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86화 (186/315)

186화

11년 11월

10월은 여러모로 바쁜 달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평이하게 흘러갔을 시기였지만, 갑작스레 벨로스톤즈, KSJ엔터와 엮이면서 대규모 프로젝트가 시작되어버렸으니까.

일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힘든 부분도, 순조로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10월이 마무리되기 전, 프로젝트의 일차적인 진행사항들은 어느 정도 일단락될 수 있었다.

3사 간의 계약관계와 더불어 서울 디자인재단, 콘텐츠진흥원 등과의 협력관계까지도.

어느 정도 조율이 되어, 계획대로 진행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래서 우진은 한숨 돌릴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래 쉴 수는 없었다.

10월이 갑작스레 바빠진 달이었다면, 11월은 원래 바쁘기로(?) 예정된 달이었으니까.

11월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예정되어있던 이벤트 하나와 얼마 전에 확정된 이벤트 하나가 있었다.

[오빠, 준비 다 됐어?]

“12시 반까지 회사 건물 1층으로 와.”

[오케이. 제이든은 거기 있어?]

“아니. 아마 제이든도 오고 있을 거야.”

[오빠 차에 자리는 충분하지?]

“4인승 세단에 세 명이 타는데, 자리야 당연히 충분하지.”

[추가로 더 같이 가는 사람 없냐는 말이었어. 내 쪽에서는 한 명 더 있거든.]

“음……? 그게 누군데?”

[그건 보면 알 거야. 일단 끊는다?]

“어? 어, 그…… 그래.”

소연에게서 온 전화를 끊은 우진은, 오전 업무를 마무리하고 사무실을 나설 준비를 했다.

오늘은 우진에게 아주 의미 있고 기분 좋은 날이었다.

오늘이 바로 우진이 디자인한 첫 번째 건축이라 할 수 있는, 강북구 수유동의 요양원 준공 날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기획하고 디자인한, 첫 번째 건축물이 완공되다니.’

물론 요양원의 건축디자인은, 우진 혼자만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건축물의 첫 이미지와 다름없는 파사드의 느낌은 제이든의 스케치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으며, 자재의 마감 색감과 전체적인 내부 인테리어의 무드는, 소연의 디자인 감성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기본설계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기초적인 컨셉 설계를 제외한다면 실제 건축물이 지어지기 위한 대부분의 역할은 천웅건설이 했으니.

우진만의 건축은 결코 아닌 것이다.

‘마지막 감리를 갔을 때도 거의 완공 느낌이기는 했지만……. 완전히 준공 떨어진 모습을 보면 또 감회가 새롭긴 하겠지.’

하지만 그런 모든 부분들을 차치하고라도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 요양원이 지어질 수 있게 된 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 바로 우진이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건축디자이너로서 우진의 포트폴리오의 첫 페이지를 장식할 건축물이 바로, 이 요양원이 될 것이었다.

띵-!

설레는 마음으로 자리를 정리하고 나온 우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주차장에서는 먼저 도착해 있던 영국인이 우진을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헤이, 브로. 왜 이렇게 늦었어?”

“늦지 않았어.”

딱 잘라 대답하는 우진을 보며, 제이든이 입을 쭉 내밀고는 투덜거렸다.

“우진은 너무 까칠해.”

그런데 제이든의 불만스런 표정을 잠시 올려다본 우진은, 순간 위화감이 드는 것을 느꼈다.

평소에도 우월한 기럭지에 옷도 잘 입고 다니던 제이든이었지만, 오늘따라 특별하게 힘준 티가 확 났던 것이다.

심지어 우진이 제이든을 알게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수트 차림.

“그나저나 옷은 왜 이렇게 빼입고 온 거야? 웬 수트?”

때문에 우진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지만, 제이든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였다.

“우진. 우진이야말로 너무 아저씨처럼 입은 거 아냐?”

“평범한 이십 대 초반의 캐주얼 복장일 뿐이야.”

“그럼 우진이 아저씨라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

“왜 이렇게 빼입고 왔냐니까, 딴소리하기는.”

“크흠.”

우진의 핀잔에, 어울리지 않는 헛기침을 한 제이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 제이든 님이, 건축디자이너로서 처음 데뷔하는 날이야, 우진.”

“음…… 그건 그렇지. 그런데?”

“준공식이라는 걸 하면, 기자들이 엄청 오지 않을까?”

“뭐?”

“SPDC는 엄청 유명한 공모전이잖아.”

“맞아.”

“SPDC의 최연소 대상 수상자이자, 도담요양원의 건축디자이너 제이든!”

“…….”

“아마 다들 날 취재하고 싶어 할 테지.”

“흠…….”

“그런 의미에서 멋진 옷을 입고 가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야 우진.”

“그래. 훌륭해 제이든.”

“어리석은 우진은 아마 후회하게 될 거야.”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너무 제이든스러운 대사에, 우진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무 진지한 표정을 앞에 두고 그럴 리 없다며 초를 치는 것도 미안했기에, 딱히 뭐라 대꾸할 생각은 없었다.

‘진짜 신났네. 생각보다 별거 없을 텐데……. 뭐, 미리부터 실망할 필요는 없으니까.’

물론 제이든의 말대로 기자들이 오긴 할 것이다.

어쨌든 SPDC는 인지도 있는 공모전이었으니까.

하지만 현실적으로 인터뷰 한두 번 정도를 제외한다면, 그렇게 특별한 이벤트가 없을 것도 분명했다.

준공식이라면 전생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겪어본 것이 우진이었다.

너무 과하게 꾸미고 나온 제이든이 조금 민망하다는 생각을 하며, 우진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

부릉-

그런데 차를 몰고 주차장에서 나왔을 때.

우진은 두 가지 사실 때문에 또 한 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로는 제이든만큼 꾸미고 나온 사람이 또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으며…….

“뭐야 오늘. 너도 제이든이냐?”

“아 놔. 이 오빠가, 만나자마자 왜 시비야?”

“Bloody Hell!”

“소개팅 나갈 때도 추리닝만 입고 나가던 애가 갑자기 웬 원피스?”

“내가 언제!”

“그 부러질 것 같은 구두는 또 뭐야? 키가 나보다 더 커진 것 같잖아? 너 구두도 있었어?”

“으…… 씨. 제이든, 이 오빠 한 대만 때려주면 안 돼?”

두 번째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손님이 한 명 더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우진.”

“브루노!”

요양원이 완공된다면 꼭 보러오겠다는 약속을, 브루노가 지킨 것이다.

* * *

서울시 디자인재단의 이사장인 안정묵은, 오늘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재단에서 가장 신경 쓰는 프로젝트 중 하나인 SPDC공모전이, 오늘 아주 기념비적인 날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김 실장.”

“예, 이사장님.”

“자네 지난주에, 사전답사 다녀왔다고 했었지?”

“예, 그렇습니다. 행사 준비 과정에서 미리 세팅해야 할 자료들이 있었거든요.”

“어떻던가?”

“뭐가 말씀이십니까?”

“도담요양원 말일세. 건물 멋들어지게 지어졌냐는 말이지.”

SPDC는 지금까지 수많은 공모작들을 배출하였고, 매 회차마다, 당연히 한 작품씩은 대상작을 선정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SPDC를 통해 실제로 지어진 건축물은, 도 합 열 개가 되지 않는다.

대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학부생들의 작품 수준으로는, 시공까지 도달하기 쉽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지어진 건축물들도 거의 작은 규모의 공공시설들뿐.

공사 기간이 일 년도 넘는 이런 큰 프로젝트는, 아직 성사됐던 적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정묵은, 오늘의 행사를 무척이나 기다려왔다.

오늘의 행사는 아마도, SPDC라는 공모전의 격을 한 단계 크게 격상시킬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고 했었는데……. 저, 그날 가보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이사님.”

“오호, 어땠는데?”

“학부생의 공모당선작으로 건축했다고 해서 조금 엉성할 줄 알았는데……. 일단 외관부터 엄청 독특하고 멋지더라고요.”

“후후, 그래?”

“과장 조금 보태면, 해외 관광지에 있는 랜드마크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김 실장의 칭찬에, 정묵은 마치 자신이 칭찬받은 양 기분 좋게 웃었다.

작년 공모전 당시 우진이 보여줬던 최종 발표는, 아직도 그의 뇌리속에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확실히 디자인이 독특하기는 했었지.”

“엇, 이사장님도 이미 보셨습니까?”

“아니, 나는 이 작품을 발표할 때 심사를 했었거든.”

“아아……!”

“자네가 올해 이쪽으로 전근 와서 잘 몰랐을 텐데, 작년 SPDC때 진짜 난리도 아니었다네.”

“그랬을 만합니다.”

“이건 조금 미안한 얘기지만……. 작년에 눈이 워낙 높아져서 그런지, 올해 당선작들이 형편없게 느껴졌을 정도라네.”

“확실히 올해 당선작 중에는, 눈이 확 트일 만한 작품이 없었죠.”

“아쉬워.”

“대상작이 그나마 괜찮았는데, 실무팀에서 아마 시공은 힘들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힘들다니. 아주 관대한 표현이로군.”

“넵?”

“그 기하학적인 형태를 어떻게 시공하나?”

“그런가요? 저는 건축 쪽은 잘 몰라서…….”

“그냥 형식적으로 입찰 공고만 올린 거야. 아마 어떤 건설사에서도 입찰하지 않을 거네.”

“그렇군요.”

김 실장이 운전하는 차에 오른 정묵은, 차창 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을 위해 재단 차원에서 공들인 준비들이, 헛되지 않을 것만 같은 예감이었다.

‘인맥까지 동원해서 사람들을 불렀는데……. 망신당할 일은 없을 것 같아 다행이군.’

지금까지 서울시 디자인 재단에서는, 항상 당선작의 준공식 때 작은 행사를 열었었다.

하지만 이번에 재단에서 준비한 이벤트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이전까지는 최소한의 식순으로 형식적인 준공식을 한 뒤 기자 몇 명을 불러 기사를 태우는 정도였다면.

이번에는 정묵을 포함한 재단의 실권자들이 인맥까지 동원하여 아주 크게 준공식을 기획했으니 말이다.

심지어 오늘 행사에 오기로 한 VIP 중에서는, 최근에 부임한 서울시장도 있었다.

취임 때 [디자인 서울]이라는 슬로건을 표방할 정도로, 건축과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던 서울시장 구윤권.

취임 후 그와 처음 만나던 자리에서 정묵은 올해 완공될 이 요양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던 적이 있었고.

그때 그가 크게 관심을 보여 오늘의 준공식에까지 초대하게 됐던 것이다.

‘그래도 준공식까지 직접 오신다고 할 줄은 몰랐는데…….’

덕분에 오늘 재단에서 준비한 행사는, 안정묵이 처음 기획했던 수준보다도 훨씬 더 커져 있었다.

서울시장이 직접 행차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행사의 무게감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시장님께서 오시는 순간 정계 인물들도 줄줄이 사탕처럼 딸려 올 테고……. 화제성은 걱정할 필요도 없겠군.’

머릿속으로 흐뭇한 그림을 그린 정묵은, 창밖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차가 좀 밀리는구만 그래.”

“그러게 말입니다, 이사장님. 그래도 간선도로만 벗어나면 금방 도착할 테니, 늦지는 않을 겁니다.”

“하하. 늦지야 않겠지. 그냥 작년에 내가 느꼈던 그 감동이 완공된 건물에 얼마나 표현되어 있을지……. 그게 점점 더 궁금해지고 있었을 뿐이라네.”

요양원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정묵의 기대감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이 기대감은 건축물의 디자인적인 부분 때문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가 가장 기대하고 있는 것은, 이 디자인의 디렉터였던 우진과의 만남일지도 몰랐다.

‘얼마 전에 들어왔던 리빙페어 관련 협업 제의도……. 오늘 얼굴 보고 한번 구체적으로 얘기해볼 수 있겠군.’

우진을 떠올린 정묵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어쩌면 오늘은 세계적으로 성장할 디자이너가 대외적으로 처음 데뷔하는 날일지도 몰랐다.

다름 아닌 서울 디자인 재단의, SPDC를 통해서 말이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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