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우진의 솔루션
원래 마테오는 한국에 3일 정도만 머물 생각이었다.
브루노가 이야기하는 그 한국의 젊은 건축가를 만나는 데에는 하루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첫날은 오랜만에 만난 브루노와 회포를 풀고 둘째 날은 한국의 건축가를 만난 뒤 셋째 날에 다시 스페인행 비행기를 탈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마테오의 그 계획은, 완전히 바뀔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건축가 우진은 그가 상상했던 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그의 설계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이었고.
그래서 아예 기본설계 작업 자체를 한국에서 하게 된 것이다.
모든 인프라가 스페인에 있는 상황에서 이런 결정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우진을 만난 날 비행기 표를 바로 취소해버린 마테오는, 곧바로 스페인에 전화를 걸었다.
[이번 스타디움 프로젝트 진행하던 설계 팀 인원 추려서 3일 내로 한국행 비행기를 타도록 해.]
[대표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국에서 해답을 찾았다네.]
[예?]
[설명은 얼굴 보고할 테니, 여덟 명 정도 인원 추려서 한국으로 보내도록.]
비행기 표에 직원들의 숙박비, 식대까지.
출장비용만 해도 원화로 수천만 원 단위의 비용이 깨질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 치 망설임 없이 이 모든 결정을 내린 것이다.
물론 우진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단독 결정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설계 전반에 걸쳐 도움을 주겠다는 제안은 우진이 먼저 한 것이었고.
그 이야기를 들은 뒤에 마테오의 결정이 이뤄진 것이었으니까.
“정말 흥미로운 프로젝트입니다, 마테오.”
“그렇습니까?”
“이런 거대한 건축물에 비정형 파사드를 디자인해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지간한 건축가에게는 평생 오지 않을 기회니까요.”
“하하.”
“이렇게 파격적인 디자인을 원하는 클라이언트도, 사실 잘 없지 않습니까?”
“이거 부끄럽습니다. 저는 비정형 건축만 고집하는 클라이언트를 속으로 욕하기 바빴는데 말입니다.”
설계를 도와주겠다는 이야기를 우진이 먼저 꺼낸 것은, 우진의 입장에서는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디지털 건축에 대한 갈증에 끊임없이 목마른 우진에게는, 이런 건축설계에 참여해볼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매력적인 기회였던 것이다.
“제가 아직 이만한 규모의 건축설계를 해본 적은 없지만……. 패러메트릭 디자인을 접목한 건축설계 측면에서는 마테오에게 확실히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진. 생면부지 외지인인 제게 이렇게 선뜻 도움을 주신다고 하니……. 너무 감사하고 또 죄송스럽군요.”
“하하, 그렇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제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으니 말입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우진이 직접 도면을 그리고 디자인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진에게 그렇게까지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것은 프로젝트의 디렉터인 마테오에게도 실례가 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다만 우진이 마테오에게 해주기로 한 것은, 마테오가 제시하는 디자인을 패브리케이션(Fabrication)할 수 있도록, 그 때 그 때 솔루션을 제시해주는 정도였다.
물론 이것만 해도 꽤 큰 노력이 들어가는 작업이겠지만.
마테오라는 세계적인 건축가의 작업물에 메인 서포터로 이름을 올릴 수만 있더라도, WJ 스튜디오의 위상에 큰 도움이 될 것은 자명할 터.
하지만 오히려 마테오의 생각은 우진과 달랐다.
“우진, 정말 감사합니다. 공동설계자에 WJ 스튜디오와 당신의 이름을 올려드리겠습니다.”
“아, 그렇게까지는 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포터 정도로만 이름 올려 주셔도…….”
“아닙니다. 우진이 아니라면 저는 어디에서도 이런 도움을 받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야…….”
“설계 비용도 확실하게 쉐어 해 드리겠습니다. 실무자가 한국으로 넘어오는 즉시, 계약서를 보여드리도록 하지요.”
마테오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금전적인 어떤 이익을 크게 남길 생각이 없었다.
이미 수많은 건축설계로 이름을 알린 마테오는 물질적으로는 부족할 것이 별로 없었고.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커리어를 더 빛내줄 수 있을 만큼 훌륭한 포트폴리오였으니 말이다.
우진이 아니었다면 아예 드랍 되었을지도 모를 이번 프로젝트.
우진의 작업물을 보고 디지털 건축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 이번 프로젝트를 살려낼 수 있고 나아가 더 멋진 결과물을 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마테오로서는 우진에게 이만한 지분을 할애하는 게 결코 아깝지 않았다.
“이거, 제가 더 열심히 해야겠군요.”
“하하, 부담 드리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된 이상, 밥값은 해야지요.”
그렇게 아주 급작스럽지만, 마테오와 우진의 콜라보가 시작되었다.
공동 디자이너로 등재되는 것은 물론 기본설계 페이에 대해 일정 부분을 할애해준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으니.
우진은 협업이 진행되는 동안 WJ 스튜디오의 인프라까지도 어느 정도 투입할 생각이었다.
그 ‘인프라’에는, 당연히 석현도 포함되었다.
“석구, 도와줄 거지?”
“어차피 업무 시간에 하는 거잖아. 당연히…….”
“아니, 단지 업무 시간은 아닐 거야.”
“홀리…….”
“한 보름 정도……? 어쩌면 당직실에서 나랑 같이 자야 할지도 모르지.”
“젠장!”
처음에는 야근이라는 이야기에 우울한 표정이 됐었지만…….
“대신 스타디움의 설계자 명단에, 네 이름도 올려달라고 마테오에게 이야기해볼게.”
“뭐? 그게 정말이야?”
“디자이너에 이름 올리는 것은 힘들겠지만, 서포터의 명단 가장 위에 네 이름을 박아줄게.”
“산 마메스 신축 구장 설계자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간다는 거지?”
“바로 그거지. 인센티브도 빵빵하게 지급해 줄 거고.”
“……!”
결국 우진이 제시한 매력적인 콩고물을, 석현은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까지 마무리되고 나면……. 법인 차 한 대 새로 뽑아서 너한테 차 키 줄게. 콜?”
“미친! 그거 정말이지?”
“물론.”
“만약 이번에도 연비 타령을 한다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차종 선택권도 네게 주도록 할게. 말도 안 되게 비싼 차만 아니라면…….”
“젠장, 이건 녹음해야 해.”
“내가 한 입으로 두말 안 하는 거 알잖아.”
“대표님. 사랑합니다.”
“그럼 도와주는 거지?”
“두 번 말하면 입 아프지.”
“오케이, 딜!”
“딜!”
그리고 이렇게 여러모로 의욕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산 마메스 구장의 설계 프로젝트는 우진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 * *
<올라스 페로시스(Olas feroces)>
마테오와 우진의 이름이 올라간 산 마메스 구장의 새로운 이름.
이것은 한국어로, ‘맹렬한 파도’ 라는 뜻을 가진 스페인어였다.
“빌바오 사람들의 축구에 대한 열정을, ‘맹렬히 몰아치는 파도’에 빗대어 표현해 보았습니다.”
“하하, 아주 멋집니다, 마테오. 말씀하신 대로 스포츠에 대한 열정이 아주 잘 표현된 디자인이 나온 것 같습니다.”
“이게 다 우진 덕분이지요.”
“아닙니다. 제가 한 거야 패브리케이션에 대한 솔루션을 제공한 것뿐. 디자인 전반의 디렉팅은 마테오가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만……. 우진이 아니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던 디자인이었다는 게 사실이지요.”
완성된 스타디움의 설계도를 펼쳐논 우진과 마테오는, 한없이 뿌듯한 표정으로 서로를 칭찬하였다.
그리고 서로를 향한 그 칭찬들에는, 조금의 위선이나 거짓도 담겨있지 않았다.
마테오는 생각보다 더 열정적이고 뛰어난 우진의 능력에 감탄했으며.
반대로 우진은 마테오의 설계 디렉팅 방식과 디자인 프로세스를 경험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으니 말이다.
‘확실히 그의 명성이 가짜는 아니었어. 이런 거대한 규모의 건축에서 이 정도의 조형감과 공간감을 표현해 내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은 아닌데 말이지.’
그래서 두 사람은,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헤어짐이 아쉬웠다.
보름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스타디움 프로젝트의 기본설계를 함께하면서.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부분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는 사실을 느낀 것이다.
하여 마테오가 서울에 머무는 마지막 날.
용산에 있는 마테오의 숙소에 초청받은 우진은, 두 스페인의 건축가와 저녁을 함께하였다.
마테오가 머무르는 호텔에는 그의 통역사도 함께 머물고 있었기에, 다행히 소통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스페인에서는 답변이 날아왔습니까?”
“답변이라면…….”
“파블로 회장이 이 설계를 마음에 들어 했는지가 궁금해서 말입니다. 하하.”
우진의 물음에, 마테오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합니다. 그는 제가 디자인했던 최초의 설계만으로도 만족했었습니다. 우진의 도움 덕에 훨씬 더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으니, 파블로 회장의 마음에 들지 못할 리가 없지요.”
“그거 참 다행입니다.”
우진의 멋쩍은 웃음에, 이번에는 브루노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 또한 이미 완성된 설계와 투시도를, 마테오를 통해 봤던 것이다.
“그런 멋진 디자인을 거부할 클라이언트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우진. 디지털 건축기법이 이렇게 멋진 분야인 줄 알았더라면, 아마 저도 이번 프로젝트에서 우진과 공동설계를 제안했을 겁니다. 하하.”
마테오의 숙소에서 이야기 나누던 세 사람은, 브루노가 디자인한 호텔인 글래셜타워의 라운지로 자리를 옮겨 밤늦게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전부 끝나갈 때 즈음.
우진은 두 건축가로부터, 한 가지 제안을 받을 수 있었다.
“우진, 혹시 올 8월에 예정되어있었던, EAC라는 컨퍼런스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EAC라면……. 유럽의 건축디자인 컨퍼런스 말씀이신가요?”
“오, 알고 계시는군요.”
“세계적인 건축디자인 컨퍼런스 아닙니까. 당연히 알고 있지요.”
EAC라는 얘기를 들은 우진의 두 눈이 반짝였다.
우진도 눈치가 아주 없는 편은 아니었기에,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EAC는 보통 여름에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올해는 지났을 테고 내년에 초대해주려는 건가?’
하지만 다음 이야기를 들은 순간, 우진의 두 눈이 살짝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브루노의 입에서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혹시, 올해 컨퍼런스가 밀렸다는 사실도 알고 계신지요.”
“네?”
이번에는 마테오가 말했다.
“올해 EAC는 원래 영국에서 8월 열리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런던에서 시위가 크게 일어나는 바람에, 11월로 밀리게 되었지요.”
“그런 일이…….”
두 건축가의 말이 이어질수록, 우진의 심장박동수는 점점 더 빨라졌다.
“우진만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이번 컨퍼런스에 함께하셨으면 해서 말입니다.”
마테오의 말이 끝나자, 브루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단순히 게스트로 초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진. 제 프로젝트와 마테오의 프로젝트를 함께한 조력자로서, 이번 컨퍼런스에 함께 해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브루노의 말이 끝난 순간, 우진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올해 컨퍼런스에 두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특별한 경험도 없을 테니 말이다.
두 거장의 조력자로서, 그리고 어엿한 하나의 건축가로서 컨퍼런스에 참여하는 것은, 단순히 초대받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였다.
“감사합니다, 브루노. 그리고 마테오. 두 분이 초대해주신다면, 바쁜 일이 있더라도 당연히 가야지요. 아니, 무조건 가도록 하겠습니다.”
흥분한 우진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항상 두 사람에게 놀라움만 선사하던 이 어린 디자이너에게서,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한 것 같았으니 말이다.
브루노를 슬쩍 응시한 마테오가 한쪽 눈을 찡긋하였다.
두 사람은 아직, 우진에게 해줄 이야기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마테오의 입이 천천히 떼어졌다.
“그리고 우진. 제가 한 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힌 우진이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대답했다.
“말씀하세요, 마테오.”
웃음 띈 얼굴로 그를 잠시 응시하던 마테오가, 은근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컨퍼런스에서, 한 타임 정도 프레젠테이션을 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네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파격적인 이야기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버린 우진.
그런 그를 향해 빙긋 웃어 보인 마테오가, 잠시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디지털 건축의 가능성과 패러메트릭 디자인의 아름다움에 대해……. 유럽의 건축가들에게 공유해주셨으면 합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