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78화 (178/315)

178화

우진의 솔루션

지금 마테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방법론’이다.

멋진 디자인, 특별한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이미 준비된 상태였으니까.

처음부터 그의 클라이언트인 아틀레틱 클루브 구단에서는 그가 스케치하고 디자인했던 비정형 건축의 디자인을 마음에 들어 했었다.

아무리 민족주의가 심한 바스크 지역의 클라이언트라 하더라도, 바스크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고용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문제가 된 부분은, 마테오가 회장의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뽑기 위해 다소 파격적인 컨셉 디자인을 제시했다는 점이었다.

마테오는 실시설계과정에서 현실성 있는 구조로 조금씩 바꿔가며 설계하려고 생각했던 거였지만, 그의 클라이언트는 원안 그대로의 비정형적 아름다움을 살리지 못한다면 용납할 수 없다고 못 박아버린 것이다.

하지만 마테오가 이제껏 해왔던 설계방식으로는 도저히 기존의 컨셉 설계를 완벽하게 재현해낼 수 없었다.

하나의 축이 아닌 두 개의 축으로 굽어진.

정확히는 꽈배기처럼 뒤틀린 형태의 곡면설계는, 평면적인 도면으로 표현 가능한 범주가 아니었으니까.

스타디움이라는 건축시설물이 가지는 정형화된 기능을 핑계로 수 많은 설득을 해 봤지만.

그런 핑계들은 역시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젠장. 단순한 조형물도 아니고 스타디움처럼 거대한 규모의 건축에서……. 3차원 곡면을 사용할 수 있는 건축가는 스페인 어디에도 없을 거야.’

그래서 얼마 전에는 이런 생각도 잠시 했었다.

그냥 못하겠다고 계약을 파기해버리고, 3차원 곡면을 설계할 수 있는 다른 건축가를 찾아보라고 으름장이라도 놓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뿐. 그것은 마테오의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건축을 하면서 지금보다 훨씬 더 막막했던 적도 많았지만, 결국에는 그것을 다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올라온 건축가가 바로 그였으니까.

‘최후에 아쉬운 소리를 한 번 더 해보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고 생각하자.’

하여 이렇게 막다른 길에 놓여있던 마테오에게 우진이 보여준 가능성은 한 줄기 빛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동양의 어린 건축디자이너가 제작했다는 파빌리온에는 3차원 곡면이 적용된 파츠가 곳곳에 들어가 있었고.

심지어 일정한 규칙에 의해 인터렉티브하게 변화하는 특별한 패턴이, 그 곡면의 위에 덧씌워져 있었으니까.

이것은 그가 지금 고민하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넘어서, 그의 디자인을 한 단계 디벨롭시켜 줄 수도 있을 정도로 혁신적인 구조였다.

“이 알고리즘에 들어가 있는 세 개의 파라미터(Parameter)는, 하나의 패널을 이루는 네 꼭지점의 좌표값을 배열로 나타낸 겁니다.”

때문에 우진의 입에서 지금 나오고 있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마테오에게 있어 주옥과도 같은 것이었고…….

“그리고 이 두 번째 줄에 연결되어있는 함수는, 꼭짓점과 꼭짓점을 잇는 곡선을 생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벡터(Vector) 값이지요.”

덕분에 실마리를 찾아낸 마테오의 엉덩이가 들썩이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런식으로 삼차원 곡면이 가지고 있는 모든 요소를 하나의 패러미터로 치환시켜 수치를 뽑아내고, 그 수치가 브루노가 설계한 빛의 흐름에 영향을 받도록 설계된 것이 제 파빌리온 모델링의 핵심 알고리즘입니다.”

모든 설명이 다 끝났을 때, 마테오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우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설계방식 자체가 이해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큰 틀에서 방향성 정도만 이해한 것일 뿐, 머리가 복잡하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하여 마테오가 우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곱씹는 사이, 브루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우진의 이야기는……. 이 모든 다이아몬드 패턴과 삼차원 곡면 패널들이 뒤틀린 정도가, 제가 설계한 빛의 흐름과 가까워질수록 더 커진다는 의미가 맞습니까?”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브루노.”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요?”

“빛의 흐름을 가상의 곡선으로 만들어서 삼차원 공간 안에 그리고……. 모든 패널의 중심 좌표가 그 가상의 곡선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거리로 계산했습니다.”

“그다음에는요?”

“그 거리의 최대값과 최소값을 곡면이 뒤틀리는 정도에 대입하여, 가장 먼 곳에 있는 곡면 패널은 가장 조금 뒤틀리고,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곡면 패널은 가장 많이 뒤틀리도록 설계된 겁니다.”

“그런 것이 가능하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우진.”

“하하, 아닙니다 브루노. 사실 저는 이 비주얼 스크립트를 활용한 모델링 툴을 개발한 개발자가 존경스럽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덕분에 이런 특별한 디자인이 가능했던 거니까요.”

우진의 겸손한 대답에 브루노는 고개를 저었다.

툴은 어디까지나 툴일 뿐.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디자이너였으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진. 툴이 새로운 방법을 제시해줄 수는 있겠지만, 결국 근본적인 방법론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람이지요.”

“하하, 그런가요?”

우진의 디자인이 완전히 마음에 든 탓에, 오늘 미팅의 목적이었던 설계에 대한 의견 조율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

물론 우진의 파빌리온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기존 설계를 조금씩 변경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총괄 디렉터인 브루노도 우진의 파빌리온 모형을 최대한 살리고 싶어하고 있었으니, 우진으로서는 이야기를 나누기가 무척이나 수월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논의가 전부 다 끝났을 때, 회의실 내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훈훈하였다.

“오늘 우진 덕분에 또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경험하게 되었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이 늙은이가 오늘 경험한 것을 습득해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기회가 닿는다면 저도 이런 디자인을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우진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말씀 주시지요.”

“후후, 그게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우진의 이야기에, 브루노는 잠시 그의 친구 마테오를 응시하였다.

사실 우진의 도움이 그 누구보다 절실하게 필요한 친구가 바로 마테오였으니까.

“혹시 우진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제가 아니고 여기 마테오여도 괜찮겠습니까?”

이미 마테오가 한국으로 오게 된 전말을 전부 알고 있는 우진은 브루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고.

때문에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은 처음부터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갈 것을 알면서 말을 꺼낸 것인지도 몰랐다.

“그럼 시간이 꽤 지났으니, 저녁 식사 후에 그 이야기를 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 이야기라면…….”

“산 마메스 구장에 대한 이야기 말입니다.”

“……!”

“저도 사실 아까 많이 궁금했는데, 해야 할 이야기들이 많아서 더 묻지 않았었거든요.”

“오오.”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군요.”

우진의 말이 끝나자, 마테오는 반색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아주 의욕적인 표정이 되어,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저녁은 제가 사겠습니다. 이 근방에서 가장 비싼 레스토랑으로 가시지요.”

흥분한 마테오의 목소리에 브루노는 껄껄 웃었고, 그렇게 그들 일행은 성수동에서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마테오가 말한 것처럼, 우진이 아는 한 가장 비싼 음식점에서 말이다.

* * *

아틀레틱 클루브의 회장 ‘후안 파블로(Juan Pablo)’는, 최근 심기가 꽤 불편했다.

홈 경기장의 신축이라는 그의 숙원사업 일정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의 마음에 쏙 드는 스타디움 설계안이 아직까지도 나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마테오 비야’라는 빌바오 출신인데다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진 건축가를 처음 섭외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런 상황은 생각지 않았었다.

그가 들고 온 컨셉 스케치는 처음부터 파블로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 그림대로만 스타디움이 지어진다면, 아틀레틱 클루브는 스페인에서 가장 멋진 경기장을 가지게 될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가 믿고 있던 건축가는 자신이 보여줬던 그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구조라며 조금씩 그림을 바꿔서 내놓았고.

그것은 파블로가 볼 때 팥 없는 찐빵과도 같은 모습이 되어버렸다.

그가 마테오의 디자인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부분들.

실시설계과정에서 빠져야 한다고 하는 부분들이, 정확히 그 포인트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파블로는, 마테오에게 독설을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마테오. 이런 디자인의 스타디움은, 스페인이 아니라 유럽 어딜 가도 널렸습니다.”

“…….”

“제가 원했던 특별한 디자인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닙니다.”

“후우. 알겠습니다, 파블로.”

“기존에 제게 보여주셨던 디자인으로, 어떻게든 설계를 해 오시길 바랍니다.”

마테오는 다시 해답을 찾아오겠다 했지만, 파블로는 이제 그가 미덥지 못했다.

세계적인 건축가라던 그의 위상조차도, 의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밋밋한 설계로 새 구장을 지을 거였으면, 차라리 동네 목수를 고용하는 게 나을 뻔했어.’

그래서 그가 마테오에게 주었던 날짜가 다 지난 오늘.

구단 메일을 통해 마테오의 설계가 도착했지만, 파블로는 별다른 기대가 없었다.

구단 회의실 스크린에, 설계 파일이 떠오르기 직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이번에도 성에 차지 않는다면, 그냥 그와의 계약을 파기해야겠어.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사업에 타협이 있을 수는 없지.’

본인은 설계발표 현장에 나타나지도 않았으니, 자신이 없어서 내뺐다고 생각한 것이다.

보나 마나 밋밋한 평면설계를 가지고 올 것이라 생각한 것.

“회장님. 일단 투시도부터 먼저 올리겠습니다.”

“편할 대로 브리핑하시지요.”

하지만 다음 순간.

마테오의 설계사무소에서 나온 직원이 스타디움 파사드의 디자인이 담긴 투시도를 열었을 때.

“……?!”

의자를 뒤로 푹 누인 채 심드렁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던 파블로는, 콧잔등에 흘러내리고 있던 안경을 반사적으로 치켜 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게 무슨……?”

투시도에 떠올라있는 설계 디자인의 형상이, 마테오가 처음 보여줬던 컨셉 설계를 그대로 구현해냈기 때문은 아니었다.

새롭게 마테오가 들고 온 디자인 시안은, 이전의 그 느낌이 살아있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구조와 형태를 가진 스타디움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블로는, 더 이상 마테오와의 계약을 해지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이것이……. 마테오가 설계한 새로운 스타디움입니까?”

“그렇습니다, 회장님. 대표님께서 직접 오지 못해서 죄송하시다고…….”

이것은 처음 파블로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 디자인이 아닐지언정.

그것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특별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으니 말이다.

“마, 마테오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대표님은 한국에 계십니다. 그곳에서 엊그제 설계를 보내오셨습니다.”

“예……? 거긴 왜……?”

“3차원 설계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가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경기장을 휘감고 있던 벽체의 뒤틀린 3차원 곡면들은 사라졌지만, 대신 스타디움을 덮고 있는 거대한 천장이 마치 파도치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스타디움의 중심부를 시작으로 파도치듯 격렬하게 꿈틀대는 천장의 형태는 외곽에 가까워질수록 잔잔한 물결이 되어 잦아들었고.

종래에는 담백한 물줄기가 되어, 벽체를 타고 흘러내리는 모양새였다.

파블로의 눈에 비친 그것은…….

단어 그대로 예술 그 자체였다.

‘아름다워.’

숨막히는 표정으로 스타디움을 감상하는 파블로.

그를 잠시 지켜보던 사무소의 직원이,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회장님. 대표님께서 말씀하시길…….”

“예?”

“오늘은 이 투시도를 보여드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하.”

기분 좋게 웃는 파블로를 향해, 남자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설계에 대한 브리핑은 본인께서 직접 하고 싶다 하셨습니다. 혹시 일주일 정도만 더 여유를 주실 수 있겠느냐고…….”

직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파블로가 대답하였다.

“물론입니다. 그에게 전해 주십시오. 이런 스타디움을 지을 수 있다면,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이라도 더 기다려줄 수 있다고 말입니다.”

말을 하는 와중에도 파블로의 시선은, 단 한 순간도 스크린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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