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인연의 연결고리
소정과의 미팅을 기분 좋게 마친 우진은, 그녀와 가볍게 저녁까지 한 끼 먹었다.
우진의 새집인 <서울숲 클라시아 포레스트>는 프리미엄 주상복합이었고.
때문에 단지 내에도 괜찮은 퀄리티의 레스토랑이 이미 몇 군데 입점해 있었다.
“서 대표님 덕에, 또 새로운 방향으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 볼 수 있게 되었네요.”
“하하, 저도 소정 대표님 덕에 드라마 쪽에도 발을 들여 보고……. 좋은 경험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대표님. 구체적인 계약서는 투자자들과 조율해본 뒤에 나오는 대로 메일로 쏴 드리도록 하죠.”
“넵.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우진과의 이야기를 마치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소정의 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워 보였다.
우진 덕에 사업의 새로운 방향성들을 생각할 수 있게 됐다는 그녀의 이야기는, 결코 빈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서울 디자인 재단이라……. 공기관이랑 연계시켜서 뭔가 할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말이지.’
식사를 하면서 우진이 슬쩍 던져 준 이야기는, 며칠 전 벨로스톤즈의 민 대표로부터 제의받았던 내용들을 살짝 흘린 것이었다.
우진은 이 <천년의 그대> 메인 세트장의 디자인을 벨로스톤즈와 콜라보 할 한국적인 공간디자인에 연계시킬 생각이었고.
<천년의 그대> 드라마에 ‘한류’라는 프레임을 예쁘게 잘 씌워 코엑스에서 열릴 전시에 얹어 준다면, 드라마의 홍보 효과까지도 적잖이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얘기한 것이다.
이 내용을 들은 소정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국제적인 행사에 한 숟갈 얹을 수 있는 기회야. 이걸 어떻게 이런 식으로 엮을 생각을 한 걸까?’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기회를 좀 더 확장 시켜 크게 키워 낼 생각까지도 할 수 있었다.
‘서 대표님 말에 의하면 K-POP과 관련된 대형 행사가 코엑스에서 열린다는 건데……. 여긴 분명히 콘진원과도 관련 있는 행사겠지.’
소정이 말하는 콘진원이란 서울 콘텐츠 진흥원이다.
디자인 페어를 주관하는 국가기관이 서울 디자인 재단이라면, 소정이 예상하기로 K-POP과 관련된 행사를 주관하는 것은 이 콘텐츠 진흥원일 터.
우진 덕에 재밌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이제 그녀의 인맥을 활용해 새로운 시너지를 만들어낼 차례였다.
“어디 보자. 김 이사님 연락처를 내가 저장해 뒀던 것 같은데…….”
소정은 운전대를 잡고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어딘가를 향해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우진이 만들어낸 제안은 소정의 역량을 통해 더 크게 발아(發芽)하고 있었다.
* * *
소정과의 미팅이 있었던 바로 다음 날.
KSJ엔터로부터, 곧바로 계약서 초안이 날아왔다.
양사를 오고 가며 수정돼야 할 계약서기에, 일단 메일을 통해 초안을 보낸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우진은, 오후에 곧장 회의를 소집하였다.
많은 인원을 소집한 것은 아니었다.
현재 WJ 스튜디오의 모든 프로젝트를 관리하고 있는 진태와, 자금흐름을 관리하는 경영지원실장 임성훈.
그리고 마케팅 팀장으로 얼마 전에 영입한 윤지예까지 총 네 명이 회의실에 모인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인력과 자금을 미리 확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세 사람을 부른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 계약서 초안은 다들 확인하고 들어오셨죠?”
“네, 대표님.”
“이번 프로젝트는 좀 복잡하게 엮여있어서, 제가 설명드릴 때 집중해서 들어주셔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넵. 집중하겠습니다.”
사무직원 한 명이 들어와, 네 사람의 앞에 서류 파일을 하나씩 올려놓고 나간다.
서류 파일 가장 앞장에는 <천년의 그대 프로젝트>라는 글씨가 큼지막한 폰트로 박혀있었고.
약속이라도 한 듯 네 사람이 동시에 첫 페이지를 넘겼다.
“우선 이번 프로젝트에서 저희 WJ 스튜디오가 설계‧시공하게 될 현장은, <천년의 그대>라는 드라마의 메인 촬영장으로 사용될 드라마 세트장입니다. 해당 프로젝트는 드라마 제작사인 <미디트리>라는 업체와 협업하게 될 예정이며, 드라마의 메인 투자사인 와 자금집행 조율을 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디자인‧제작된 세트장의 모듈들은…….”
우진은 간결하게 핵심을 요약해서 세 사람에게 설명하였고, 그들은 각자 자신의 수첩에 메모하며 그 내용을 정리하였다.
하지만 같은 내용을 들으면서도 세 사람 모두 집중하는 부분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역할은 각기 달랐으니까.
우진의 설명이 어느 정도 끝났을 때,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경영지원실장 임성훈이었다.
“그럼 대표님.”
“말씀하세요, 실장님.”
“제가 계약서상에서 파악한 바로는 저희 측에서 투입해야 할 총금액이 38억 정도가 될 것 같은데……. 당장 사내 유보금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라서요.”
조심스런 그의 말에,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야 당연합니다. 지금 확보 가능한 여윳돈이 15억쯤 되죠?”
“맞습니다. 전부 다 끌어모은다면 20억까지는 어떻게 될 것도 같은데……. 그럼 사옥 공사에 들어갈 시공비용이 너무 빠듯하게 굴러갈 것 같습니다.”
그의 걱정스런 표정을 본 우진이 빙긋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우선 38억으로 산정해놓은 액수는, 저희가 실질적으로 투입될 캐쉬를 기준으로 한 게 아닙니다.”
“넵?”
“저희 WJ 스튜디오에서 이 정도 규모의 공사를 만약 외주로 받아 진행한다면, 설계‧디자인‧시공까지 모든 파트의 비용을 어느 정도로 책정할지 러프하게 계산해서 집어넣은 비용이지요.”
“아아……!”
“저희가 직접 디자인하고 설계해서 시공까지 할 테고, 이걸 원가로 빠듯하게 산정한다면……. 실질적으로 들어갈 비용은 20억 언더로 내려갈 겁니다.”
“그렇겠군요.”
“여기에 벨로스톤즈와 콜라보하여 디자인할 일부 모듈들의 경우에는, 시공비용을 훨씬 더 절감할 수 있게 되겠지요.”
우진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임성훈의 펜대는 빠르게 움직였다.
우진이 생각하고 있는 자금흐름의 큰 그림이, 성훈의 머릿속에도 어느 정도 그려지고 있었다.
“리빙페어에 전시될 세트들을 말씀하시는 거겠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모듈화시켜서 이동할 수 있는 구조물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벨로스톤즈와 협업하게 될 거고……. 이러한 측면에서 최소 5억 정도는 시공비를 추가로 절감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성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확히는 계산기를 두들겨 봐야 하겠지만……. 고급 자재들을 벨로스톤즈 쪽에서 맡아 준다면 확실히 크게 비용이 절감되겠습니다.”
“네. 구체적인 계획은 실장님이 최대한 타이트하게 한번 짜서 만들어봐 주세요.”
“예, 대표님.”
“최소한으로 비용을 줄이는 게 당연히 좋지만, 디자인 퀄리티를 포기하면서까지 돈을 아낄 생각은 없습니다. 아시지요?”
“물론입니다.”
우진의 입에서 나오는 내용들을 정리하면서, 임성훈은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의 설명을 들은 후 계약서 초안을 다시 살펴보니, WJ 스튜디오에서 얼마나 크게 실리를 챙긴 것인지 비로소 느껴졌던 것이다.
‘우리가 가진 무형의 가치들을, 협상 과정에서 아예 현금화시켜버리신 거네.’
계약서상으로 WJ 스튜디오가 투자하는 가치는 거의 40억에 육박하지만, 실질적으로 투입되는 캐쉬는 15억도 채 안 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
이 정도 비용으로 세트장 전체의 소유권에 드라마 지분까지 3퍼센트 정도 챙기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알맹이를 확실하게 챙긴 것이다.
건전한 WJ 스튜디오의 재무구조상, 이 정도는 사업자 대출을 조금만 활용해도 충분히 감당 가능한 수준의 레버리지였다.
그리고 임성훈의 이야기가 끝나자, 이번에 입을 연 것은 마케팅 팀장 윤지예였다.
“대표님. 그럼 저희 마케팅 팀은, 주로 <미디트리>쪽과 협업을 하면 될까요?”
우진의 대답이 곧바로 이어졌다.
“<미디트리>는 사실상 KSJ엔터의 자회사나 다름없는 곳입니다.”
“아……!”
“아마 드라마가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가면 KSJ엔터에서 주도적으로 마케팅 전략을 제시할 겁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쪽과 협업을 하는 건 세트장이 전부 다 완공된 이후의 일이 될 테고…….”
우진이 말꼬리를 흐리며 품속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들었다.
그것은 바로, 서울 디자인 재단 실무자의 명함이었다.
“이쪽으로 먼저 연락해 보세요.”
윤지예가 명함을 받고 확인하는 동안, 우진이 말을 덧붙였다.
“아마 디자인 재단 마케팅 관련 부서가, 당장 1월이나 2월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일 겁니다.”
“리빙 페어 홍보 차원에서 말이지요?”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마케팅 협업은 일단 이쪽이랑 먼저 하시면, 지원받을만한 부분이 꽤 있을 겁니다.”
“이야기를 잘만 풀어내면……. 디자인 페어 홍보 책자에, 저희 쪽 작업물을 메인으로 걸어줄 수도 있겠네요.”
“바로 그렇지요.”
곧바로 의도를 캐치하는 그녀의 대답에, 우진은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제가 오전에 미리 언질을 해 두었으니, 곧바로 얘기가 통하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마케팅과 관련된 일정은, 예산책정이나 디자인 설계에 비해 아직 여유가 많이 있었다.
마케팅에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리려면, 일단 셀링할 물건이 준비되어야 하니까.
그래서 윤지예와의 이야기는 몇 마디 더 나누는 것으로 금방 마무리되었고.
마지막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은 이제 가장 중요한 디자인과 설계였다.
그래서 우진의 시선은 자동으로 진태를 향했고, 그와 눈이 마주친 진태가 입을 열었다.
“디자인 컨셉 회의부터 진행해야겠네요, 대표님.”
물론 진태가 디자인과 설계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이 모든 스케쥴을 관리할 총괄 관리자였으니, 설계와 디자인에 필요한 인력을 세팅하기 위해 그와 가장 먼저 논의하는 것이다.
“물론입니다. 디자인 2팀 지금 신규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있나요?”
수첩을 꺼내 든 진태가, 고개를 저으며 곧바로 대답하였다.
“기존 프로젝트 일정이 아직 보름 정도 남았습니다.”
“조금 당겨질 여지는요?”
“팀장에게 물어봐야 하기는 하는데, 아마 3일 이상 당기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1팀이나 3팀은 어차피 여유 없죠?”
“네. 그쪽은 지금 세팅된 일정도 빠듯해서…….”
“좋습니다. 그럼 11월 첫째 주부터, 2팀 스케줄좀 비워주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처음부터 머릿속으로 그려둔 그림이 있었기 때문인지.
복잡하게 다뤄야 할 이슈가 많이 섞여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첫 번째 회의는 빠르게 정리되었다.
물론 굵직한 방향성이 잡혔다 뿐, 세부적으로 해야 할 서류작업은 산더미같이 많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작업들은 우진의 몫이 아니었다.
이제 우진의 역할은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지, 디테일한 구조를 잡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생각한 대로만 잘 진행되면, 회사 벨류를 크게 끌어올릴 수 있을 만한 프로젝트야.’
회의 마무리단계가 되어가자, 우진보다는 세 사람 사이의 대화가 더 많아졌다.
우진이 던져놓은 것들을, 잘 정돈하여 깔끔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진이 멍하니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천년의 그대> 프로젝트의 청사진이 펼쳐지고 있었다.
‘1500평 정도의 작은 규모에 그런 허접한 세트장만 가지고도, 이천시 상권을 살려냈을 만큼 엄청난 파급력이 있었던 프로젝트야.’
구체적으로 프로젝트가 진행되기 시작하자, 잊고 있던 전생의 기억들도 하나둘 추가로 떠올랐다.
‘처음엔 작은 규모로 시작됐지만, 관광특구로 지정되면서 아예 테마파크처럼 조성됐었지.’
외국인 관광객 수가 10만 명이 넘어갈 경우, 관광진흥법에 따라 <관광특구>로의 지정이 가능하다.
관광 안내시설과 공공성을 가진 편의시설, 숙박 시설 등이 충분히 갖춰져 국제 관광객들의 관광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될 시.
국가 차원에서 지역사회에 지원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린벨트로 지정됐던 토지 중 일부가 특례법에 따라 해제되게 되고, 처음에는 작았던 세트장의 규모가 몇만 평 단위로 넓어지기도 했었다.
우진은 최종적으로 거기까지 보고 있었다.
‘공사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추가자금이 확보되면, 주변 토지도 전부 다 매입해버려야지. 드라마가 터지는 순간 일대가 전부 금싸라기 땅이 될 테니 말이야.’
아직은 도화지에 점을 하나 찍은 정도일 뿐이었지만, 우진은 이 큰 그림을 완벽하게 전부 그려낼 자신이 있었다.
그것은 결코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신 때문이 아니었다.
우진은 단지 이 거대한 그림이 완성되기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핵심요소 하나를 쥐고 있을 뿐이었다.
끼익-
회의가 끝나고 임성훈과 윤지예가 회의실 밖으로 나가자, 자리에 남아있던 진태가 우진을 향해 물었다.
회의실에는 둘밖에 남지 않았으니, 두 사람은 다시 편하게 대화를 시작하였다.
“우진아.”
“응?”
“프로젝트 내용 자체는 다 좋은데…….”
말꼬리를 살짝 흐리던 진태가, 조심스레 다시 말을 이었다.
“이게 네 생각대로 다 흘러가려면, 결국에는 드라마가 성공해야 되는 거 아니냐?”
우진이 반문했다.
“그건 당연하겠지?”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우진을 보며, 당황한 표정이 된 진태.
“드라마 흥행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찻잔을 한 모금 홀짝인 우진이 진태를 향해 빙긋 웃었다.
그리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당연하지.”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