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82화 (182/315)

182화

도약을 위한 준비

잊고 있었던 전생의 기억들이 떠오르며, 마치 톱니바퀴 맞물리듯 하나씩 큰 그림이 되어 굴러가기 시작한다.

‘KSJ엔터가 갑자기 급성장한 데에는 역시 이유가 있었구나.’

전생에서야 관심사가 아니었기에 그러려니 하며 지나쳤던 사건들이, 소정의 얘기를 듣는 순간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신생 기획사가 3년 만에 거의 최대 규모의 대형 기획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천년의 그대 정도 되는 잭팟이 아니었다면 어려운 일이었겠지.’

천년의 그대에 KSJ엔터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하필 이 <서울 숲 클라시아 포레스트>가 메인 촬영장 중 한 곳이 된 이유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석중은 우진과의 인연이 생기기 전부터 이곳 클라시아 포레스트의 펜트하우스 분양자였고.

카페 프레스코가 성공했든 그렇지 않든, 우진의 전생에서도 여기가 석중의 집이었을 게 분명했던 것이다.

‘석중 형님 집에 와본 강소정 대표가 여길 촬영지로 선택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협찬을 받았을 수도 있겠고…….’

하지만 우진의 머릿속에 떠오른 현재까지의 생각들이 단순히 재밌는 사실 정도라면.

소정의 <천년의 그대> 촬영을 위한 세트장 제작 제안은, 재미를 넘어 우진을 솔깃하게 할 만한 것이었다.

우진은 아직 그녀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어보지조차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세트장이라는 것이 뭘 말하는지 정확히 예상할 수 있었으니까.

‘아마 세트장 위치는 이천이겠지.’

2011년인 지금까지만 해도 이천시는 ‘이천 쌀’로 가장 유명한 도시였다.

하지만 <천년의 그대>가 방영되기 시작하는 2013년 이후, 이천에서 가장 유명해진 것은 <천년의 그대>의 드라마 세트장이었다.

천년을 넘게 살아온 남자주인공 ‘서후’가 처음 등장하는 곳이자, 드라마 내에서 시간 역행의 트리거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소인 천신궁.

이천에 지어진 천신궁의 세트장은 마치 하늘 위에 지어진 궁전처럼 몽환적인 분위기가 컨셉인 건축물이었다.

‘실제로 가보고 나는 엄청 실망했었지만…….’

사실 이천의 천신궁 세트장은 <천년의 그대>가 워낙 인기를 끈 탓에 유명해진 곳이었지, 건축적인 퀄리티가 높았던 세트장은 아니었다.

애초에 드라마 설정에 맞는 건축을 하기가 너무 어려웠던 곳이었기에, 실제로는 허술하게 지어놓고 대부분 CG로 때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년의 그대>가 워낙 흥행한 탓에, 이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인 이곳이 관광명소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

전생에 <천년의 그대> 팬이었던 우진은, 이곳에 놀러 왔다가 실망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물질적인 이득 같은 것을 떠나, 흥미가 동하는 것이 너무 당연했다.

‘이거, 재밌겠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들이댄다면 오히려 소정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진은 짐짓 모른 척하며 조금씩 운을 떼었다.

“뭐, 드라마 세트장 작업도 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죠.”

“오……! 그래요?”

“혹시 어떤 세트장이 필요하신 건데요?”

우진의 질문에 소정은 조금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세트장의 컨셉 자체가 워낙 난해했기 때문.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나온 설명은, 함께 있던 모두를 당황하게 할 만한 것이었다.

“그게……. 구름 위에 떠 있는 궁전이 필요해요. 구름으로 만들어진 궁전이죠.”

“네……?”

“뭐, CG로 최대한 커버하긴 할 테지만……. 세트장의 전반적인 느낌 자체가 그런 몽환적인 분위기여야 한다고 생각해 주시면 돼요.”

소정의 말에, 석중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애들 만화도 아니고, 구름 궁전이라고?”

수하도 동그래진 눈으로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게. 컨셉이 좀 과한 것 아냐? 세트장을 만들기도 힘들어 보이지만……. 그렇게 만들면 엄청 유치해 보이지 않을까?”

그 이야기들을 듣던 우진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 <천년의 그대>가 방영되었을 때, 가장 많이 나왔던 시청자 반응이 유치하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유치하지만, 채널을 돌릴 수가 없었다는 게 대다수 시청자들의 평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무후무할 정도의 시청률과 해외 수출기록을 남긴 전설적인 드라마였으니.

우진은 웃으면서 소정에게 물어보았다.

“궁전이라는 건, 어떤 궁전을 말하는 거예요?”

“네?”

“궁전의 이미지가 나라마다 다 다르잖아요. 자금성도 궁전이고 경복궁도 궁전이고. 묘지이긴 하지만, 인도의 타지마할 같은 이미지도 궁전의 일종이고요.”

우진의 반응이 의외였는지, 소정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일단 세계관상 한국 전통건축에 가까운 궁궐이긴 한데…….”

“그렇군요.”

“대표님은 놀라지 않으시네요?”

“왜요?”

“지금까지 제가 이 얘기를 꺼내면, 다들 수하나 석중 오빠 같은 반응이었거든요.”

우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반문했다.

“그래요? 난 재밌어 보이는데.”

“……?”

리아와 재엽이, 당황스런 표정으로 우진을 동시에 쳐다봤다.

두 사람은 아직 소정과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가 아니었으니,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유치한 컨셉이 재밌어 보인다고……?’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하지만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우진의 재밌어 보인다는 말에 소정은 뛸 듯이 기뻐하였다.

“우왓! 정말 그렇죠?”

“네, 그렇다니까요.”

“으히히, 역시 서 대표님은 통찰력이 있으셔!”

수하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핀잔을 주었지만 말이다.

“통찰력은 무슨……. 야, 서우진. 너 빈말 하는 거 아니지? 네가 이걸 재밌어 보인다고 해 버리면…….”

“빈말 아냐, 난 진짜 재밌어 보여.”

“그……래?”

우진이 싱긋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원래 건축하는 사람들은, 이것저것 좀 신선한 건축을 해보고 싶거든. 이런 신박한 프로젝트를 어디서 또 만나겠어?”

우진의 말이 끝날 즈음, 소정은 어느새 반짝이는 눈으로 우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사실 소정은, 이 이야기를 우진에게 처음 해보는 것이 아니었다.

드라마 세트장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업체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런 쪽으로 먼저 알아볼 만큼 알아본 것이다.

하지만 신생업체인 KSJ엔터에 제작비가 넉넉하게 있을 리도 없었고, 세트장의 컨셉 자체가 워낙 난해했으니.

대부분의 업체에서 소정은 거절당하고 말았었다.

[대표님, 이 예산이면 그냥 컨셉 없이 한옥디자인으로 평범하게 지어도 빠듯해요.]

[그, 그럴까요?]

[당연합니다. 아마 저희 말고 다른 쪽 찾아가셔도 다 똑같은 답변 들으실 거예요.]

[휴우…….]

[예산을 최소 2배 이상 늘려 오시거나, 아니면 컨셉을 좀 무난하게 바꿔주시거나……. 그게 아니라 무리해서 진행하시면, 아마 엄청 유치하고 허술하게 결과물이 나올 겁니다.]

사실 천신궁 컨셉의 가장 큰 문제는, 허공에 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그 부분은 CG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건축물 자체가 구름의 느낌(?)이 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구름 속에 파묻혀 있는 동화 같은 느낌이면서, 또 한국 전통의 궁궐같이 멋진 디자인이어야 한다는 아이러니한 컨셉.

전문가들 입장에서 이런 컨셉의 디자인은 유치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아주 최적화되어 있었고.

그래서 꺼릴 수밖에 없었다.

클라이언트들은 자신들이 요구한 조건이 어떻던, 결과물이 그럴싸하고 멋지지 않다면 클레임을 거는 게 보통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우진이라고 해서 이 세트장 제작이 쉬워 보일 리는 없었다.

다만 전생의 기억에서 봤던 세트장이 얼마나 허접하고 유치했는지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 퀄리티의 세트장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대박이 났었으니.

건축가로서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치 하나만으로도, 이 프로젝트에 관심이 가는 게 당연했던 것이다.

“뭐, 하늘의 옥황상제라도 사는 집인가 봐요?”

“그, 그게……. 비슷해요.”

“전체 세트장 규모는 몇 평 정도 생각하세요?”

“한 1500평 정도……?”

그래서 우진은 이런저런 부분들을 소정에게 물어보았고, 덕분에 같이 있던 사람들도 덩달아 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중에 가장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유리아였다.

‘<천년의 그대>면, 민우한테 출연 제의가 온 드라마로 아는데…….’

우진은 알지 못했지만 얼마 전 민우에게 <천년의 그대> 남자주인공 제의가 들어갔었고.

같은 소속사인 리아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거…… 괜찮은 드라마 맞겠지?’

사실 소정의 입에서 이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 민우에게 출연 제의를 반려하라고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설정이나 컨셉 자체가, 너무 유치해 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진이 흥미를 보이고 뭔가 하려고 하자, 왠지 이 유치함조차도 괜찮아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경험했던 우진의 촉(?)은, 도무지 실패하는 법이 없었으니까.

“제가 조만간 사무실에 찾아가겠습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그때 더 하도록 하시죠.”

“그…… 럴까요?”

그래서 석중과 우진의 집들이 모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프로젝트의 시발점이 되었고.

“이런 모임에서까지 일 얘기라니……. 진정한 일 중독자답다 서우진.”

“왜 이래, 형. 내가 얘기 꺼냈나? 소정 대표님이 먼저 얘기하셨지.”

“가벼운 얘기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게 너잖아.”

“아무튼!”

오늘의 일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될지는,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미래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우진조차도 말이다.

* * *

뜻밖의 이벤트가 있었던 우진과 석중의 집들이 날.

그날 이후로 우진의 일상은, 한동안 평범하게 흘러갔다.

당장이라도 우진에게 세트장 제작을 맡길 것처럼 얘기했던 소정은 바쁜지 한동안 연락이 없었고.

우진도 그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낼 만큼, 아쉬운 상황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정확히는 그날 일을 한동안 잊어버릴 정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상을 보낸 우진이었다.

“진태 형, 프레스코 수원역점 어제 마감 공사 들어갔지?”

“문제없이 잘 진행됐으니까, 걱정 마라.”

“하긴. 카페 프레스코만 벌써 수십 곳은 한 것 같은데……. 이제 눈 감고도 시공하겠네. 형은.”

“하하, 그 정도는 아니고.”

“서나헤어 쪽은 김 팀장님이 맡고 계시나?”

“응 거긴 아예 김 팀장 쪽으로 업무 다 돌렸어.”

“흐, 그럼 됐고……. 이제 오늘 남은 일은, 우리 사옥 현장 한번 들르는 거네.”

“오늘도 갈 거냐?”

“당연하지.”

“부지런하기는…….”

“어후, 벌써 퇴근 시간 지났네. 어떻게 정시퇴근하는 날이 하루도 없냐.”

“내 말이.”

직원이 작년의 다섯 배도 넘게 늘어난 WJ 스튜디오였지만, 항상 그랬듯 일손은 모자랐다.

물론 그렇게 바쁜 만큼, 매출도 계속 늘고 있었지만 말이다.

띵-!

진태와 함께 대표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탄 우진은, 시동을 걸고 사옥 현장으로 향했다.

요즘 우진의 일정 마지막은 항상 신사옥의 시공현장을 방문하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직접 걸음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현장에 처음 생겨났던 우진의 골든 프린트가, 사옥이 지어짐에 따라 조금씩 변하고 있었으니까.

우진은 처음 도면상의 골든 프린트만 디자인에 따라 변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최근에 깨달았다.

우진의 눈에만 보이는 현장의 금빛 홀로그램은 공사가 진행됨에 따라 지속적으로 그림자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었고.

우진은 그것을 매일 체크하며 공사가 잘 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공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도면과 틀어지면 우진이 설계한 빛의 패턴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으니.

골든 프린트를 통해서 더 꼼꼼하게 감시하게 된 우진이었다.

‘뭐 특별히 문제가 있었던 날은 없었지만, 그래도 확인하고 퇴근해야 내 마음이 편하니까.’

매일 바뀌어 나가는 골든 프린트를 확인하는 것은, 시공감리 차원인 것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골든 프린트를 보고 있노라면, 완성되어가는 WJ 스튜디오의 사옥이 더 실감 났으니 말이다.

밤낮없이 설계해서 만들어낸 빛의 공간을, 골든 프린트를 통해 조금씩 미리 엿보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시간이 늦었음에도 우진은 퇴근 전에 현장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오늘도 조금 바뀐 골든 프린트의 모습을 보며 뿌듯한 기분이 되었다.

‘크, 이쪽은 어제 없던 모양인 것 같은데.’

이런 속도로 공사가 진행된다면, 늦어도 내년 여름에는 거의 완성된 사옥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텅-!

문을 닫고 차에서 내린 우진은, 꽤 오랫동안 현장을 감상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한 10여 분 정도가 지났을까?

이제는 정말 퇴근하기 위해 다시 차에 오르려던 우진의 귓전으로,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여기 계셨네요!”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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