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도약을 위한 준비
마테오와 그의 직원들이 스페인으로 돌아간 뒤.
우진의 일상은 다시 평범하게 돌아왔다.
물론 평범하다 해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회사에서 간이침대를 깔아놓고 자는 등의 스파르타식 업무는, 이제 하지 않아도 됐던 것이다.
‘으……. 진짜 일정 맞춘 게 기적이지, 기적이야.’
보름 동안 집에 간 날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업무량을 소화해낸 탓에,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까지도 아침만 되면 온몸이 뻐근한 우진.
하지만 그럼에도 우진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일 덕에 브루노와 마테오라는 거물급 디자이너들과 더 친분을 돈독히 할 수 있었으며.
프로젝트 자체도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우진의 마음에 쏙 들었으니까.
마테오는 우진이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와 합이 잘 맞는 디자이너였다.
‘WJ 스튜디오의 단독 프로젝트였다면, 확실히 그런 스케일감 있는 디자인은 쉽지 않았겠지.’
게다가 한 가지 더.
유럽의 세계적인 건축디자인 컨퍼런스인 EAC에 두 거장의 이름으로 초대받았다는 사실은, 조운찬 교수마저도 부러워할 만한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 고생했다, 우진아. 보내준 투시도랑 조감도 봤는데, 정말 멋지게 잘 뽑혔더구나.]
“교수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죠, 뭐.”
[하핫, 별말씀을. 그건 그렇고 우리 서우진이. 정말 대단해. 나는 네 나이 때 영어 공부하면서 유학 생활에 적응하기 바빴는데 말이야.]
“제가 특별히 운이 좋은 사람이라서 말입니다. 하하.”
이번 프로젝트에서 조운찬 교수는, 숨겨진 가장 큰 조력자 중 한 명이었다.
우진을 도와 휘몰아치는 파도를 알고리즘으로 만들어낸 가장 큰 조력자가 석현이었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디자인을 실제 시공 가능한 설계로 뽑아내는 데 가장 큰 조언을 준 것이 바로 조운찬 교수였으니 말이다.
조운찬 교수는 이미 3차원 비정형 건축물인 DDP의 설계과정에서 산 마메스 스타디움만큼이나 거대한 규모의 페브리케이션을 실전에서 성공시킨 바 있었고.
이러한 경력이 있는 건축디자이너는, 전 세계를 통틀어도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여튼 클라이언트도 아주 흡족해 했다니 다행이구나.]
“마테오가 교수님께, 감사인사를 꼭 전해 달라 했습니다.”
[흐흐. 그래? 11월에 영국에 가면, 밥이나 한 끼 얻어먹어야겠어.]
“교수님도 EAC에 오시는 겁니까?”
[짜식이, 스승님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냐. 나는 원래 컨퍼런스 참석 예정이었지. 너처럼 브루노나 마테오에게 초청받지는 못했다만…….]
조운찬과 이런저런 대화를 좀 더 나눈 우진은, 기분 좋게 전화를 끊었다.
컨퍼런스에서 짧게나마 피티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일부러 조운찬에게 얘기하지 않았다.
브루노와 마테오의 제안이었으니 어지간하면 성사되겠지만, 그래도 아직 EAC 주최측으로부터 확답을 받지 못한 상황이었으니 설레발은 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뭐, 그때 가서 짠하고 서프라이즈를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출근해서 대표실에 앉자, 우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산더미 같은 결재 서류였다.
원래 우진이 운영하던 WJ 스튜디오는 결재방식이 전부 전자서명으로 되어 있었지만, 성진건설 쪽에서 들어오는 결재 서류들이 아직까지 일부 아날로그 방식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더 스마트했던 2030년에서 넘어온 우진과 달리, 80년대부터 나름 긴 역사를 가진 성진건설은 시스템 체계 자체가 고리타분한 것들이 많았고.
우진은 그것을 하나하나 고쳐나가며 천천히 WJ 스튜디오의 일부로 흡수하는 중이었다.
‘올해 연말정산만 끝나고 나면, 내년부터는 체질 개선을 확실하게 해야지.’
우진은 서류철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피며, 집중해서 일을 마무리하였다.
하여 그렇게 모든 서류들을 전부 확인하고 도장을 찍었을 즈음.
“대표님! 식사 안 하십니까?”
“먼저들 드세요. 저는 오늘 일이 좀 있어서요.”
“아, 그렇군요.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직원들은 전부 점심 식사를 위해 자리를 비웠고, 일을 마무리한 우진은 천천히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할 게 좀 더 남아있긴 하지만……. 오늘은 이만 퇴근해야지.’
1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는 시계를 힐끔 응시한 우진은, 기분 좋게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퇴근해 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
그가 일찍 퇴근하는 데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우진! 다 했어?”
“그래. 지금 나가자, 석구.”
“오케이! 바로 나올게!”
오늘은 우진이 회귀한 뒤, 처음 이사하는 날이었다.
* * *
서울숲 인근, 낙후된 빌라촌들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청록빛의 마천루.
주거 목적으로 지어진 주상복합임에도 불구하고 외관 전부가 커튼월로 마감된 멋들어진 건물의 꼭대기에서,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의 흥분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야. 여기가 우진이 새집이라는 거지?”
“왜, 석구. 부럽냐?”
“아니. 사실 막 그렇게 부럽진 않아.”
“오호.”
“이렇게 좋은 집이 나한테 무슨 소용이냐.”
“그럼 뭐가 소용 있는데?”
“헤헤. 나는 우리 대표님이 주시기로 한 차 키만 있으면 돼.”
“그놈의 차는 진짜…….”
성수동에 지어진 최초의 프리미엄 주상복합인 <서울 숲 클라시아 포레스트>는 9월부터 이미 입주를 시작한 상태였다.
하지만 뜻밖의 프로젝트로 인해 우진이 한동안 워낙 바빴다 보니, 10월이 된 이제야 비로소 새집에 입주할 수 있게 됐던 것이다.
개포동의 주공아파트를 매도한 것은 아니었다.
우진과 어머니의 추억이 담긴 주공아파트는 어머니 명의 그대로 남겨 두었고.
그것은 2019년쯤 번쩍거리는 새 아파트가 되어, 어머니의 노후를 책임져 줄 예정이었다.
“와. 요즘 진짜 세상 좋아졌다. 이사하는 게 이렇게 편하다니. 센터에서 그냥 알아서 다 해주네?”
“Bloody Hell! 어차피 전부 포장이사 하면서, 대체 이 제이든 님을 왜 부른 거야?”
뒤늦게 도착한 제이든까지 합세해서 떠들기 시작하자.
이삿짐센터의 직원들이 전부 빠져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널찍한 우진의 새집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이사 끝나면 같이 짜장면 먹을 사람은 있어야지.”
“What?”
“그게 제이든의 역할이야. 아주 중요한 일이지.”
“우진의 앞에서 짜장면을 맛있게 먹어주는 거?”
“데츠 롸잇.”
우진의 저렴한 발음에 눈살을 한 번 찌푸려 준 제이든이, 방방거리며 날뛰기 시작하였다.
“젠장! 제이든 같은 고급 인력을 이런 일로 불러내다니!”
하지만 제이든은 언제나처럼 우진에게 금세 제압될 수밖에 없었다.
우진은 지금 제이든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한 가지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짜장면이 먹기 싫다면 집에 가도 좋아. 대신 11월 컨퍼런스에 갈 때, 제이든은 데려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말도 안 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우진.”
“왜?”
“영국은 이 제이든 님의 나라라고! 우리 집이 거기에 있어!”
“영국이야 올 수 있겠지만, 컨퍼런스에는 결코 들어올 수 없겠지.”
“Holy…….”
“억울하면 얌전히 짜장면을 먹으면 돼. 제이든.”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얘기하는 우진을 보며, 제이든은 분한 표정으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 관대한 제이든이 한 번만 참아주도록 하지.”
그런 그를 보며, 우진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한강과 서울숲이 보이는 45층 아파트 거실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서 짜장면을 먹을 기회는, 그렇게 흔한 게 아니거든.”
이사는 전부 끝났지만, 우진의 어머니 주희는 아직 새집에 도착하지 못했다.
오늘은 개포동에 있는 그녀의 수제비 칼국수 집이, 마지막 영업을 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WJ 스튜디오 신사옥에 입점하기로 한 새 가게가 오픈하기까지는 거의 일 년 가까운 시간이 남아있었지만.
우진의 강력한 주장으로, 주희는 한동안 일을 쉬기로 하였다.
우진은 신사옥이 완공되기 전까지 어머니께서 푹 쉬시면서 기력을 회복하시길 바랬다.
‘그냥 쭉 쉬셨으면 좋겠지만……. 그럴 리 없는 분이시니까.’
어쨌든 그런 이유로.
거의 60평에 가까운 넓은 아파트 거실에서 짜장면을 먹는 것은, 우진을 비롯해 혈기왕성한 세 청년뿐.
제이든은 언제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냐는 듯, 그새 신나서 짜장면을 흡입하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우진, 영국에 가면, 이 제이든 님의 뒤만 따라다녀야 할 거야.”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관대한 제이든 님이 무려 가이드 역할을 해주겠다는 말이지.”
“가이드……?”
“설마 런던까지 가서, 컨퍼런스만 달랑 참석하고 돌아올 생각이었어?”
“일정상 아마 그렇게 될걸……?”
“Holy! 그럴 순 없어 우진. 최소한 프리미어리그 한 경기는 보고 와야지.”
“나도 제이든의 말엔 동의해, 대표님. 축구경기를 최소 한 경기 이상 보지 않는다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어.”
“차 키야, 프리미어리그야. 선택해 석구.”
“Bloody Hell!”
두 친구와 어울리며 여느 때처럼 실없는 소리를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우진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홀가분하고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머리를 비우고(?) 친구들과 떠들 때면, 열정적으로 일할 때 느낄 수 없었던 또 다른 행복함을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해서 다 먹은 짜장면을 치우고 두 친구와 함께 가장 먼저 컴퓨터를 방에 설치한 우진은.
오랜만에 둘과 함께 게임도 한 판 했다.
어쩌면 20대 초반의 대학생에게는 너무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
하지만 우진에게만큼은, 작은 일탈과도 같은 것이었다.
“제이든. 설마 지금 우진이한테 진 거야?”
“그럴 리가.”
“그럼 여기 모니터에 대문짝만하게 떠 있는 <패배>는 뭔데?”
“제이든은…….”
“관대하다고?”
“제기랄. 모델링 공부를 한다고 그동안 게임에 너무 소홀했을 뿐이야.”
게임을 하며 투닥거리다 보니, 가게 셔터를 내리고 퇴근하신 어머니도 집에 들어오셨다.
“오, 우진이 와 있었니? 석현이도 있었구나?”
“앗! 안녕하세요, 어머니!”
“아. 엄마 왔어요?”
그리고 멀대같은 영국인을 발견한 그녀는, 조금 당황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릴 적부터 우진의 친구였던 석현은 주희와도 안면이 있었지만, 제이든은 처음 봤던 것이다.
“여기 이 친구는 누구……?”
그리고 제이든은, 그녀에게 아주 강렬한 첫인상을 심어주었다.
“안녕하세요. 우진의 불알친구 제이든이예요.”
“으응……?”
‘불알친구’라는 단어를 Best Friend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던 제이든이, 한바탕 웃음을 선사한 것이다.
“우진아. 너 어릴 때 외국인 친구를 사귄 적이 있었니?”
“아, 그게 엄마…….”
어이없는 표정이 된 석현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고.
“크흐흐흑……!”
영문을 모르는 제이든은 빨개진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학교에서 친해진 동기예요. 제이든이라고……. 원래 조금 특이한 친구라서 그래요.”
어쩔 줄 몰라 하는 제이든의 모습이 귀여웠는지 주희도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우진은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첫날부터 화기애애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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