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11년 11월
요양원의 입구가 가까워지자, 우진은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하하, 진짜 완공이네.’
지난번 감리 때만 하더라도 조경작업과 마무리 마감 공사로 한창이던 요양원의 입구가, 문주(門柱)까지 깔끔하게 완공되어 멋지게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크, 진짜 뿌듯하잖아?’
폰으로 사진이라도 찍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고, 호들갑을 떨며 사진을 찍는 것 자체가 모양 빠진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진과 달리, 이미 흥분해서 사진을 찍어대는 두 사람은 그런 것이 상관없는 듯 보였다.
“Bloody Hell! 미쳤어! 미쳤다고!”
“흑……! 너무 멋있잖아!”
일정 주기로 감리를 하러 왔던 우진과 달리, 두 사람은 지어진 건물의 모습을 처음 보는 것과 다름없었다.
공사기간 동안 한두 번 정도야 와봤지만, 그때는 거의 기초공사나 골조공사를 진행 중일 때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제이든과 소연은 자신들이 디자인한 건물의 실물을 사실상 처음 보는 것이었고.
때문에 우진보다 반응이 훨씬 더 격한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우진은 운전석 오른쪽에 달린 룸미러를 통해 훌쩍이는 소연을 발견하고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소연, 혹시 울어?”
“울……! 기는! 내가! 왜!”
“오랜만에 화장 열심히 해놓고, 울면 마스카라 다 번진다.”
“헐, 설마 벌써 번진 건 아니지?”
“내 뒤에 웬 팬더가 한 마리 앉아있나 했네.”
“으아아!”
우진의 말에 당황한 소연이 허겁지겁 손거울을 찾았지만, 당연히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조금 울먹거린다고 마스카라가 번질 리는 없었으니까.
부우웅-
세 사람이 시끄럽게 떠드는 사이, 우진의 차는 어느새 문주를 지나 요양원 내부로 진입하였다.
우진의 설계가 그대로 반영되어 자연스레 주차장으로 이어 들어가게 되는 슬로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속도를 줄인 우진은 천천히 슬로프를 따라서 운전하기 시작했다.
원래도 슬로프는 감속 주행을 해야 하는 구간이었지만, 우진은 더욱 천천히 차를 몰았다.
평범한 방문객에게야 주차공간은 그저 주차를 위한 지하 공간일 뿐이겠지만, 우진을 비롯한 디자이너들에게는 이 공간 하나하나가 전부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공간 하나하나에, 그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말이다.
‘예산이 좀만 더 많았더라면 더 고급스럽게 디자인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도담요양원의 주차장은, 일반적인 요양원의 주차장과 조금 느낌이 달랐다.
요양원의 특별한 구조상 주차장의 입구가 방문객의 첫인상이 될 수밖에 없었으니.
전체 주차장 디자인을 전부 신경 쓰지는 못하더라도, 슬로프를 비롯해 시선이 가장 많이 닿는 공간들은 최대한 깔끔하게 디자인해 놓은 것이다.
어느새 조용해진 제이든과 소연도, 공간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건축경험이 많은 우진과 달리 두 디자이너에게는, 오늘의 경험이 무척이나 새롭고 귀한 것이었다.
자신들이 디자인하고 설계한 공간이 어떤 느낌으로 시공되었는지를 직접 본다는 것은, 건축디자이너로서 성장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끼이익-
슬로프를 따라 주차장 최상층에 다다르자, 텅 비었던 아래층과 달리 자동차들이 빼곡히 주차되어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이것을 확인한 우진은 살짝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음? 왜 벌써 차가 이렇게 많이 들어와 있는 거지?’
준공식까지는 아직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남아있었는데 이미 들어와 있는 차만 수십 대도 넘어 보였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관계자들의 차량이 상주한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상할 정도로 많은 숫자.
‘설마 내가 시간을 잘못 안건 아니겠지?’
해서 요양원 건물 내부로 통하는 진입로에 세 사람을 먼저 내려 준 우진은, 빈자리에 차를 대고 나와 고개를 갸웃하였다.
하지만 우진이 생각한 것처럼 행사시간을 잘못 안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총 주차대수가 200대도 넘는 요양원의 주차장은, 오늘 가득 찰 예정이었으니까.
* * *
작년 여름.
SPDC의 심사위원으로 참가해 우진의 발표를 들었던 브루노는, 완공된 요양원의 모습을 무척이나 기대하며 오늘 소연을 따라왔다.
“소연, 오늘 오후에는 요양원의 준공식에 가야 한다고 했었죠?”
“네. 조기 퇴근해서 죄송해요, 브루노. 그리고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아닙니다, 소연. 소연의 첫 번째 건물의 준공식인데, 디자이너로서 무슨 일이 있어도 가봐야 하는 게 맞지요.”
“히히. 저 너무 기대돼요, 브루노. 그나저나 브루노도 함께 하실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준공식이 평일로 잡혀서 정말 아쉽네요.”
“아, 아쉬워하실 것 없습니다.”
“예?”
“저도 소연과 같이 오늘 조금 일찍 퇴근해 볼 생각이니까요.”
“그 말씀은……?”
“같이 가시죠, 소연. 성수동까지는 제가 태워 드리겠습니다.”
“오예!”
브루노는 용산에서 곧바로 소연과 함께 수유로 갈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우진과 함께 가기 위해 성수동을 들렀다.
경로상 성수동을 들른다고 해서 크게 돌아가는 것도 아니었거니와, 엄밀히 말하면 브루노는 초대받은 손님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바쁜 일정 때문에 원래 못 갈 뻔했었는데 여유가 생겨서 가게 된 것이니.
세 사람과 함께 들어가는 것이 여러모로 그림이 좋을 것 같았다.
‘작년에 느꼈던 전율을 다시 느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어떨지 모르겠군.’
그래서 브루노는 우진의 차에 함께 타서 준공식으로 향하게 되었고.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기분 좋게 그곳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요양원에 도착한 브루노는, 두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자, 그럼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볼까?’
제이든과 소연은 완공된 요양원을 보며 시작부터 호들갑을 떨었지만, 당연히 브루노는 그렇게 흥분할 이유가 없었다.
외관부터가 독특하고 멋진 디자인이었음은 분명했지만, 브루노는 이보다 훨씬 더 멋진 건축물들을 많이 봐온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공간 하나하나를 살펴보며, 정말 우진이 발표했던 그 감동 그대로를 얼마나 잘 재현했는지 꼼꼼히 확인할 뿐이었다.
‘확실히 분지를 지하주차장 구조로 활용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군. 훌륭히 구현했어.’
세 사람이 디자인한 요양원은, 업계 종사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 일차원적인 시선으로 보기에도 분명 훌륭했다.
모듈들의 조화와 스케일감에서 오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건축 전문가인 브루노는, 요양원의 내부를 둘러보며 그보다 훨씬 더 훌륭한 가치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기 좋은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공간의 구석구석에서 사용자를 배려한 흔적들이 여지없이 묻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럴싸한 말로 포장된 UX가 아니야. 물론 완벽하진 않지만……. 최선의 공간을 찾아내려고 노력한 태가 나는군.’
그리고 브루노가 가장 감탄한 부분은, 주차장에서 건물 내부까지 이어지는 깔끔한 동선이었다.
우진 일행은 주차장에서 나온 뒤 준공식의 주최 측을 만나기 위해 2층 로비 인근의 내무실로 향했는데.
돌아가는 느낌조차 거의 없는 직선에 가까운 동선이었으며, 무엇보다 지하 1층에서 지상 2층까지 이동하는 동안 단 한 번의 경사로도 거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딱 한 번 엘리베이터를 탄 것을 제외하면, 전부 다 평지였던 것.
평지에 지어진 건축물이라면 너무 당연한 일이겠지만, SPDC의 심사위원인 브루노는 이 요양원이 지어진 지대가 얼마나 건축여건이 나빴는지를 알고 있었다.
절반 이상이 급경사였던 분지와 산지 위에 얼마나 저예산으로 설계를 뽑아냈는지 알고 있었으며.
때문에 지대를 깎아내고 메워내는 평탄화 작업을 최소화하며 이 정도의 구조와 동선을 뽑아냈다는 사실이, 브루노로서는 꽤 감탄스러운 일이었다.
‘건축의 수많은 제약 위에 디자인이라는 하나의 제약을 더 추가했다더니……. 후후. 우진이 정말 멋진 건축물을 만들어냈군.’
어느 정도 감상을 마친 브루노는, 우진과 함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보고 싶은 공간들이 더 많았지만, 일단은 행사가 더 중요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브루노는 표찰이 없으시죠?”
“하하,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니까요.”
“초대 여부와 관계없이, 브루노가 오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모두가 반길 겁니다.”
“허허, 그럴까요?”
“물론이죠, 브루노.”
사무실 내부의 인테리어는 비교적 평범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우레탄 마감의 바닥에, 하얀 형광등 조명과 하얀 페인트 마감의 석고 벽체.
그리고 이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이곳은 이 건축물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는 곳일 뿐, 사용자들에게 만족감을 주기 위한 공간이 아니었으니.
최대한 실용성 위주로 디자인된 것이다.
예산이 넘쳐 흐르지 않는 한 당연한 선택.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로 들어선 브루노는, 우진을 따라 안쪽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그렇게 브루노가 몇 걸음 정도 걸었을 무렵.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음……?”
“브루노!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무실 소파에 앉아있던 중년 남성 한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브루노에게 아는 체를 하였다.
* * *
주차장을 나와 요양원을 둘러볼 때까지만 하더라도, 우진은 별생각 없이 자신의 건축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직 오픈 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조금 많아 보인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크게 특이점을 느끼진 못한 것이다.
하지만 브루노의 표찰을 발급해 주기 위해 사무실로 들어왔을 때.
우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 안에는 수십 명이 넘는 관계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심지어 소파에 앉아있던 몇몇 인물들 중에는 우진이 잘 아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사장님 아니야? 게다가 교수님께서 여긴 왜……?’
서울시 디자인 재단의 이사장인 안정묵을 비롯해서, K대 공간디자인과의 학과장인 윤치형 교수까지.
업계의 거물급 인사인 두 사람이 준공식에 직접 걸음 해 줬을 줄은, 생각조차 못한 것이다.
때문에 놀람 다음의 감정은 당연히 기쁘고 고마운 마음.
‘바쁘신 양반들이 여기까지 다 챙겨 와주시고……. 이거 감사하네.’
재단 이사장 안정묵은 물론 윤치형 또한 K대의 교수이기 이전에 저명한 디자이너였고.
이들이 준공식에 얼굴을 비췄다는 사실만으로도 우진의 데뷔나 다름없는 오늘의 행사가 훨씬 더 이슈화될 테니.
우진의 입장에서는 기꺼운 마음이 드는 게 너무 당연하였다.
그래서 우진은 두 사람에게 인사하기 위해 자연스레 그쪽으로 먼저 걸었다.
하지만 걸음을 옮기던 우진은, 다음 순간 더욱 놀라야 했다.
멀리서는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는데, 정말 상상조차 못 했던 얼굴이 그 자리에 한 명 더 있었으니까.
‘잠깐, 저 사람은……!’
전생과 회귀 후를 통틀어,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유명해서 우진이 절대로 얼굴을 모를 수 없는 사람.
우진의 기억하기로 21세기에 들어선 이후 서울시민에게 가장 존경받았던 서울시장인 구윤권이, 안정묵과 윤치형의 맞은편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