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75화 (175/315)

175화

좋은 사람들

신사동 가로수길.

어느새 핫 플레이스가 된, 유리아의 카페 프레스코 건물.

그 옥상 루프탑에는 오랜만에 네 사람이 모여 있었고.

그중에서도 수하는 꽤 신이 나 보였다.

“그나저나 누나. 그때 샀던 청담 선영은 팔았어?”

“나 아직 안 팔았지!”

“그래? 조금 오르면 바로 팔 것처럼 그러더니.”

“네 말대로 계속 오르는데 어떻게 파냐?”

“잘했네. 그래서 요즘 얼만데?”

“엊그제 부동산에서 연락 왔는데, 13억에 팔아주겠대.”

“오……! 내 예상보다도 페이스가 더 빠른데?”

“그래서 결정했어.”

“뭘?”

“그냥 여기 입주해서 살기로.”

“돈 없다며? 마포 클리오 팔 거야?”

“아니. 거기도 안 팔아.”

“……?”

“일을 더 열심히 하려고.”

“좋은…… 마인드네.”

수하가 신이 난 이유는 간단했다.

우진의 말을 믿고 무리해서 매입한 청담 선영아파트의 시세가, 그녀의 예상보다도 한참 더 빠른 속도로 급등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송에서 비대위를 상대로 대승을 한 덕에 사업성까지 더 좋아졌고.

그로 인해 추가분담금이 줄어드니 자연스레 시세는 더 크게 펌핑된 것.

그래서 배가 아픈 것은, 그때 우진의 제안을 거부했던 재엽이었다.

“으으…… 무리하더라도 나도 하나 했어야 했는데.”

재엽은 청담 선영의 원조합원이었으니, 현재 급등하는 시세를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까 오빠. 인생은 타이밍이라니까?”

수하는 헤헤 웃으며 맥주를 홀짝였고, 재엽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푹 하고 내쉬었다.

올해 초 여윳돈을 묻어뒀던 주식계좌가 문득 떠오르면서, 갑자기 자괴감(?)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번 투자건의 최대 수혜자인 리아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리아를 향해 우진이 물었다.

“누나. 68평형은 거래가 아직 없나?”

리아가 매수했던 아파트는, 선영아파트 단지에서 몇 없는 가장 큰 평수.

대답은 리아 대신 수하에게서 나왔다.

“아니, 있던데?”

“그래?”

“18억인가 19억인가. 얼마 전에 팔렸다더라고.”

수하의 호들갑에, 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의미 없어.”

“응? 왜 의미가 없어.”

“그게 얼마가 되든 어차피 난 들어가서 살 거니까. 이번에 이사하면 그냥 쭉 눌러살 거야.”

애초에 투자재로서 접근한 게 아닌 실거주할 집을 쌀 때 산다는 마인드였던 리아는, 급등하는 시세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뭐야, 이 누나. 완전 쿨하잖아?”

우진의 이야기를, 옆에서 재엽이 한마디 거들었다.

“유리아 요즘 완전 배불렀어.”

우진이 다시 덧붙였고.

“카페도 잘되고 음반도 잘되니까, 그럴 만하지 뭐.”

수하도 낄낄거리며 리아를 놀렸다.

“크……! 역시 리아는 클래스가 다르다니까.”

가만히 있다가 봉변을 당한 리아는, 억울한 표정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런 거 아냐, 진짜. 이 사람들이 아주 생사람 잡네. 사실 요즘 제일 잘 나가는 건 우진이 아냐?”

리아는 비난의 화살을 슬쩍 우진에게로 돌려보려 했지만, 그 시도는 곧바로 무산되고 말았다.

사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 우진의 추종자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우진이는 논외지.”

“맞아. 어디서 은근슬쩍 물타기를 시도하려고.”

“쳇, 너무해.”

오랜만에 만난 네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카페 루프탑에서 맥주에 안주를 쌓아놓고 마시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들을 저지할 리 없었다.

여긴 리아의 가게였고, 루프탑은 오늘 모임을 위해 아예 통째로 비워둔 상태였으니까.

그렇게 한참 또 이야기를 하던 중, 리아가 문득 우진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우진아.”

“응?”

“아까 얘기하려다가 깜빡했는데, 청담 선영 재건축 완공되면 너도 이쪽으로 들어와 살 거야?”

리아의 물음에 재엽과 수하의 시선이 동시에 모였다.

이제 다들 같은 아파트 단지의 주민이 될 예정이었으니, 우진의 의향이 궁금했던 것이다.

우진은 으쓱하며 대답하였다.

“글쎄. 한 채는 남겨뒀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이번에는 재엽이 물었다.

“그럴 수도 있다니?”

잠시 뜸을 들인 우진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나 올 가을에 이사할 예정이거든. 여기서 좀 살아보고, 청담 써밋은 완공될 쯤 결정하려고. 아직 이 년은 더 남았으니까.”

우진의 말을 들은 세 사람의 얼굴에 더욱 흥미로운 표정이 어렸다.

“오, 진짜?”

그들이 아는 사람 중 가장 뛰어난 부동산 전문가이자 건축디자이너인 우진.

그가 이사할 집이 궁금한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디로?”

“뭔데, 어디로 이사할 건데?”

사실 우진이 아직까지도 개포동의 허름한 주공아파트에 살고 있는 것이, 세 사람에게는 줄곧 의문이었던 것.

“리아 누나, 혹시 서울 숲 옆에 지금 짓고 있는 주상복합 알아?”

“주상복합이라면…….”

“지난번에 석중이 형님 이사하신다고 했던 데 있잖아.”

“아, 거기! 네가 그때 프리미엄 주상복합이라고 추천했던 거기?”

리아와 달리 전혀 이해하지 못한 재엽과 수하는 고개를 갸웃하였고, 우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서울숲 클라시아 포레스트라고. 올 8월에 준공 떨어지는 주상복합 있거든.”

“오호.”

“얼마 전에 분양권 싸게 급매 나온 물건이 있길래, 냉큼 잡았어.”

재엽이 물어보았다.

“투자가치 괜찮은 곳이야?”

“투자가치보다는, 그냥 살고 싶어서 산거야.”

“그래?”

“알아보니까 고급화 엄청 잘 되 있기도 하고, 위치가 너무 마음에 들었거든.”

우진의 이야기를 듣던 수하는, 어느새 스마트폰으로 검색해서 찾아보고 있었다.

“야, 여기 제일 작은 평수가 58평인데?”

“응 그거야.”

뒤늦게 지도를 본 재엽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했다.

“와, 너희 사무실에서 엄청 가깝네.”

“그치. 역시 직주근접이 최고잖아? 새로 지을 사옥에서는 더 가까워.”

“그러네, 진짜.”

<서울숲 클라시아 포레스트>에 대해 이것저것 검색해본 세 사람은, 호들갑을 떨어 대었다.

그리고 결론은 결국 이것이었다.

“그럼 9월에는 입주하는 거야?”

재엽의 물음에 우진이 대답했고.

“그렇겠지?”

리아와 수하가 거의 동시에 이어 물었다.

“우린 당연히 초대해 주겠지……?”

“집들이는 기대해도 되겠지?”

“…….”

그렇게 우진의 뉴 하우스 첫 번째 집들이 손님은 순식간에 결정되었다.

* * *

<서울숲 클라시아 포레스트>는, 사실 성수동에서 꽤 상징적인 주상복합이었다.

낙후된 빌라촌과 공장지대였던 성수동에 가장 처음으로 들어선 프리미엄 주거단지이자, 성수동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낙후된 구도심 지역이 활성화되어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유입됨으로써 기존의 원주민이 대체되는 현상

의 시발점과 같았던 건축물.

처음 분양할 때만 하더라도 성수동에 이런 고급 주상복합이 웬 말이냐 했던, 그래서 시공사인 칠성건설의 무리한 시도라고 평가받던 이 <서울숲 클라시아 포레스트>는.

2012년이 지나면서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고, 13년에는 고급 주거의 상징과도 같은 아파트로 자리 잡게 된다.

이것은 애초에 이곳이 잘 지어진 프리미엄 아파트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결코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면 13년에 <천년의 그대>라는 드라마가 방영을 시작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는데.

해외에서까지 대박을 터뜨렸던 이 드라마의 남자주인공이 사는 집으로 <서울숲 클라시아 포레스트>가 전파를 타면서, 대중적으로 엄청난 유명세를 타게 되니 말이다.

물론 그로 인해 시세도 크게 오르게 되며, 그것이 우진이 망설임 없이 이 아파트를 매수할 수 있었던 이유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투자보다는 실거주 매리트 때문에 이곳을 매입했다는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투자대비 수익률만 놓고 보자면, 여기보다 선영아파트 여러 채를 들고 가는 게 훨씬 더 나은 선택이었을 테니까.

‘성수동에 신사옥까지 확정된 마당에……. 앞으로 나한테 여기보다 살기 좋은 위치는 없지 뭐.’

사옥이 지어지면 어머니의 칼국수 집도 한 자리 내어드릴 생각이었으니, <서울숲 클라시아 포레스트>는 정말 다각도로 고민한 끝에 결정된 선택이었다.

물론 재엽과 리아, 수하 등과 같은 단지 주민이 될 수 있는 선영아파트도 매력적인 선택지였지만, 일단은 우진의 상황에서 여기만큼 끌리는 위치는 찾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이사라니……!’

그리고 한 가지 더.

우진의 기억 속에 있는 이 <서울숲 클라시아 포레스트>에는, 재밌는 에피소드도 하나 있었다.

<천년의 그대>로 일약 스타가 된 남자주인공이 드라마가 종영할 즈음 실제로 이 주상복합을 매입하여 살게 되는데.

웬 중국의 팬 하나가 그가 사는 집 맞은편을 수억의 프리미엄을 얹어서 곧바로 매수했다는 일화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우진의 전생에 무척이나 유명했던 이야기 중 하나였는데, 이 이야기가 더 재밌는 이유는, 그 남자주인공이 우진과도 안면 있는 연예인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민우가 과연 이번에도 <천년의 그대> 남주로 데뷔하려나?’

리아의 크리스마스 파티 때 처음 안면을 텄으며, 요즘도 가끔 석현, 제이든과 만나서 논다는 순박한 청년 민우가, 바로 이 에피소드 속 주인공이었던 것.

우진은 민우의 얼굴을 본 지 꽤 되었지만, 어쩌면 몇 년 뒤에는 그와 이웃사촌이 되어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이런 특별한 스토리들과 별개로, 우진은 꽤나 들뜰 수밖에 없었다.

일에 치여 미루고 미루던 이사를 드디어 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우진이 처음으로 미래가 아닌 현재의 자신을 위해 투자한 것이었으니까.

“어머니께서 좋아하셨으면 좋겠는데…….”

8월의 어느 날.

우진은 아무 말 없이 어머니를 모시고 성수동에 왔다.

그날은 <서울숲 클라시아 포레스트>의 사전점검.

새 아파트가 지어지고 입주하기 전, 자신의 집에 어떤 하자가 있는지 체크 하기 위해, 수분양자들이 방문하는 행사 날이었다.

“여긴 새로 지어진 아파튼가 보구나?”

“네, 어머니.”

“그런데 왜 여기로 들어가는 거니? 여기에 외부인이 주차해도 돼?”

어머니 주희의 물음에, 우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외부인이라뇨. 이제 ‘우리 집’인걸요.”

“응……?”

“제가 작년부터 조만간 이사하자고 했었잖아요. 개포동 주공아파트도 아늑하고 좋았지만, 어머니께서도 이제 이렇게 좋은 집에 한 번 살아보셔야죠.”

처음에 우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주희는, 잠시 동안 주름진 눈꺼풀을 깜빡일 뿐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럼 이 아파트가…….”

“얼마 전에 모아둔 돈으로 샀어요. 다음 달에 이쪽으로 이사하려는데……. 괜찮으시죠, 어머니?”

일부러 어머니께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바로 어제까지도 너무 일정이 바빴던 탓에, 따로 얘기를 꺼낼 기회가 없던 것일 뿐.

어차피 사전점검 이후에도 입주까지는 꽤 시간이 남아있었으니, 오늘 아파트를 보여드리면서 말씀드리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주희는 곧바로 우진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복받치는 감정에, 울컥한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에, 이번에는 우진이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이렇게 좋은 집에 살아도 되는 거니?”

어머니의 이 한마디 말에서,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으니까.

“돼요. 더 좋은 집에도 살 수 있어요. 그러니까 걱정 않으셔도 돼요.”

어머니를 모시고 현장 사무실에 들어간 우진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키를 받고 아파트 입구로 들어섰다.

어지간한 호텔보다 럭셔리한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자, 이사가 더욱 실감 나는 우진이었다.

‘이런 집에 다 살아보고……. 진짜 많이 컸다. 서우진.’

펜트하우스의 바로 아래층인 45층에 내린 우진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키를 대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서울숲의 녹지부터 시작해서 한강까지 이어진 아름다운 거실 조망이, 가장 먼저 두 모자의 눈에 들어왔다.

우진의 뒤를 따라 들어온 주희의 눈가에서, 참고 참았던 눈물이 결국 흘러내렸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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