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Fabrication
새집의 사전점검을 다녀온 뒤, 우진은 더욱 동기부여가 되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께 효도했다는 생각에 뿌듯함도 들었으며, 무엇보다 앞만 보고 달려온 그 자신에게도 큰 선물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진즉 이사할 걸 그랬나.’
건축은 우진의 꿈이자 이상이며,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다.
그런 그에게 ‘집’이라는 개념은 남들보다 더욱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이었으며.
그래서 새집에 들어선 순간, 벅차오르는 감정이 더 컸던 것 같았다.
지난 일이 년 동안 정말 많은 것을 이뤘다는 생각은 종종 했지만, 이렇게까지 피부로 확 와 닿은 적이 없었달까.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이전보다 더욱 힘이 나는 것은, 단지 착각이 아닐 것이었다.
‘내가 직접 지은 집에서 살아도 뿌듯하겠지만……. 뭔가 남이 멋지게 지어놓은 집에 입주하는 것도 기분이 썩 좋단 말이지.’
마치 남이 해준 요리가 제일 맛있다는 요리사마냥, 실없는 생각을 하며 오전 업무를 보던 우진.
마침 대표실 앞을 지나던 석현을 발견한 우진이, 그를 불러 세워 말을 걸었다.
“석구! 오후 타임에 모형제작실 두 개 비워뒀지?”
우진의 부름에 휙 걸음을 돌려 들어온 석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오늘부터 파빌리온 모듈 프로토 제작 들어가기로 했었잖아.”
“맞아.”
“도면 미리 다 뽑아서 세팅해 뒀으니까, 일 보던 거 끝나면 바로 넘어오시죠.”
“오케이.”
9월이 되고 WJ 스튜디오의 신사옥이 본격적으로 착공을 시작하자, 이제 우진이 가장 집중한 프로젝트는 당연히 파빌리온 제작이었다.
사옥 설계가 시작되기 이전에 기본적인 디자인 방향성은 전부 다 만들어진 상황이었지만.
사실 3차원 도면이 베이스가 되는 디지털 건축이라는 것은, 아무리 ‘작은 건축’이라 불리는 파빌리온이라 해도 제작 과정에서 수많은 R&D가 필요던 것이다.
3D 모형으로 가상의 공간에 모델링하는 것과 실재하는 장소에 실물로 제작하는 것 사이에는 결코 적지 않은 간극이 존재했으니까.
지이이잉-!
그래서 오늘도 모형제작실 하나를 완전히 전세 낸 석현은, 우진이 원하는 형태의 모듈을 만들어 내기 위해 모형 기계들을 혹사시키는 중이었다.
“조 팀장님. 아까 레이저커팅 도면 드린 거 작업 다 끝났나요?”
“아, 파트장님. 거의 다 됐을 것 같습니다. 십 분 내로 작업물 가지고 넘어오겠습니다.”
“모듈 조립작업도 손이 좀 필요하니까, 두 사람만 이쪽으로 붙여주세요.”
“넵!”
WJ 스튜디오 내에서 석현의 직책은 이제 기술연구소장이었다.
원래의 직책은 모형 파트의 파트장이었지만, 얼마 전 대대적인 인사이동 이후 기술연구소장으로 직책이 바뀐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내부 사람들은 그를 파트장이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석현이 ‘소장님’이라는 호칭이 너무 나이 들어 보인다며 거부했으니 말이다.
‘기술연구소장이라는 단어로 들었을 때는 그런 생각 못 했는데……. 소장님이라고 하니까 완전 아저씨 된 것 같잖아.’
우진은 아저씨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는 순간 이미 아저씨가 된 것이라며(?) 석현을 설득했지만, 석현은 도저히 그 말을 용납할 수 없었다.
창창한 스물셋, 08학번에게 아저씨라니!
‘다음 인사이동 때 차라리 R&D 총괄 디렉터로 명칭을 바꿔 달라고 해야겠어.’
석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열심히 작업을 지속하였고, 그렇게 오후가 되자 한 사람이 작업실로 넘어왔다.
사내에서 유일하게 석현을 소장님이라고 부르는 인물이었다.
“소장님, 작업은 좀 잘 돼가?”
“젠장. 소장님이라고 하지 말랬지.”
“제이든 같은 표정 짓지 말고, 빨리 제작한 모듈이나 보여줘 봐.”
“후우. 알겠어. 잠깐만.”
오늘도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WJ 스튜디오의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 * *
파빌리온은 건축의 축소판이다.
하지만 디자인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건축가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측면의 소스들이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 장르가 바로 파빌리온이라 할 수 있었다.
실제 건축에서는 수많은 제약 때문에 시도하거나 보여주지 못했던 디자인적인 욕망들을, 파빌리온을 작업할 때 여실히 표출하는 것이 바로 건축디자이너들이었으니까.
그래서 업계에서는 파빌리온을 평가할 때,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조형적 아름다움만을 가지고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파빌리온이 만들어지기까지 담겨지는 모든 건축적인 프로세스 또한 파빌리온의 일부가 되어, 그 디자인적 가치를 더욱 끌어올리는 또 다른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것을 구성하는 하나의 작은 모듈이라던가 설계도면. 혹은 이러한 구조를 뽑아내기 위해 필요했던 기술적인 매커니즘과 건축적인 철학까지도.
때문에 우진이 작업하는 이 파빌리온에서는, 아름다운 패러매트릭 디자인을 만들어 내기 위해 설계된 수많은 알고리즘들까지도 하나의 디자인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이 모듈이 설계된 과정을, 하나의 드로잉으로 만들어서 파빌리온의 옆에 전시할 거야.”
“판넬을 만들어서 와이어로 건다는 말이지?”
“그런 셈이지.”
브루노가 설계한 빛의 흐름을 따라, 다이아몬드 문양의 크기와 비율이 어떤 식으로 변하고 움직이는지.
해가 비추는 시간에 따라 이 문양들이 어떤 패턴을 만들며 패러필드의 로비를 수놓을 것인지.
이곳 복합 몰을 이용하던 유저가 어떤 위치에서 어떤 방향으로 파빌리온을 관찰하느냐에 따라, 조형성이 얼마나 다르게 느껴질 것인지.
마지막으로 이 형태를 10미터 높이에 가까운 로비 공간에 완벽하게 설치하기 위해, 어떤 방식의 설계 제작과정이 사용되었는지 등.
이 모든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어 탄생한 작품이 바로, 우진이 디자인한 파빌리온인 것이다.
“듣고 보니 그럴싸하고 멋지네.”
“그럴싸하다니. 내 건축 철학을 너무 평가절하하는 거 아니냐.”
그러면서도 이 모든 요소들이 하나의 전제 안에 들어가 있어야 했는데,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차원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그 과정과 요소들을 보여주는 드로잉들조차도, 모든 의미를 배제하고 시각적으로 봤을 때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진은 아무리 그럴싸한 철학을 담은 건축이라 하더라도, 아름답지 않다면 좋은 디자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네가 그랬잖아. 디자인은 일단 눈으로 볼 때 그럴싸하고 멋져야 된다며.”
“그……렇긴 한데…….”
“그러니까 난 최고의 칭찬을 한 거야.”
“듣고 보니 그러네. 똑똑한데 석구.”
“흐흐. 당연한 말씀.”
그래서 우진은 파빌리온의 제작과정과 매커니즘 하나하나를 아름다운 드로잉으로 승화시키려 노력하였다.
하여 그 결과.
WJ 스튜디오의 작업실 한켠에는, 파빌리온의 소형 프로토 타입이 완성될 수 있었다.
“야, 이거 만들어놓고 보니까 예쁘네.”
“그렇지?”
“실물 사이즈로 들어가면 진짜 간지 나겠다. 높이만 9.5미터였나?”
“맞아. 구조적으로 버티는 덴 문제 없겠지?”
“와이어만 충분히 달아준다면.”
프로토타입으로 제작된 파빌리온의 모형은, 단순히 연습 삼아 만든 것이 아니었다.
우진은 앞으로 어떤 건축디자인을 할 때마다, 이렇게 프로토 제작 겸 소형모델을 만들어서 사내에 소장할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이 작은 모형도 제 역할을 다 한 뒤에는, 깨끗한 유리 상자로 포장되어 WJ 스튜디오 로비에 전시될 예정이었다.
“브루노랑 미팅이 금요일이지?”
“맞아. 이번에는 그쪽에서 우리 사무실로 오기로 했어. 오전 미팅 이후에는, 패러필드 현장 쪽으로 같이 움직일 거야.”
“그럼 금요일은 통째로 비워야겠네.”
“그러는 게 좋겠어. 가능한 너도 같이 가야지. 기술담당인데.”
대략 1미터가 조금 넘는 파빌리온 축소모형을 구석구석 살피며, 우진은 두 눈을 반짝였다.
몇 번의 R&D과정을 거친 뒤 내년부터는 실제 사이즈 파빌리온의 모듈제작에 들어갈 예정이었고.
내년 하반기 즈음에는 드디어 이 작품이 왕십리 패러필드에 설치될 것이었다.
서울 그 어떤 역사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유동인구를 자랑하는 왕십리역.
그곳에 설치된 우진의 첫 번째 파빌리온은, 그를 본격적인 건축디자이너로 데뷔시켜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석구, 타입 A랑 C 설계도도 가지고 있지?”
“그건 왜? 폐기된 거 아니었어?”
“이 완성안이 나오기까지 그것도 다 과정이잖아. 미팅 때 보여주긴 해야지.”
“흠. 알았어. 준비해 놓을게.”
완성된 프로토 모델을 본 뒤 더욱 기분 좋아진 우진은, 브루노와의 미팅을 더 꼼꼼히 준비하였다.
3D 파일로만 공유됐던 파빌리온의 디자인을 이렇게 실물제작 된 모형으로 보게 된다면, 브루노도 좋아할 것이 분명하다 생각하였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
오랜만에 WJ 스튜디오를 찾은 브루노를, 무척이나 반갑게 맞이한 우진.
“브루노! 오랜만입니다.”
“하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우진.”
그런데 브루노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우진은, 그 뒤로 따라 들어온 한 남자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기간 협업하며 브루노 사무실의 직원들은 대부분 안면이 있었는데, 완전히 처음 보는 남자가 나타났으니 말이다.
희끗희끗한 곱슬머리에 브루노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면서도, 다부진 체격과 진한 인상을 가진 인상적인 외모의 남자.
‘음……? 누구지? 스페인 사람 같은데……. 브루노의 회사 본사에서 나온 분인가?’
그리고 이런 우진의 의문점을 느낀 것인지, 브루노가 껄껄 웃으며 우진에게 남자를 소개하였다.
“하하, 우진. 생각해보니 제가 미리 얘기하지 않았었군요.”
“예?”
“여기, 이 친구는……. 제 오랜 친구이자 스페인의 건축가인 마테오입니다.”
브루노의 말이 끝날 때마다 재빨리 옆에서 통역가가 번역했지만, 이런 간단한 영어 정도는 우진도 통역 없이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때문에 브루노의 말이 끝난 순간.
우진의 두 눈은 크게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의 건축가 마테오……? 설마 마테오 비야(Mateo villa)?’
브루노의 말을 들은 뒤, 우진은 소개받은 남자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브루노와는 조금 색깔이 다르지만, 그와 비교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큰 인지도를 가지고 있던 스페인건축의 2세대 거장.
전생에는 건축잡지에서나 봤던 남자의 등장에 우진은 순간 벙찐 표정이 되었고.
그런 그를 향해 마테오가 웃으며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우진. 나는 마테오라 합니다.”
브루노와 다르게 영어를 할 줄 모르는지, 걸걸한 목소리의 스페인어로 얘기하는 마테오.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마테오. WJ 스튜디오의 대표 우진입니다.”
뜻밖의 만남에 한층 기분이 상기된 우진은 밝은 표정으로 그들을 회의실로 안내하였고.
그 과정에서 당연히 브루노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 마테오가 한국. 그것도 성수동의 WJ 스튜디오에.
어쩌다가 나타나게 되었는지가 너무 궁금했으니 말이다.
“브루노,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하. 마테오의 방문이 조금 당황스러우셨나 보군요.”
“당황은요. 귀한 손님을 맞을 수 있어 영광이지요. 다만 어떻게 오시게 됐는지가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미리 세팅된 음료수가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안쪽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 하나가 인원이 하나 늘어난 것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바깥으로 나가 음료수를 한잔 더 챙겨 들어왔다.
회의실 안쪽을 잠시 둘러본 브루노가, 빙긋 웃으며 안쪽의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친구가 우진을 만나러 온 이유가, 바로 저기에 있네요.”
“예……?”
우진의 시선이 자연스레 브루노의 손끝을 향했고.
그곳에는 어제까지 우진이 작업했던 파빌리온의 프로토 모형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