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71화 (171/315)

171화

여기에 짓겠습니다

일조권이 가장 중요하게 고려돼야 하는 건축은 주거 용도로 쓰이게 될 건축이다.

가장 많은 시간 머물며 생활하는 보금자리인 주거공간은, 해가 얼마나 어떻게 드느냐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대부분 주거 용도로 지어지는 집들이 가능한 남향으로 지어지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인 것.

그러나 우진이 지금 디자인하려 하는 사옥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물론 사무공간이나 상업공간도 일조량이 중요치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중요도가 상대적으로 훨씬 덜했으니까.

‘보통 업무시간에는,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오히려 일에 방해가 돼서 블라인드를 치게 되지.’

그렇다면 골든 프린트로부터 얻은 일조량에 대한 정보를, 우진은 디자인에 어떤 식으로 활용할 생각일까?

우진은 이 자연광을 일조량 확보의 측면에서 접근하기보다, 그 자체로서 디자인 소스로 사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골든 프린트가 우진에게 보여준 빛에 대한 정보.

그것들이 가진 조형성 그 자체를 건축 디자인에 활용할 생각을 한 것이다.

‘애초에 다양한 각도로 뿌려져 있던 골든 프린트의 조형성만 하더라도, 충분히 아름다웠으니까.’

하지만 우진의 생각은, 여기서 더 진전되지 못하였다.

골든 프린트를 떠올리며 그려낸 조형적인 건축물의 스케치는 분명히 멋졌지만, 2퍼센트 정도의 부족함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퇴근 후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도 한참을 고민하던 우진은, 그 아쉬운 부분이 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다시 생각해보면, 너무 일차원적인 접근이었어.’

단순히 골든 프린트가 보여준 조형성을 가져다가 건축에 적용한다면, 자신만의 어떤 디자인적인 재해석 없이 그것을 그대로 베낀 것과 같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오늘 출근길에 우진은, 사무실에 도착하는 대로 어제 그렸던 스케치들을 처음부터 다시 작업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원래대로라면 오전부터 디자인 회의를 하려 했었지만, 그 또한 일단 미루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오전 회의는 10시에 세팅하면 될까요?”

“아, 회의는 오후로 밀어주세요.”

“알겠습니다.”

“정확한 시간은 점심 식사시간 이후에 다시 전달 드리겠습니다.”

“예, 대표님.”

대표실에 들어온 우진은 가장 먼저 에어컨부터 틀었다.

7월이 다 되어서인지, 초여름의 더위가 일찍부터 기승을 부리는 아침이었다.

“으, 이제 걷기만 해도 땀나네.”

오는 길에 뽑아온 음료수 캔을 따 한 모금 마신 우진은,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이제 다시 시작해 볼까……?”

그런데 바로 그 순간.

“……!”

생각지 못했던 광경을 발견한 우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현장에 나타나 있던 골든 프린트가, 우진이 그려놨던 평면도 중 한 장의 위에 그대로 떠올라 있었으니 까.

* * *

우진은 잠깐 정지한 상태로, 황금빛 홀로그램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렇게 두 군데에 골든 프린트가 떠오른 건 처음인데……?’

지금까지 한 번 골든 프린트가 떠올랐던 프로젝트에, 연속적으로 또다시 골든 프린트가 나타났던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것은 우진의 입장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치 우진의 컨셉 설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골든 프린트가, 힌트를 추가로 더 던져주었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정말 그런 건가? 이거 좀 자존심 상하는데…….’

하지만 그런 묘한 기분도 잠시뿐, 우진은 다시 의욕 넘치기 시작했다.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골든 프린트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도 꽤나 재밌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단 우진이 가장 먼저 고민하기 시작한 부분은, 열 장도 넘는 스케치와 그림들 중 단 한 장에만 이 골든 프린트가 떠올랐느냐는 점.

일단 이 의문점은 금방 해결할 수 있었다.

평면도나 입면도, 혹은 외관 파사드에 대한 스케치인 다른 옐로페이퍼들과 달리, 골든 프린트가 떠올라 있는 종이만이 3차원 투시도였던 것이다.

평면과 입면의 요소가 전부 들어가 있는.

그러니까 그림 한 장으로 완벽한 구조를 알 수 있는 투시도.

우진은 빈 옐로페이퍼를 한 장 더 뜯어서, 좀 더 정갈하고 정확한 투시 도면을 다시 그려보았다.

그러자 그가 예상했던 대로, 그 종이 위에도 골든 프린트가 떠올랐다.

‘재밌네.’

그렇게 첫 번째 의문점이 쉽게 해결되자, 두 번째 의문이 곧바로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이 종이 위의 골든 프린트가, 현장에 떠올라 있던 그것과 같은 힌트를 가진 똑같은 프린팅이냐는 부분이었다.

‘일단 생김새는 거의 비슷한 것 같은데…….’

그래서 우진은 현장에서 직접 그렸던 종이를 꺼내었고, 새롭게 얻은 두 장의 골든 프린트와 비교해 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

우진은 무척이나 재밌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새로 생겨난 골든 프린트에는, 조금 더 특별한 규칙이 있었던 것이다.

‘이거 혹시…….’

새로운 골든 프린트는 현장에서 봤던 금빛 실루엣과 비슷하면서도, 확연하게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위에 우진이 펜대를 놀릴 때마다, 조금씩 그 형태가 계속해서 변하였다.

현장에 떠 올라있던 골든 프린트가 그저 현시점에서 떨어져 내리는 빛에 대한 정보를 주는 것이었다면.

우진이 그린 도면에 새롭게 나타난 골든 프린트는, 그의 설계가 바뀔 때마다 그 설계를 실시간으로 반영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거의 한 시간 동안 도면을 고쳐 그리며 골든 프린트의 변화를 연구한 우진은, 이에 대해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이거…… 대박이네.’

사실 건축에서 빛에 대한 정보는, 위도에 대한 정보와 치밀한 계산이 전제된다면 거의 확실하게 구해낼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러한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따로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고서는, 이렇게 실시간 설계에 따른 빛의 움직임을 곧바로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래서 우진은 점점 더 설레기 시작했다.

‘이번 골든 프린트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이제 좀 알 것 같기도 하네.’

이 골든 프린트라는 특별한 무기에 최근 우진이 꽂혀있는 패러매트릭 디자인을 잘 접목시킨다면.

정말 기상천외한 설계를 뽑아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

‘시간에 따라 빛이 들어서는 정확한 위치가 계산된다면, 그 빛을 따라 인터렉티브(Interactive)하게 변하는 패턴을 집어넣을 수도 있을 테고……. 이거 점점 더 욕심이 커지는데?’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수많은 상상들에, 우진은 저도 모르는 사이 마른침을 꿀꺽 집어삼켰다.

‘아니면 골든 프린트가 주는 이 힌트를 아예 알고리즘으로 짜서, 꼭 이번 사옥설계뿐 아니라 패러필드의 파빌리온에도 접목시킬 수 있다면…….’

파빌리온에 적용했던 우진의 기존 디자인 또한, 브루노가 설계한 빛의 흐름을 패러매트릭 디자인에 접목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계산에 의거한 것이 아닌, 비교적 추상적인 것.

그런데 그 추상적이었던 것이 완벽한 계산에 의해 다시 설계되고.

그래서 실제로 완공되었을 때, 깔끔하게 맞아떨어지는 그림을 연출해낼 수 있게 된다면?

우진의 시선이 달력을 향했다.

패러필드의 파빌리온을 설계 중인 이 시점에 빛과 관련된 골든 프린트가 떠올랐다는 것이, 이제 무척이나 공교롭게 느껴졌다.

‘그래. 골든 프린트가 어떤 이유로 내게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어디까지 어떻게 써먹느냐는 내 자유지.’

우진의 욕심은 언제나처럼 골든 프린트를 그저 사용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이것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내는 것.

그것이 우진의 최종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었다.

딸깍-

컴퓨터의 전원을 누른 우진은, 두세 장의 도면만을 남겨놓은 뒤 책상을 정리하여 한쪽으로 치웠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며, 3D프로그램을 부팅하였다.

“석구, 바쁘냐?”

[조금?]

“뭐 하는데?”

[지금 SH물산 사업장 쪽 발주 나갈 모형 최종점검 중이야.]

“그거 끝나면 대표실로 좀 와줘.”

[무슨 일인데?]

“중요한 일이야. 그러니까 가능한 오전 중으로.”

[오케이. 알겠어.]

석현과의 전화를 끊은 우진은, 이번에는 달력을 열어 이것저것 메모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다소 두루뭉술하던 우진의 계획이, 빠르게 구체화되고 있었다.

* * *

기말고사가 끝났다.

다사다난했던 우진의 2학년 1학기도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우진의 노트북 스크린에 떠올라 있는 성적표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극단적이었다.

A+와 F가 혼재되어있는,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성적표.

그것을 옆에서 구경하던 소연이, 혀를 내두르며 입을 열었다.

“아니, 오빠. 출석만 하면 B는 주는 수업을 재수강을 받으면 어떡해?”

“그러게.”

“C,D가 하나도 없는데, 학점이 3도 안 되는 성적표는 처음 봐.”

“나도 그래.”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우진의 옆에서, 이번에는 제이든이 길길이 날뛰기 시작하였다.

“Bloody Hell! 우진의 디공디 학점이 A+라니.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어.”

“제이든 너는 A+이 안 되나 보지?”

“제기랄. 그렇지 않아. 제이든은 분명히 우진보다 더 뛰어났으니까.”

“그래서 디공디 성적이 뭔데?”

“비밀이야.”

“A+미만이 아니라면, 그게 곧 A+이라는 말 아냐? 다 말해놓고 비밀이라니.”

“그렇지 않아, 우진.”

“뭐라는 거야.”

“아무튼. 제이든은 최고거든.”

“…….”

우진은 사실 제이든을 놀릴 강력한 무기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선빈이도 A+던데. 얘기해주면 상처받겠지?’

제이든은 우진을 제외하면 A+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선빈의 디공디 성적도 A+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 제이든의 반응을 보니, 그의 성적은 아마 A0 또는 A-정도일 터.

최종 과제에서 비주얼 스크립트의 알고리즘을 활용하지 않은 것이, 약간의 감점 요소가 된 모양이었다.

‘그러게. 하기 싫어도 그래스하퍼 공부 좀 하지.’

하지만 제이든의 여린 마음을 보호해주는 차원에서, 이번에는 관대하게 참아주기로 하였다.

“제이든의 학점은 무려 4.1이야. 우진과는 비교도 되지 않지.”

“좋겠네.”

“운 좋게 디공디는 A+을 받았지만, 역시 제이든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았겠지?”

“그러게.”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제이든의 시끄러운 목소리로부터 고막을 보호하기 위한 선택이었을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뭐, 그래도 학고(학사경고)는 면했으니까. 이거면 만족!”

근질거리는 입을 가까스로 다문 우진이,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도 투덜거리고 있던 제이든이, 따라 일어서며 우진에게 물었다.

“우진. 오늘 저녁은 치킨 어때. 살 없는 치킨이 먹고 싶어.”

“뼈 없는 치킨이겠지.”

“젠장. 우진은 좀 더 관대해질 필요가 있어.”

“내가 여기서 더 관대해지려면, 아마 디자이너가 아니라 성직자가 돼야 할 거야.”

이어지는 제이든의 헛소리를 무시한 우진이, 잠시 시계를 확인해 보았다.

‘교수님 만나 뵙고 오면, 대충 시간이 맞을 것 같기도 하고…….’

조운찬 교수와의 약속이 있어 저녁 식사를 거절하려 했는데, 생각해보니 시간상 괜찮을 것 같았던 것이다.

“나 그럼 교수님 뵙고 올 테니까, 저녁은 6시 반쯤 먹는 게 어때.”

대답은 소연이 먼저 했다.

“좋아. 나도 그때까지 영디과 친구 좀 만나고 오지 뭐.”

이번에는 제이든이 물었다.

“메뉴는?”

“음……. 살 없는 치킨만 아니면 될 것 같아, 제이든.”

“Bloody Hell!”

노트북을 정리해서 주섬주섬 가방에 넣은 우진은, 늘어놨던 짐들을 정리한 뒤 2학년 과실을 나섰다.

그리고 우진의 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교수실이 과실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지만, 약속 시간까지 이제 오 분도 채 남지 않았으니 말이다.

‘교수님보다는 먼저 가 있어야지.’

하지만 이때만 해도 우진이 알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오늘의 약속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한 명의 손님이 더 올 예정이었으니 말이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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