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88화 (188/315)

188화

11년 11월

우진의 기억에 있던 구윤권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2011년인 현재 그를 지칭하는 가장 보편적인 수식어가 ‘서울시 최연소 시장’이었다면.

우진이 회귀하기 전인 2030년에는, ‘역대 최고의 서울시장’으로 평가받던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11년에 취임한 그는 재선을 거쳐 2019년까지 시장직을 지키게 되는데, 삼선까지도 출마만 한다면 거의 확정적으로 당선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나 출마하지 않았다.

정치에 크게 관심 있는 편이 아니었던 우진은, 그 이유까지 기억나진 않았다.

다만 우진이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 이 한 가지 사실이었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어 준 사람.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정말 확실하지.’

사실 <디자인 서울>이라는 슬로건은, 구윤권 시장이 처음 들고나온 슬로건이 아니었다.

그의 전임시장인 조훈영 시장이 임기 중에 처음 꺼내 들었던 표어였으니까.

하지만 역대 최고의 시장으로 평가받았던 구윤권 시장과 달리, 조훈영 시장은 비교적 이상이 앞서던 사람이었다.

그가 추진했던 <한강 르네상스>사업과 <디자인 서울> 등의 사업은 어찌 보면 구윤권 시장이 서울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포석이 되기도 했지만.

조훈영 시장이 재임하던 당시에는 장점만큼 단점도 부각 됐던 사업이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업의 일환으로 11년 최초 완공됐던 반포한강공원의 세빛둥둥섬.

11년인 지금까지도 한창 공사 중인 동대문의 디자인 플라자 등.

디자인적으로는 후에 고평가받았던 건축물들도 처음 완공되었을 당시에는 제대로 쓰임새를 찾지 못해 꽤 오랜 시간 방치됐었으니, 수백억 단위의 예산만 낭비했다는 평가도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후임으로 취임했던 구윤권 시장은, 조훈영 시장의 행적을 타산지석 삼아 단점들을 최대한 메우고 장점을 극대화시킨 인물이었다.

쉽게 말해 조훈영 시장이 비교적 이상을 앞세워 추진했던 도시정비 사업들을 완성하고.

나아가 더 뛰어난 역량을 발휘해 서울을 한층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어냈던 인물인 것이다.

물론 구윤권 시장이라고 해서 모든 분야에서 완벽한 평가를 받았던 것은 아니나, 적어도 건축업계에서 일했던 우진은 그만큼 훌륭한 시장도 없었다고 생각했다.

‘아마 구윤권 시장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당선됐다면……. 다른 부분에서야 더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한강 르네상스부터 시작해서 서울시의 도시 정비 계획들이 전생에서처럼 깔끔하게 완성되긴 힘들었겠지.’

그래서 우진은 오늘, 이 예상치 못한 만남이 너무 놀라웠다.

단순히 서울시장이라는 타이틀만 놓고 봐도 거물이었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우진에게는 훨씬 더 큰 인물로 다가온 구윤권 시장.

그가 우진이 디자인한 첫 번째 건물 준공식에 방문했다는 사실은 믿기 힘든 것이었으니까.

때문에 걸음을 옮기던 우진은 잠시 멈칫하였고.

그 사이 우진의 일행을 먼저 발견한 것은 저쪽이었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음……?”

“브루노! 오랜만에 뵙습니다!”

브루노를 발견한 디자인재단의 이사장 안정묵이, 반가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자연스레 옆에 있던 윤치형 교수도 자리에서 일어났고.

맞은편에 앉아있던 서울시장 구윤권도 따라 일어섰다.

갑작스런 전개에 우진은 더 당황했지만, 그래도 금세 정신을 차리고 그들의 앞으로 다가갔다.

윤치형이 가장 먼저 우진을 반갑게 맞아주었고…….

“오, 우진이 왔구나.”

“네, 교수님. 바쁘신데 여기까지 다 와주시고…….”

“하하, 우리 학과 차원에서도 의미 있는 자린데, 당연히 와야지. 조운찬 교수는 일정 때문에 오지 못하게 됐다고,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하더구나.”

“하하, 별말씀을요.”

브루노와의 인사를 마친 안정묵도 이어서 우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하, 서 대표님. 오셨습니까. 얼마 전에 잠깐 뵈었었죠?”

“예, 이사장님. 일주일 만에 또 뵙네요. 하핫.”

“완공된 요양원이 정말 멋지더군요.”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안정묵과의 인사 과정에서 우진은, 자연스레 구윤권 서울시장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과찬이라니요. 허헛. 빈말이 아닙니다. 서 대표님 덕에 SPDC의 위상이 한층 더 빛날 수 있게 된 게 사실이니까요. 그렇지요 시장님?”

우진의 시선이 자연스레 옆으로 돌아갔고, 구윤권의 시선과 마주치게 되었다.

“물론입니다, 이사장님. 직접 와서 보니 더욱 기대 이상이더군요.”

이어서 구윤권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우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서 디자이너님. 서울시장 구윤권입니다.”

* * *

우진이 당황했다면, 제이든과 소연은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다.

제이든은 구윤권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며, 소연 또한 그저 어디서 본 사람 같다는 생각 정도만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애초에 자신들이 디자인한 건축물의 준공식에 서울시장이 올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 놀람의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었다.

“제이든…… 입니다!”

“하하, 반가워요, 제이든. 한국말을 정말 잘하시네요.”

“저는 K대학교 공간디자인과 학부생 한소연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소연 양. 요양원의 건축디자인은 정말 감명 깊었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시장님!”

얼음이 되어 어쩔 줄 몰라 하는 두 사람을 보며, 우진은 피식 웃었다.

자신도 이렇게 당황스러운데, 둘이 얼마나 놀랐을지는 충분히 예상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행인 건지, 얼어붙은 두 사람과의 대화는 거기서 더 이어지지 않았다.

사실상 우진의 일행 중 가장 거물급 인사는 브루노였고.

건축디자인에 관심이 있던 구윤권은 브루노를 알고 있었으니까.

구윤권은 유창한 영어로 브루노에게 인사하였다.

“작년 SPDC의 심사위원으로 참가해 주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이곳에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서울시장 구윤권입니다.”

“건축디자이너 브루노입니다. 반갑습니다, Mayor.”

가벼운 대화가 오간 뒤, 우진의 일행도 세 사람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처음 대화는 주로 브루노와 구윤권 시장 위주로 진행되었지만, 머지않아 대화의 주체는 우진으로 넘어왔다.

어쨌든 오늘 행사의 주인공은 우진과 제이든, 그리고 소연이었으며.

그들의 대표자나 다름없는 사람이 바로 우진이었으니까.

“서 디자이너님. 아니, 대표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구윤권의 이야기에, 우진이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편하신 대로 불러주시면 됩니다, 시장님.”

“하하. 그럼 대표님이라는 말이 더 입에 잘 붙으니,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우진과 다시 마주친 구윤권의 두 눈이 살짝 빛났다.

사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기 전에도, 그는 이미 우진에 대해 알고 있었다.

디자인재단 이사장 안정묵으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그 전에 구윤권은 <우리 집에 왜 왔니>를 시청한 적도 있었으니까.

우진 본인은 크게 자각하고 있지 못했지만, <우리 집에 왜 왔니>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여 WJ 스튜디오를 키워내는 동안 우진은 꽤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젊은 나이에 정말 대단하십니다. 처음에 서 대표님이 이십 대 초반 학부생이시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사장님께서 농담이라도 하시는 줄 알았으니까요.”

“과찬이십니다. 시장님께서도 최연소 서울시장님 아니십니까?”

“하하. 그렇기는 하네요.”

우진과 대화가 한 번씩 오갈 때마다, 구윤권은 여러모로 놀라고 잇었다.

대화가 너무 물 흐르듯 매끄러운 것은 물론, 절대로 이십 대 초반의 화법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는 것만 보면 동년배라고 해도 믿겠어.’

해서 몇 마디 형식적인 서로에 대한 칭찬이 오간 뒤, 두 사람의 본격적인 대화 주제는 사업적인 부분으로 넘어갔다.

얼마 전 우진이 벨로스톤즈, KSJ엔터와 연계하여 추진했던 12년 리빙페어와 관련된 사업.

사실 이것은 구윤권 시장이 취임 이후 직접 추진한 행사였고, 때문에 그는 우진을 만나면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 대표님께서 이사장님께, 리빙페어와 K-STAR 패스티벌의 콜라보를 제안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줄여서 KSF라고도 부르는 K-STAR Festival은, 콘텐츠진흥원이 주관하는 K-POP 국제 행사였다.

우진이 리빙페어의 전시에 <천년의 그대>를 얹어 콜라보를 제안한 행사가 바로 이 KSF였던 것이다.

구윤권의 말에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서울시장이 이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우진에게 꺼냈다는 것은, 우진에게는 활용하기에 따라 엄청 큰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시장님. 어쩌다 보니 이번에 제가 이번에 <천년의 그대>라는 드라마 세트장의 디자인을 맡게 되었는데, 이 세트장의 컨셉 자체가 한국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건축과 무척 잘 어울리더라고요.”

“오호, 그렇습니까?”

우진은 첫 마디부터 윤권이 흥미를 느낄 만한 이야기로 시작하였고, 청산유수처럼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사장님께 들어보니 이번 리빙페어의 목적점이, 한국적인 공간디자인의 우수성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 있는 것 같더라고요.”

“정확히 짚으셨습니다.”

구윤권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반적으로 한국적인 건축이라 하면 전통건축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이 전통건축이 가진 조형적 아름다움을 살리면서도 미래지향적인 공간을 보여줄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리빙페어의 지향점과 일치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풀어내는 우진을 보며, 윤치형은 혀를 내둘렀다.

‘보통 놈이 아닌 거야 진즉부터 알았지만……. 사업을 성공시킨 게 확실히 운은 아니었군.’

우진의 디자인적 역량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사업적으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는 것은 처음 봤으니 말이다.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들은 우진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고, 우진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마침 한류의 수출이 본격화되고 있는 시점이며, K-POP 못지않게 한국 드라마가 해외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으니……. 드라마 세트장이라는 매개를 통해 건축의 영역을 컨텐츠와 한번 이어보고 싶었습니다.”

“컨텐츠와 건축이라……. 일견 연관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분야인데, 서 대표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뭔가 그럴듯해 보이는군요.”

“결국 좋은 건축, 좋은 공간을 즐기는 것 또한, 컨텐츠의 일부가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런가요?”

“마침 시기가 잘 맞아 떨어지기도 했고, 명분도 맞아떨어졌으니. 적지 않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프로젝트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명분이 맞아떨어졌다는 건…….”

“드라마의 세트장 컨셉이 리빙페어의 목적점과 부합한 부분 말입니다.”

“듣고 보니 그렇군요.”

우진과 대화하던 구윤권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원래도 삐딱한 자세였던 것은 아니지만, 우진의 이야기를 더 집중해서 들어보고 싶어진 것이다.

우진에 대한 평가도 조금은 달라졌다.

‘잠재력 많은 루키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우진이 특별한 이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윤권의 입장에서 우진은 이십 대 초반의 젊은 디자이너일 뿐이었다.

전례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지언정, ‘루키 디자이너’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윤권의 생각은 달라지고 있었다.

지금 그의 눈에 비친 우진의 모습은, 이미 완성된 한 사람의 디자이너이자 사업가였으니 말이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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