 이어받아서, 굿즈의 영역을 넘어 다양한 분야에서 제품을 개발하고 디자인하는 회사인 포르쉐 디자인.
그곳에서 미국의 부동산 개발 회사와 협력하여 플로리다 해변가에 짓게 될 <포르쉐 디자인 타워>가, 우진이 얘기했던 그런 꿈같은 일들을 조만간 현실화 한다.
자신의 자동차를 전용 엘리베이터를 통해 집 거실까지 끌고 들어갈 수 있는.
그래서 멋진 플로리다의 오션뷰와 함께 자신의 차를 거실에서 감상할 수 있는, 그야말로 자동차 매니아들을 위한 아파트.
‘그게 2017년쯤 지어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전에 내가 먼저 지어 볼 수 있으려나?’
우진은 뜻밖에 만나게 된 콜튼 덕분에, 평소에 생각해보지 못했던 특별한 부분들을 또 고민해볼 수 있었다.
콜튼은 전생을 포함해도 우진보다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 어떤 젊은이보다 열정적이고 도전적인 디자이너였다.
“딱 2년 뒤에 다시 얘기하죠, 콜튼.”
“뭘 말입니까? 아……! My dream house?”
“한남동 한강 변에 그런 아파트 하나 같이 지어 보시죠. 2년 안에 얼마를 벌어야 가능할진……. 감이 잘 오지 않지만 말입니다.”
“하하, 좋습니다, 우진. 정말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군요.”
우진과 주로 대화를 나누던 콜튼은, 석현, 소연과도 꽤 오랜 시간 수다를 떨었다.
영국 최고의 자동차 디자이너라는 콜튼의 배경은, 소연은 물론 자동차광인 석현 또한 충분히 관심 가질 만 했던 것이다.
해서 아침 여덟 시부터 거의 열두 시가 될 때까지 제이든의 집에서 수다를 떤 끝에, 그들은 영국에서의 첫 번째 일정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약간의 의견 차이(?)로 인해, 네 사람은 따로 움직이게 되었다.
“헤이, 우진. 나는 이제 석현과 함께 맨체스터에 놀러 갈 거야.”
“축구 경기는 내일이라며?”
“Holy! 경기는 웸블던 스타디움이고, 오늘 우리가 가려는 곳은 맨체스터의 축구 박물관이지.”
“……난 세인트 메리엑스를 보러 갈 생각이었는데?”
“Bloody! 영국까지 와서 건축 덕질이라니!”
“난 퍼거슨보다 노먼 포스터를 더 좋아하니까.”
“젠장. 우진은 축구의 멋짐을 몰라.”
“우선순위가 다를 뿐이야.”
“석현. 아무래도 우리끼리 가야겠어.”
“어쩔 수 없지 뭐.”
제이든과 석현이 축구 박물관에 가겠다며 맨체스터로 향하고 나니, 우진과 소연이 따로 남게 된 것.
“소연이 너는 따로 가보고 싶었던 곳 있어?”
“글쎄.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축구 박물관보다는 세인트 메리 엑스가 나은 것 같아.”
“네가 가보고 싶었던 곳은 어딘데?”
우진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소연이 대답했다.
“하이드 파크……?”
이어서 런던의 지도를 보고 있던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 그럼 일단 거기를 먼저 같이 가자.”
“오……? 정말?”
“물론이지. 제이든의 집에서 가깝기도 하고…….”
우진이 씨익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어차피 런던을 돌아다니려면, 통역사가 한 명쯤 필요하니까.”
퍽-!
굳이 쓸데없는 말을 덧붙여서 매를 번 우진은, 화끈거리는 등짝을 긁적이며 제이든의 집에서 나왔다.
그렇게 우진은 영국에서의 첫날을, 소연과 함께하게 되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