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여기에 짓겠습니다
사람의 눈은 수십 년에 걸쳐서 시각(視覺)에 적응한다.
빛의 반사에 의해 다양하게 인식되는 수많은 시각적 현상들을, 어떤 규칙성과 경험에 의거하여 시각정보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자’ 또한, 사람의 눈이 인식하는 시각적 정보 중 하나이다.
떨어져 내리는 빛을 어떤 물체가 가리고 있으면, 그 물체의 크기만큼 빛이 가려지면서 생겨나는 시각요소인 그림자.
그래서 특정 부분에서만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충분히 위화감을 줄 수 있는 요소였고.
그 덕에 우진은 이번 골든 프린트의 비밀을 풀어낼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일조량에 대한 힌트를 만들어 줄 줄이야.’
우진의 수첩에 그려진 것은 어떤 건축에 대한 디자인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실 그림이라기보다, 주변 환경이 고려된 일조권을 도식화한 것.
이 부지에서 해당 시간대에 확보 가능한 최대 일조량을, 골든 프린트를 통해 뽑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진은 한 가지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왜 이 자리에 골든 프린트가 나타났는지 이제 알겠어.’
골든 프린트가 아니었더라면 사옥 후보지로 고려하지 않았을 이 부지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된 것이다.
‘대로변이면서 서울숲 길 초입에 위치해 있고……. 그러면서 서울숲, 한강까지 조망권까지 확보되는 최고의 자리. 게다가 뚝섬역도 바로 앞이야.’
처음 우진이 고려했던 부지가 북측 중랑천에 가까운 위치였다면, 지금 골든 프린트가 떠오른 이곳은 뚝섬역과 성수역을 잇는 메인 대로변이다.
정확히는 대로의 끝 삼거리에서, <서울숲길>로 들어서는 초입부에 위치한 코너 자리.
우진이 처음 이 자리를 고려하지 않았던 이유는, 몇 가지 아쉬운 점들 때문이었다.
첫째로는 뚝섬역에서 한양대역, 왕십리역으로 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지상철이 부지의 앞으로 지나간다는 점.
두 번째로는 배후지역이 전부 용적률 낮은 ‘2종 주거지역’으로 묶여 있어서, 이 자리까지 2종 주거지역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점.
‘서울숲 길 기준으로 북쪽 지역이, 준주거지역으로 설정되어있을 줄 몰랐지.’
2종 주거지역은 대지 면적대비 충분한 연면적을 뽑아낼 수 없는 땅이었으니, 10층 이상의 사옥을 짓는 데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입지 자체는 원래 선택했던 부지보다 더 좋았음에도, 단점들이 더 크게 다가왔던 것.
하지만 골든 프린트가 나타나는 바람에 우진은 더 자세히 이 부지에 대한 정보들을 수집하게 되었고.
덕분에 숨겨져 있던 가치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지상철이 부지 앞으로 지나가기는 하지만 도로를 기준으로 반대편에 지나가기 때문에 조망권에 전혀 지장이 없으며, 소음으로부터 자유로운 편이라는 사실.
그리고 서울숲 길의 북측 일부 부지는 준주거지역으로 묶여 있어, 용적률 한도가 준공업지역만큼이나 높게 설정되어있다는 사실.
마지막으로 준공업지역의 가장 남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서남쪽으로 서울숲부터 한강까지의 조망권까지도 확보가 가능하다는 사실까지 말이다.
2종 주거지역인 서울숲 길 남쪽은 저층 건물밖에 들어설 수 없었으니.
앞으로 더욱 활성화될 서울숲 길의 상권으로 인한 이익은 전부 보면서도 고층 건물로 홀로 우뚝 지어 올릴 수 있는 알짜배기 부지였던 것이다.
골든 프린트가 우진에게 보여준 것은 일조권에 대한 정보에 불과했지만, 반대로 그 힌트를 알아내기 위한 정보 수집을 통해 더 중요하고 많은 정보들을 알아낸 우진이었다.
‘모르겠다고 그냥 포기했으면, 나중에 크게 아쉬울 뻔했어.’
그래서 우진은 망설임 없이 이곳 부지를 매수할 수 있었다.
아직 골든 프린트를 활용한 디자인 설계를 끝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입지 자체의 가치만 가지고도 판단하는 데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사장님, 저 여기로 할까 합니다.”
“네……?”
“이쪽 두 개 필지, 매물로 나와 있죠?”
“네, 맞습니다. 하지만 여기는…….”
당황한 표정으로 뭔가 또 이야기를 꺼내려는 윤 사장을 우진이 사전에 저지(?)하였다.
“단점들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사장님.”
“그, 그래도…….”
“꼭 여기로 해야 하는 이유가 있으니까, 최대한 싸게 매입할 수 있게만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제가 매도인을 만나서 가격을 최대한 깎아 보지요.”
윤 사장은 자신이 장담했던 대로, 매물로 나와 있던 가격보다 더 싼 가격에 거래를 성사시켜 주었다.
그래도 원체 부지가 넓은 탓에 원래 우진이 사옥부지 매입목적으로 책정했던 예산보다는 더 큰 출혈이 있었지만, 당연히 그게 아깝지는 않았다.
1.5배 정도 더 많은 돈을 써야 했다면, 우진이 얻을 수 있는 유 무형적 가치는 3배도 넘을 것 같았으니까.
“와우, 여기가 WJ 스튜디오 신사옥을 짓게 될 부지라는 거지?”
“그렇다니까.”
“뚝섬역도 가깝고, 서울숲도 가깝고. 입지 죽이네!”
우진이 머릿속으로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르는 진태는 속 편하게 감탄하였고, 그런 그를 보며 우진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잔금은 넉넉하게 8월까지로 잡았어.”
“알겠어. 좀 빠듯하긴 하겠지만, 다음 달 매출 괜찮게 나올 테니 충분히 확보 가능할 거다.”
“원래 땅 주인이 공장 주인이었으니까, 따로 명도 할 일은 없을 거야.”
“그건 좋은 소식이네.”
“착공은 9월 정도로 잡아볼 테니까, 그때까지 사전작업 좀 부탁해.”
“오케이. 그럼 디자인 설계는?”
“그거야 내가 직접 핸들링해야지.”
“좋아, 좋아.”
일단 부지 매입이 진행되자, 그다음 단계들은 일사천리였다.
애초에 WJ 스튜디오 자체가 설계부터 시공까지 전부 다 취급하는 업체이면서 대표인 우진이 그 모든 것을 진두지휘하니.
예산 집행과정에서 필요한 자잘한 보고단계들을 많이 생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공사가 곧 시행사이자 클라이언트인, 아주 이상적인 사업장인 것.
‘이제 이 골든 프린트를 만족시킬 수 있을 만한 최고의 설계를 뽑아내기만 하면 되겠는데…….’
대표실 책상에 앉은 우진은, 설레는 마음으로 옐로페이퍼를 펼쳤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골든 프린트가 준 정보를 통해서 최고의 디자인 설계를 뽑아내는 일.
‘골든 프린트가 주변 환경에 따른 일조량에 대한 정보를 줬으니까……. 그 정보를 최대한 활용하는 디자인을 뽑아내는 게 골든 프린트의 의도겠지.’
우진의 경험상 골든 프린트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황금빛 홀로그램은 사라지지 않는다.
때문에 만약 우진이 최선의 디자인을 해내지 못한다면, 그는 영원히(?) 자신의 사옥에서 황금빛 선들을 마주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런 일은 없어야…….’
끔찍한 상상을 잠시 떠올린 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펜을 집어 든 우진의 손이, 옐로페이퍼 위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9월에 착공을 하겠다고 이야기했으니, 최소 7월 내로 디자인은 전부 나와야 할 터.
8월 한 달은 시공을 위해 필요한 실시설계를 뽑아내는 데만 해도, 충분히 빠듯할 터였다.
‘일조량을 최대한 활용한 건축디자인이라…….’
앉은자리에서 거의 세 시간을 넘게 고민한 우진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오랜만에 무아지경으로 펜대를 놀리다 보니, 어깨가 결릴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디자인 회의부터 좀 해봐야겠어.’
파사드 디자인부터 시작해서 평면도까지.
열 장도 넘는 그림을 그려댄 우진은, 그것을 그대로 책상 위에 올려둔 채 짐을 챙겼다.
설계라기보단 아이디어스케치에 가까운 그림들이었지만, 이것들을 그대로 내일 회의에 들고 들어갈 예정이었다.
“진태 형, 아직 안 갔어?”
“아, 이제 퇴근하려던 참이야.”
“같이 가자. 나 지금 나가려고.”
“좋지. 오랜만에 저녁이나 같이할까?”
“뭐, 그럽시다.”
사옥 건설을 위한 준비가 얼추 끝나서인지, 어느 때보다 기분 좋은 표정으로 퇴근길에 오른 우진.
그런데 우진이 진태와 떠들며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그 시각.
우우웅-!
우진이 떠난 자리에 남아있던 한 장의 옐로페이퍼에, 황금빛 홀로그램이 일렁이기 시작하였다.
* * *
스페인의 건축디자이너 마테오는, 최근 무척이나 골치 아픈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그 상황이라는 것은 당연히, 그의 주업인 건축설계와 관련된 일.
정확히는 얼마 전 설계권을 따낸, 스타디움 건축설계 때문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아니, 실장님. 이것보다 더 평면을 뒤틀면, 관객석을 충분히 확보하는 게 너무 힘들어진다니까요?”
“곡면을 따라 불규칙하게 관객석을 배치한다면, 남는 공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아…….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만…….”
한두 달 전쯤 브루노와 통화한 이후.
그로부터 도움을 받은 마테오는, 사실상 산 마메스 경기장의 설계권을 따낸 상태였다.
공모 결과가 공식적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회장 루씨아노가 원하는 비정형 파사드를 디자인하여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마테오가 바스크 출신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그래서 마테오는 뛸 듯이 기뻤었다.
이번 설계권을 따냄으로 인해서 몇 달 동안의 일거리가 생기기도 했으며, 산 마메스 스타디움은 마테오라는 건축가의 포트폴리오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줄 훌륭한 건축 소스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루씨아노 회장의 마음에 들기 위해 비정형적인 투시도를 뽑아냈던 마테오는, 실시설계 과정에서 적잖은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회장님께서 분명, 보여줬던 투시도와 다르다면서 화를 내실 겁니다.”
“실장님……. 컨셉 디자인이 실시설계과정에서 변경될 수 있음은,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비정형적인 아름다움을 위해 디자인했던 구조들이, 실제 건축을 위한 설계에 들어가자 많은 문제를 발생시켰던 것.
마테오는 이 현실적인 수준에서 회장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그것은 너무 안일했던 판단이었다.
회장은 물론 실무 단계에서 그를 상대하는 실무자조차, 마테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완강했으니 말이다.
“조금만 더 고민해 주세요, 마테오. 당신이라면 분명 더 멋진 스타디움을 디자인할 수 있을 겁니다.”
“노력……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장님.”
“휴우. 사실 저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시다시피 회장님께서 쉽게 물러서지 않으실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마 제가 오케이 싸인을 내려도, 본인 성에 차지 않으시면 계속해서 컨펌을 내 주지 않으실 분입니다.”
“그렇겠지요.”
“조금만 더 해봅시다. 그래도 회장님께선 마테오를 믿고 계십니다.”
“알겠습니다.”
그래서 마테오는 정말 속이 꽉 막힌 기분이 되었다.
‘하아……. 이걸 어쩌지. 이제와서 못하겠다고 포기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회장이 원하는 디자인을 그대로 뽑아내기 위해서는 평면도의 개념을 뛰어넘는 3차원 설계 방식이 도입되어야 하는데, 그런 첨단기술이 마테오에게는 없었으니 말이다.
‘으으…….’
그래서 마테오는,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브루노에게 전화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보다 첨단 건축설계 기법들에 대해 많이 알고있는 브루노라면, 어느 정도 해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헤이, 브루노. 정말 미안한데…….”
만약 생각보다 더 많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브루노의 이름까지 설계자로 올려줘야겠다는 각오를 한 마테오.
그런데 그런 생각으로 전화했던 마테오는, 브루노와의 통화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을 듣게 되었다.
[흠. 사실 3차원 설계에 대한 기술은, 내게도 없다네, 마테오.]
“하아……. 역시 그런가?”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사람이, 어쩌면 자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뭐……?! 대체 그 사람이 누군가!”
[마테오. 자네 혹시 한국으로 잠깐 들어올 시간적 여유가 있는가?]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