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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172화 (172/315)

172화

흐름을 타다

조운찬 교수의 교수실로 가는 길, 우진은 꽤 기대감 어린 표정이었다.

‘선물이라는 게 대체 뭘까?’

바쁜 탓에 잊고 있었던 조운찬과의 대화가,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문득 떠오른 것이다.

[그날은 어지간하면 꼭 시간 내서 와라 우진아.]

[예, 뭐……. 시간이야 미리 빼놓으면 되니까요. 그런데 무슨 일 있으세요?]

[무슨 일이 있다기보단, 우진이 네게 괜찮은 선물을 줄 수 있을 것 같거든.]

[오, 선물이라니. 기대되네요.]

생각해보면 며칠 전에 있었던 갑작스런 조운찬 교수의 호출은, 꽤 뜬금없는 것이었다.

따로 호출이 아니더라도 패러메트릭 디자인에 대한 공부 때문에 조운찬 교수의 교수실을 이미 뻔질나게 드나들고 있던 우진이었으니.

조운찬이 굳이 날짜와 시간을 정해서 따로 그를 부를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그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진짜 오늘 뭐라도 있는 건가?’

그래서 조운찬 교수의 교수실 앞에 도착한 우진은, 조금 기대하는 마음으로 문을 두들겼다.

선물이 얼마나 좋은(?) 것일지에 대한 기대보다는, 어떤 종류의 것인지가 더 궁금하다고 해야 할까.

똑똑-

이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언제나 그랬듯 조교가 먼저 우진을 맞아주었다.

“우진이구나.”

“네, 형.”

“교수님 안에 계셔. 이거 음료수 한잔 들고 들어가라.”

“감사합니다.”

우진은 조운찬 교수가 주겠다는 선물을, 비주얼 스크립트 알고리즘과 관련된 책자나 프로그램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그런 것이라면 확실히, 조운찬이 선물이라고 얘기할 만했으니까.

하지만 두런두런 대화 소리가 들리는 접견실에 들어선 순간…….

“네, 교수님. 하하.”

“오 과장님은 잘 계시죠?”

“오 과장님이라면…….”

“왜, 그때 제 설계 발주 담당해주셨던 분 있잖습니까.”

“아아!”

“그분 못 뵌 지가 오래된 것 같아서 말이죠.”

“그럼요. 아주 잘 계시죠. 우리 오 과장님.”

우진은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음? 사람이 한 명 더 있잖아?’

당연히 조운찬 한 사람만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접견실 안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새어 나왔으니 말이다.

심지어 그 대화 내용 속에는…….

“하하, 저희 SH물산이야 항상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아주 뿌듯하네요.”

정말 의외의 단어도 포함되어 있었다.

‘SH물산이라고?’

그래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동안, 우진은 귀를 더 쫑긋 세웠다.

“솔직히 교수님께서 합류 안 해주셨으면, DDP쪽도 아직 난항이었을 겁니다.”

“거기야 애초에 SH물산의 기술력이 아니었다면, 국내에선 시공이 불가능한 건물이었지요.”

“하하 그런가요?”

정확히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SH물산의 직원이면서 DDP시공 파트 쪽의 관계자인 듯 보이는 의문의 목소리.

‘혹시…….’

접견실의 문고리를 잡은 우진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왠지 조운찬의 ‘선물’이라는 게 뭔지, 알 것만 같았으니 말이다.

딸깍-

문을 열고 들어간 우진이, 밝게 웃으며 인사하였다.

“교수님, 저 왔습니다.”

* * *

국내의 메이저 건설사들 중, 우진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건설사는 단연 천웅건설이다.

사실상 지금의 우진이 있을 수 있었던 데에 천웅과 박경완의 도움이 지대했으니, 이것은 너무 당연한 사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진이, 장기적으로 천웅하고만 밀접한 관계를 맺을 필요는 없다.

천웅에서 그걸 원하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물론 앞으로도 가장 긴밀하게 협력할 회사는 천웅이겠지만…….’

그래서 우진은 이제 슬슬, 다른 건설사 몇 곳과도 거래를 트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그중에서 우진이 가장 탐나던 곳이 바로 SH건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건설사의 경우 천웅이 할 수 없는 특별한 무언가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SH건설은 꽤나 특별했으니까.

SH건설은 지금 우진이 추구하는 디지털 건축의 방향성과 어떤 의미에서 가장 어울리는 방향성을 추구하는 회사였다.

‘기술력만큼은 국내에서 여길 따라올 건설사가 없지.’

우진의 전생에서도 SH건설은,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첨단 건축기술을 갖추게 되는 회사였다.

반도체 등 첨단기술 측면에서 이미 세계적인 기술력을 갖춘 SH전자가 그룹을 이끄는 주력 대기업인 SH그룹의 특성상, 어쩌면 너무 당연한 미래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건……. 진짜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인데?’

우진이 눈앞에 앉아있는 깔끔한 외모의 남자를 살짝 응시했다.

포마드 스타일로 딱 붙여 올린 헤어 스타일에 세련된 동그란 뿔테안경.

서글서글한 눈매와 날카로운 콧대를 가진,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사내.

우진이 받아 든 그의 명함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SH물산 건설 부문]

[첨단기술사업부]

[시공파트장 임강석]

건설사마다 조직도가 전부 다르고, 우진이 그것을 전부 꿰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명함 한 장과 몇 가지 정황으로, 우진은 대략 이 사람이 지금 어디에서 일하는 사람인지 추측해 낼 수 있었다.

‘DDP 시공현장에서, 패브리케이션 시공 디렉팅을 담당하는 사람인 것 같은데…….’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의 약자인 DDP.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작품인 DDP는, 같은 크기와 모양이 단 하나도 없는 수많은 철제 패널들로 외관이 마감되어있다.

이것은 도저히 2차원 도면과 설계기법으로 시공해낼 수 없는 구조였는데.

여기서 3D툴을 통해 3차원 설계도면을 만들어낸 사람이 바로 조운찬이었으며.

그 설계를 시공해낸 업체가 바로 SH물산이었다.

그리고 우진의 추측 상 오늘 처음 본 이 남자가, SH물산 쪽에서 직접적으로 조운찬과 함께 실무를 담당하는 중요한 실무진 중 한 명일 것이었다.

“반갑습니다, 서 대표님. 조운찬 교수님께 이미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이거 쑥스럽습니다. WJ 스튜디오 대표 서우진이라고 합니다.”

우진은 임강석의 명함을 품속에 갈무리해 넣으며, 그와 동시에 자신의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 든 임강석이, 기분 좋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거 유명인을 이렇게 다 뵙게 되고, 정말 영광입니다.”

“영광이라니요, 그렇게 비행기 태워주실 필요는…….”

“제가 <우리 집에 왜 왔니>도 정말 열심히 챙겨 봤었거든요.”

“하하. 감사합니다.”

“서 대표님은 한번 꼭 뵙고 싶었습니다. 젊으신 나이에 이렇게까지 업계에 큰 영향력을 주신 분은, 지금껏 본 적이 없으니까요.”

날카로운 첫인상과 다르게, 임강석은 호쾌한 웃음을 지으며 우진과 악수를 나누었다.

첫 만남이라 우진을 향한 그의 말에 어느 정도 겉치레가 담겨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우진을 만나보고 싶었다는 말만큼은 진심인 듯 보였다.

악수를 나눈 뒤 자리에 앉은 우진이, 이번에는 반대로 강석을 향해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SH물산 첨단기술사업부시면……. 혹시 DDP 현장 쪽에서 실무를 담당하시나요?”

“예리하십니다. 바로 맞추시네요.”

“아무래도 교수님과 SH물산의 연결고리는, DDP뿐이니까요.”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던 임강석은, 곧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먼저 나온 대화 주제들은, 가벼운 일상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최근 있었던 프로젝트들에 대한 이야기.

아무래도 우진의 전적(?)이 화려하다 보니, 우진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서 대표님, 혹시 그거 아십니까?”

“네? 어떤…….”

“선영아파트 시공사 총회 때 말입니다.”

“아……?”

“저희 설계안 발표했던 SH건설 담당자가, 제 한 기수 선배님이시거든요.”

“헛, 그렇습니까.”

“그때 서 대표님 덕에 감봉당하실 뻔하셨죠.”

“아앗…….”

“뭐, 이미 지난 일입니다. 선배님도 사실 그때 서 대표님 발표 보고, 패배를 직감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운이 좋았죠, 뭐.”

“그걸 운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업계에 없을 겁니다. 하하.”

업계의 실무자라서 그런지, 강석은 생각보다 우진의 행보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SH물산이 참여했던 선영아파트의 수주전은 물론.

왕십리 패러필드와 관련된 스토리부터 시작해서 브루노와 우진의 관계까지.

그래서 우진은 한편으로 신기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고무적인 마음이 가장 컸다.

‘뭔가 뿌듯하네.’

대기업 SH건설에서 파트장쯤 되는 직책의 인물이 자신에 대해 이렇게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우진이 굵직한 일들을 해왔다는 방증이었으니 말이다.

“하하, 제 제자지만, 사실 제자라고 어디 말하고 다니기도 민망한 친굽니다.”

“제가 교수님 같아도 그러겠습니다. 서우진 대표님 정도 되는 입지를 가진 사람이 대학생이라는 것 부터가, 사실 너무 아이러니한 일 아니겠습니까?”

“흐흐. 어디서 이런 친구가 튀어나왔는지.”

“오늘 두 분께서 너무 얼굴에 금칠을 해 주셔서…….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하지만 기분이 좋은 것과 별개로.

조운찬 교수가 이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 이렇게 칭찬이나 듣고 가라는 의도는 아니었을 터.

그는 분명 우진에게 선물을 준비했다고 말했고, 때문에 우진이 이 자리에서 임강석이라는 인맥을 얻어가길 바랬을 것이었다.

정확히는 임강석을 통해서 WJ 스튜디오가 SH물산과의 친분을 만들어내고.

그것으로 우진이 추구하는 디지털 건축에 더 쉽고 빠르게 다가갈 지름길을 개척해 내길 바랬을 것이다.

우진은 조운찬의 그 마음을 잘 알았기에, 그에게 무척이나 고마웠다.

‘교수님께서 이렇게까지 떠 먹여주시는데, 못 받아먹으면 바보겠지.’

임강석과 대화해보면 해볼수록, 우진은 조운찬의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간 조운찬이 DDP쪽 일을 하면서 임강석과 사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진의 얘기를 빼놓지 않고 어필한 것이 느껴진 것이다.

그래서 우진은 부담되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일적인 이야기를 툭툭 던지기 시작했다.

임강석이 충분히 흥미를 가질 만한 주제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이번에 제가 진행 중인 프로젝트도, 파트장님께서 꽤 관심 가지실만한 분야겠네요.”

“오호. 그렇습니까?”

“DDP에 비교하면 보잘것없는 규모기는 하지만, 제가 이번에 파빌리온을 하나 디자인하고 있거든요.”

“파빌리온이라면…….”

“그 왕십리에 브루노가 설계 중인 패러필드 있잖습니까?”

“네, 잘 알지요.”

“거기 메인 로비에 들어갈 파빌리온을, 저희 회사에서 지금 디자인 중입니다.”

부서 자체가 디지털 건축 쪽에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인지, 우진이 이야기하는 패러메트릭 디자인에 처음부터 크게 관심 있던 임강석.

“오……! 거기에 조교수님과 연구하신 패러메트릭 디자인을 처음 적용하시는 겁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디자인은 이미 거의 픽스되었고, 패브리케이션을 위한 솔루션을 뽑아내는 작업에 한창이지요.”

우진은 그에게 자신의 디자인 방향성에 대해 어필하였고, 그것으로 한 가지 기회를 만들어 내었다.

“다음에 제게 한 번 디자인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완공되면 가장 먼저 파트장님을 초대해 드리겠습니다.”

우진의 디자인적 역량과 가능성을, 그에게 제대로 어필할 수 있는 기회.

“아아, 완공 이후에야 제가 언제든 찾아가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혹시 랜더링 컷이 미리 나온다면, 한번 구경해보고 싶어서 말이지요.”

반짝이는 강석의 눈을 보며, 우진은 직감하였다.

‘좋아……!’

WJ 스튜디오를 또 한 번 크게 성장시킬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흐름.

그 큰 흐름 위에 올라탈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말이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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