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Fabrication
마테오는 처음, 브루노의 말을 완전히 믿지 않았었다.
[자네가 원하는 그 3차원 설계에 대한 솔루션이, 한국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네.]
“3차원 설계 기법에 정통한 건축가가 한국에 있다는 건가?”
스페인에 있는 그의 수많은 인맥들 중에서도, 지금 그의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는 이가 없었으니 말이다.
[뭐, 어느 정도는 비슷한 맥락으로 봐주면 돼.]
“음……?”
[내가 지금까지 봐온 그 디자이너의 작업물들을 보면, 분명 그쪽으로 능력을 가진 친구거든.]
마테오의 스페인 업계 인맥들은 대부분 건축업계에서 메이저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런 그들조차 고개를 저은 부분이 바로 비정형 건축디자인과 그것을 구현해내기 위한 삼차원 설계기법.
“어떤 분인지 혹시 물어봐도 되겠나?”
[방금 말한 대로 우리와 같은 건축가라네. 조금 특별한 점이 있다면……. 나이가 아주 어리다는 것이지.]
“나이? 얼마나 어리기에 그러는가?”
[이십 대라는 사실만 알고 있네.]
“……!”
게다가 나이까지 이렇게 어리다는 말을 들었으니, 마테오가 곧바로 믿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수준이었던 것이다.
‘이십 대라니. 동양의 20대 건축가에게, 비정형 3차원 설계를 할 능력이 있다는 건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테오는 한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한국으로 가면……. 자네가 이야기한 그 친구를 만나볼 수 있는 건가?”
[물론일세. 나와 함께 복합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건축가거든.]
“오호.”
지금 그의 상황 자체가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수준이었으며.
그 건축가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브루노라는 오랜 친우의 말에 대한 무게감이 그를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브루노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한다면 분명히 이유가 있겠지. 게다가 그와 협업 중인 건축가라면…….’
그가 아는 브루노는 결코 가벼운 사람이 아니다.
그런 그가 추천한 누군가라면, 적어도 마테오 자신이 헛걸음하게 할 만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설령 지금 그에게 필요한 해답 그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어떤 돌파구를 제시해 줄 만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테오는, 브루노와의 전화를 끊기도 전에 곧바로 한국행을 결정했다.
“바로 비행기 표를 알아보겠네.”
[후후. 잘 생각했다네. 역시 자네 추진력은 알아줘야 해.]
“이 마테오가 원래 추진력 빼면 시체 아니던가.”
[사실 이번 컨퍼런스 일정이 밀리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 친구를 데리고 스페인으로 가려고 했었는데, 타이밍이 조금 꼬였군, 그래.]
“아하. 그랬다면 정말 좋았겠는데…… 조금 아쉽군.”
[뭐, 어쩌겠어.]
그리고 그 한국행 일정에 맞춰서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머릿속으로 다음 스케줄까지도 빠르게 조율하였다.
[그럼 한국으로 들어오는 날짜는 대략 언제쯤이 될 것 같아?]
“일정을 확인해 봐야겠지만, 아무리 늦어도 10월 전에는 들어갈 거네.”
[오호. 10월에는 무슨 일이 있나 보지?]
“10월 말 전에는, 회장에게 최소한의 방향성을 제시하기로 했거든.”
[그렇군. 좋네. 그럼 일정 나오면, 내게 다시 연락 주시도록 하게.]
“고맙네, 브루노.”
[별말씀을.]
그렇게 마테오는 한국행을 결정했고, 오늘 이렇게 브루노와 함께 WJ 스튜디오에 오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에 들어와서 성수동까지 걸음 하면서도, 아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그저 이 특별하다는 건축가와의 만남을 통해, 구단 회장을 만족시키는 데 도움 될 만한 작은 아이디어 하나라도 얻어 간다면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젊고 열정적인 디자이너들은 항상, 창의적이고 특별한 영감을 떠올리게 해주니까.’
하지만 우진과 인사를 나눌 때만 해도 변함없던 마테오의 이 생각은, WJ 스튜디오의 회의실에 들어선 순간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하. 마테오의 방문이 조금 당황스러우셨나 보군요.”
“당황은요. 귀한 손님을 맞을 수 있어 영광이지요. 다만 어떻게 오시게 됐는지가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이 친구가 우진을 만나러 온 이유가, 바로 저기에 있네요.”
“예……?”
브루노가 서우진이라는 그 젊은 디자이너와 이야기하는 사이, 마테오의 시선은 자연스레 회의실을 둘러보게 되었고.
회의실 구석에 진열되어있는 커다란 파빌리온의 모형을 발견한 순간, 그 자리에서 얼어 붙어버린 것이다.
‘저 기하학적인 조형물은 대체 뭐지? 어떻게 저런 비정형적인 구조 위에 인터렉티브한 패턴을 씌울 수 있었던 거지?’
평생을 건축만 하며 살아온 건축가로서.
그리고 오늘까지도 항상 더 나은 건축을 하기 위해 노력해온 디자이너로서.
매일 수많은 래퍼런스들을 찾아보고 그것들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있는 이 작은 건축사무소에 놓여있는 파빌리온 모형에서 신선한 충격을 느끼게 됐던 것이다.
게다가 한 가지 더.
‘저 모형을 디자인한 친구가 정말 이 사람이라면……!’
이 조형물에 담긴 특별함이야말로 지금 마테오에게 놓인 과제인 비정형 건축에 대한 해답에 가까웠으니.
마테오로서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오르는 느낌이었다.
브루노가 왜 그렇게 적극적으로 한국행을 종용했는지, 이제는 완전히 이해가 된 마테오였다.
그래서 이 조형물에 모든 정신이 팔린 나머지, 마테오는 우진과 브루노가 나누는 대화조차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이 특별한 충격에서 벗어난 직후, 마테오가 우진을 향해 꺼낸 첫마디는, 바로 이것일 수밖에 없었다.
“저……. 우진?”
“네, 마테오. 말씀하세요.”
“혹시 이 조형물이, 당신의 작품인가요?”
원래도 돌려 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마테오였건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도저히 이것부터 물어보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게 된 것.
떨떠름한 표정이 된 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예, 그렇습니다만. 혹시 무슨 문제라도…….”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브루노는 소리 없이 웃고 있을 뿐이었다.
“Estás loco(미쳤군)!”
마테오가 탄성을 터뜨리자, 어느새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제이든이 우진을 향해 속삭였다.
“미쳤냐고 묻는데, 우진?”
“……?”
이어서 낄낄거리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Amazing yeah.”
* * *
브루노로부터 대략적인 설명을 들은 우진은, 사건의 전말(?)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아하, 그래서…….”
“제가 아는 디자이너 중, 3차원 툴을 가장 잘 다루는 사람이 우진이었을 뿐입니다. 하하.”
“그건 과찬이십니다, 브루노.”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들은 뒤에는, 어느새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마테오 비야……. 게다가 그가 내게 디자인 설계 측면에서 도움을 받고 싶은 프로젝트가 라리가 스페인의 최상위 축구리그의 스타디움이라…….’
아무리 우진이 미래를 알고, 또 마테오 비야라는 유명한 건축가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작업했던 모든 작업물들을 다 기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진은 해외의 유명한 건축가들에 대해 동경했었고, 때문에 많은 지식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특별히 팬이었던 건축가가 아닌 이상에는, 보통 그의 가장 유명한 작업물 몇 가지 정도를 아는 것이 전부.
그래서 마테오가 스타디움 설계를 했다는 사실 자체는 금시초문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해외에 서우진이라는 디자이너의 이름을 조금이라도 알릴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기회라는 사실을 말이다.
‘마테오가 내게 원하는 것이 뭔지는 구체적으로 들어봐야겠지만, 벌써부터 궁금해 미치겠군.’
특히 우진보다 훨씬 더 축구라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석현과 제이든의 경우, 이미 엄청나게 흥분되어 보이는 상태.
“우진! 내 꿈이 사실 뭔 줄 알아?”
“조용히 좀 해 제이든.”
“프리미어 리그의 스타디움을 내 손으로 디자인하는 게 꿈이야. 웸블리 스타디움(Wembley Stadium) 같은 곳이라던가…….”
“회의하는 동안 잠깐 나가 있어 줄래 제이든?”
“Bloody Hell!”
“석구, 쟤 좀 내보내.”
“미친……. 우리가 어쩌면 산마메스 구장 설계에 참여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니…….”
“저기……. 석구?”
“석현, 산 마메스면, 아틀레틱 클루브의 홈 구장이지?”
“정확해 제이든.”
“Holy……!”
“니들 다 나가!”
그래서 약간의 소란이 이어졌지만, 다행히 브루노와 마테오는 기분 좋게 그들을 이해해 주었다.
오히려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들이 스페인의 축구를 이렇게 좋아한다는 사실이, 뿌듯한 모양이었다.
“괜찮습니다, 우진. 하하.”
“시원한 음료나 한 잔씩 하고 본격적으로 다시 얘기 나누도록 하지요.”
물론 부끄러움은 전부 우진의 몫이었지만 말이다.
“죄송합니다, 브루노. 오늘 해야 할 이야기도 많은데……. 하…….”
그래서 잠시 음료를 마시며 분위기를 진정시킨 뒤.
우진은 천천히 파빌리온과 패러필드 설계에 관한 이야기부터 다시 꺼내었다.
아무리 마테오라는 의외의 인물이 나타났고, 그가 가져온 소식이 무척이나 흥미로운 것이라 하더라도.
오늘 이 자리에서 나눠야 할 이야기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원래 진행 중이던 왕십리 패러필드와 관련된 안건들이었으니 말이다.
“자, 그럼 일단. 우진이 준비해 온 파빌리온의 모형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 볼까요?”
브루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우진은, 직원들에게 부탁하여 프로토 모형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모형이 눈높이 위로 솟아오르자 위에서 내려다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지만, 애초에 이것은 우진의 의도였다.
이 파빌리온이 패러필드의 로비에 설치되었을 땐, 대부분의 이용자들이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각도에서 감상하게 될 것이었으니까.
“일단 이 디자인에 대한 설명을 드리기에 앞서……. 제가 한 걸음씩 밟아온 디자인 프로세스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도 될까요?”
우진의 물음에 브루노는 고개를 끄덕였고.
“물론입니다, 우진. 제 설계의 컨셉에서 영감을 받아 기본적인 디자인 틀을 만드셨다고 했는데,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 지난 미팅 때부터 아주 궁금했었거든요.”
그 옆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던 마테오는 두 눈을 빛내기 시작하였다.
어차피 마테오의 입장에서는 두 건축사무소 간의 협업에 대한 이야기만 듣더라도.
자신이 가장 궁금했던 의문점이 어느 정도 해결될 것 같았으니 말이다.
‘프로세스라……. 좋지. 대체 이런 비정형 패턴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는지가 너무 궁금했으니까.’
그래서 상황이 일단락된 지금.
우진의 목소리가 다시 차분하게 이어졌다.
“제가 지금부터 보여드릴 프로세스의 핵심은…….”
레이저 포인트를 들어 올린 우진이 스크린을 향해 버튼을 누르자, 까만 스크린에 천천히 빛이 맺히기 시작하였다.
“이 조형물에 담긴 패러미터와 알고리즘. 그리고 그것을 이렇게 실물로 제작할 수 있게 만들어준 패브리케이션 솔루션입니다.”
담담하지만 힘있게 이어지는 우진의 목소리에, 장내의 모두가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