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69화 (169/315)

169화

여기에 짓겠습니다

우진은 두 눈을 끔뻑였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은은하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광활한 시야 안에 또렷하게 빛나고 있는 황금빛 물결들.

이건 분명 우진이 처음 보는 또 다른 형태의 골든 프린트였고, 결코 환각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진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여기서 왜 나와?’

지금까지 우진에게 나타났던 골든 프린트는, 언제나 건축의 설계나 디자인에 도움을 주는 것이었으니까.

“대표님, 그쪽에서 뭐 하세요?”

“아, 자, 잠시만요.”

하지만 당황은 잠시일 뿐, 우진은 이 상황에 대해서 침착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골든 프린트는 그에게 도움을 주면 도움을 줬지, 결코 해를 끼치는 현상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지난번 카페 프레스코에서 골든 프린트가 떴을 때……. 그때도 도면이 아닌 이런 삼차원공간이었지.’

지금까지 항상 골든 프린트는, 우진의 디자인에 도움이 될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뜬금없이 나타난 이 녀석이 당황스러웠지만, 다시 천천히 생각해보니 이상할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생각해보면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부지敷地니까…….’

잠시 골든 프린트를 살펴보던 우진이, 윤 사장을 향해 얘기하였다.

“사장님, 잠시…… 이쪽을 좀 둘러봐도 될까요?”

“음, 이쪽에는 따로 나와 있는 매물이 없는데요?”

우진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임장 나왔으니, 주변 환경을 전체적으로 좀 꼼꼼하게 둘러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제가 안내해 드릴까요?”

“아! 그러실 필요까진 없고요. 저 혼자 빨리 둘러보고 와도 되겠습니까?”

“아……. 뭐, 그러시다면. 편히 둘러보고 오세요. 저는 먼저 저쪽 부동산에 가 있겠습니다.”

“10분 내로 가겠습니다.”

우진이 뭘 보겠다는 건지 감이 오지 않은 윤 사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먼저 자리를 떠났고.

우진의 시선은 다시 금빛으로 빛나는 선들을 따라 움직였다.

분명히 건물들의 뒤편에 존재하거나 그 아래 깔려있는 금빛 선들이건만, 마치 선들이 보이는 위치만 건물들이 투명해지기라도 한 듯 적나라하게 골든 프린트의 형태가 우진의 눈에 들어온다.

‘신기하네. 지형지물이 전부 투시(透視)되는 느낌이잖아?’

벌써 몇 번을 접함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적응되지 않는 기현상.

우진은 혀를 내두르며 천천히 걷기 시작하였다.

* * *

골든 프린트가 떠올라 있는 부지는, 그렇게 넓은 공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진이 처음 생각했던 150평 정도의 부지의 절반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공간.

그래서 금빛 선을 따라 한 바퀴 도는 데까지, 우진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진은 다양한 의문점을 떠올려야 했다.

일단 첫 번째 의문은 당연히, 이 부지에 골든 프린트가 어째서 떠올랐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골든 프린트의 영역을 보면, 분명히 이쪽 대로변 필지 두 곳에 걸쳐 있는데…….’

필지란 명확한 경계를 가지는 토지의 등록단위이다.

하나의 지번을 부여받아 지적공부에 등록되는, 토지의 소유권을 나타낼 수 있는 기본 단위인 것.

그런데 골든 프린트는 어떤 하나의 필지를 가리키는 게 아닌, 두 개 필지에 걸쳐서 떠올라 있었다.

면적 자체는 100평은커녕 50평도 되어 보이지 않았지만, 그 면적이 교묘하게 두 필지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인위적으로 분리해놓은 법적 경계 따위는, 아무래도 골든 프린트의 고려 대상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러면 골든 프린트가 생성된 땅을 전부 확보하기 위해서……. 결국 200평 이상을 사야 되는 거잖아?’

아무리 우진이라 해도 눈대중으로 필지의 정확한 평수를 맞출 수는 없다.

하지만 대략 어느 정도 가늠은 해 볼 수 있었고, 두 개 필지를 전부 매입한다면 얼마가 들어갈지도 짐작해볼 수는 있었다.

그래서 우진의 머릿속에 떠오른 액수는, 기존에 책정해뒀던 예산의 2배 정도.

“크흠…….”

시작부터 꽤나 골치 아픈 난제를 던져주는 골든 프린트였다.

‘후우. 그래. 돈이야 어떻게든 구한다고 치고…….’

이어서 두 번째로 우진이 떠올린 의문은, 골든 프린트의 형태에 대한 의문이었다.

복잡한 선들로 이뤄져 있는 황금빛 프린팅은, 언제나처럼 추상적인 형상을 하고 있었고.

그것은 평면적으로 대지 위에 그려져 있었지만, 결코 평면도의 형태는 아니었던 것이다.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모든 선들이 크고 작은 다각형으로 이뤄져 있다는 점.

마치 수많은 다양한 도형들이, 납작하게 겹쳐 그려진 모양새였다.

‘이게 대체 뭔지, 전혀 감이 안 오는 게 문제네.’

사실상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형태가 우진에게 주는 힌트가 어떤 건지를 알아차려야 한다는 부분이다.

그걸 알아야 우진도 확신을 갖고 디자인을 할 수 있을 것이며.

그에 앞서 이 부지들을 무리해서라도 매입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힌트가 쉽게 풀릴 리는 없었고, 그래서 우진은 사진이라도 찍어서 가져가고 싶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골든 프린트가, 스마트폰 사진으로 찍힐 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후. 어떻게든 찾아내야지. 골든 프린트가 내게 알려주려는 힌트를……. 이대로 지나칠 순 없으니까.’

슥- 슥-

수첩에 대략적인 스케치를 남긴 우진은, 일단 자리를 떠나 윤 씨와 약속했던 장소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다른 매물들을 브리핑받는 동안에도, 우진의 머릿속은 온통 골든 프린트뿐이었다.

“그럼 사장님. 제가 최종적으로 고민 좀 해 보고,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대표님! 물론입니다. 신중히 결정하셔서 전화 주세요!”

그래서 돌아오는 길, 우진은 골든 프린트를 다시 한번 둘러본 뒤에 WJ 스튜디오로 귀환하였다.

그리고 그날부터, 우진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그 누구에게도 조언받을 수 없는.

오로지 혼자 해결해야만 하는 특별한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 * *

우진에게는 예전부터 한 가지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설계나 디자인을 포함하여 어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 그와 관련된 정보들을 무작위로 수집해보는 버릇.

이번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골든 프린트의 형태만 보고는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골든 프린트가 떠오른 필지를 다각도로 분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지의 용도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입지조건.

심지어는 필지의 주변에 위치한 건물들이 어떤 용도로 쓰이고 있는지까지도.

분석할 만한 건덕지가 하나라도 있으면, 우진은 뭐든지 찾아서 연구하고 도식화했다.

‘이러다 보면 뭐라도 하나 떠오르겠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작위로 아무 정보나 수집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진이 서치하고 분석하는 정보들은, 해당 위치에 설계‧디자인을 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우진은 이 필지가 어떤 풍수지리적인 의미를 가진 곳은 아닌지, 평소에 관심 없던 영역까지도 찾아서 들춰보았다.

본래 그런 토테믹(Totemic)한 분야를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골든 프린트도 비슷한(?) 영역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으……. 젠장! 대체 뭐야 이게.”

하지만 그렇게 이틀, 삼 일이 지날 때까지도, 우진은 결국 어떤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이 든 우진은, 해가 질 무렵 무작정 사무실을 나섰다.

“나 오늘은 먼저 퇴근해 볼 게 형.”

“그래라. 근데 너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응? 갑자기 왜?”

“방금 대표실에서 이상한 비명을 들은 것 같아서.”

“아…….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뭐 문제 있으면 숨기지 말고 얘기해야 돼, 알겠지?”

“내가 애냐. 걱정 말고 일 보셔.”

끝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진태를 뒤로한 채, 우진이 향한 곳은 바로 골든 프린트가 있던 그곳이었다.

걸음을 옮기며 혹시나 골든 프린트가 이미 사라졌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잠깐 했지만, 다행히 황금빛 선들을 아직 우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요상하고 복잡한 형태를 한 채로 말이다.

저벅- 저벅-

실물을 영접하자 다시 마음이 착잡해진 것인지, 우진은 한숨을 푹 쉬며 그 주변을 빙 둘러 걷기 시작하였다.

‘석현이라도 골든프린트를 공유할 수 있으면, 뭔가 단서를 잡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금빛 선 하나하나를 뜯어보며 별생각을 다 해봤지만, 그런다고 해서 딱히 해답이 떠오를 리는 없었다.

‘이러다 결국 못 찾아내면……. 그래도 이 부지를 매입하긴 해야 할까? 아니. 그럴 거면 그냥 원래 계획대로 북측 강변부지를 사는 게 낫겠지?’

오히려 생각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우진의 머릿속은 더욱 심란해지기만 할 뿐.

‘젠장……. 차라리 방구석에 박혀서 그래스하퍼 알고리즘을 짜는 게 더 쉽겠어. 그건 어디 물어볼 데라도 있지.’

그런데 그렇게 툴툴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우진은, 어느 순간 또다시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응……?”

처음 골든 프린트를 발견하고 골목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때 느꼈던 묘한 위화감과 비슷한 것이 느껴진 것이다.

‘잠깐. 방금 분명히 뭔가 이질적이었는데?’

스치듯 지나간 위화감이었지만, 우진은 그것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있으면 잡고 싶다는 간절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본능적으로 여기에 어떤 단서가 있을 것이라는 감이 온 것이다.

그래서 우진은 걸음을 멈췄고.

방금 지났던 그 자리를 똑같이 다시 지나기 위해 몇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그래. 여기서 다시 한번 이렇게 움직이면…….’

그리고 바로 그 순간.

“……!”

우진의 온몸에,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아 올랐다.

‘미친……!!’

처음 이 공간을 발견했을 때와 방금전 같은 위치에서 움직였을 때.

이 순간 동시에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림자! 그래, 그림자였어!’

우진의 걸음에 따라, 저물어가는 해의 각도에 따라.

우진이 움직이는 방향의 반대편으로 천천히 기울어가며 움직이고 있던, 주변 지형지물 일부의 실루엣이 담긴 그림자.

그 그림자들이 골든 프린트의 영역에 들어선 순간 정말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그림자의 위치가 골든 프린트에 그려진 황금빛 선과 맞물려 떨어지면서, 마치 그 위치에 흡수되듯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번에는 이렇게 반대편으로 움직여 볼까?’

아직 정확히 이 골든 프린트의 힌트에 대해 통찰한 것은 아니지만, 우진은 온몸에 힘이 나는 것이 느껴졌다.

칠흑 같던 어둠 속에서 당장 탈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한 줄기 빛을 찾아낸 셈이었으니까.

그래서 우진은 정신없이 사방으로 움직이며, 이 수 많은 도형들이 의미하는 바를 찾아내기 위해 뛰어다녔다.

그리고 그렇게 완전히 해가 저물어갈 즈음.

우진이 들고 있던 수첩에,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어 있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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