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작은 건축
많은 건축디자이너들은, 파빌리온 작업을 좋아한다.
<작은 건축>이라고도 불리는 파빌리온은, 엄연한 건축이면서도 디자이너로서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실용건축에 적용하고 싶었지만, 다양한 제약들과 클라이언트와의 마찰 때문에 시도하지 못했던 특별한 디자인들.
파빌리온은 그런 부분들을 좀 더 편하게 디자인해볼 수 있는 실험대 같은 역할도 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패러필드 로비의 파빌리온에 대한 이야기를 우진이 꺼냈을 때, 브루노는 자신이 직접 디자인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원하는 디자인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기회이면서, 패러마운트라는 대기업으로부터 충분한 페이까지 받을 수 있는 좋은 조건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뿐.
파빌리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두 눈을 반짝이는 우진을 보자, 브루노의 생각은 달라지게 되었다.
‘이 특별한 친구가 이번엔 뭘 보여주려나……?’
공모전에서의 첫 만남 때부터, 브루노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던 우진.
이 어리고 특별한 디자이너가, 이번에는 어떤 신선한 디자인을 보여줄지, 그것에 대한 기대가 더 커진 것이다.
사실 순리를 따져도 이 모든 기회를 만들어낸 우진에게 파빌리온의 디자인을 맡기는 게 맞았지만.
그런 부분들을 떠나서도 우진의 디자인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해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미팅을, 브루노는 꽤나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씩 제이든에게 들었던 이야기들도, 브루노의 기대를 더욱 증폭시켜놓았고 말이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브루노.”
“오호. 제이든은 우진의 디자인을 이미 봤나봅니다?”
“하하, 그냥 본 정도가 아니죠.”
“음?”
“제이든은 Boss의 훌륭한 서포터니까요.”
“제이든이 우진의 디자인에 많은 도움을 줬나 보지요?”
“Of course! 제이든이 없었다면 아마……. 젠장. 그래도 우진은 잘했겠지만, 어쨌든 제이든은…….”
며칠 전 제이든과의 대화를 잠깐 떠올린 브루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금 엉뚱한 면이 있긴 하지만, 제이든도 결코 범상치 않은(?) 디자이너임은 분명했다.
적어도 제이든 덕에, 올해 사무실의 분위기가 한층 UP된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제이든이 조금만 더 꼼꼼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그리고 브루노가 이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던 그때.
바깥에서 요란한 제이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이 Boss! 빨리 들어오라고!”
* * *
“오랜만입니다, 우진. What have you been up to lately?”
어눌한 한국어에 영어를 섞어가며, 우진을 향해 반갑게 인사하는 브루노.
그런 그를 향해, 우진도 웃으며 인사하였다.
그런데 웬일로 우진의 입에서, 영어 비슷한 것이 흘러나왔다.
“저야 잘 지냈죠, 브루노. I’m keeping cool. And you?”
종종 한국말을 섞어가며 얘기해주는 브루노에게 미안했던 우진이,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는 소연에게 몇 가지 영어 회화를 배워놓은 것.
물론 그 영어를 가르친 장본인인 소연은, 옆에서 머리를 탁하고 짚었지만 말이다.
“제발. 그 발음 좀 어떻게 하면 안 될까 오빠?”
제이든도 한숨을 푹 쉬었다.
“소연, 제발 우진에게 영어를 가르치지 말아줘.”
“왜?”
“이건 영어에 대한 모독이라고.”
하지만 두 사람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인 우진.
“혀가 짧은 걸 어떡해.”
그런 그를 보며, 소연과 제이든이 동시에 푹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Holy…….”
“하아…….”
시작부터 유쾌하게 등장하는 우진을 보며, 브루노는 껄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딱히 소통에 도움 될 수준은 아니었지만, 어눌하게라도 영어로 얘기하는 모습을 보니 재미는 있었던 것이다.
“저도 잘 지냈습니다, 우진.”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우진의 파빌리온 디자인을 확인하고 싶었던 브루노에겐, 우진의 어눌한 영어를 계속 들을 여유가 없었고.
그래서 자연스레 두 사람의 대화는, 예전처럼 통역으로 전환되었다.
브루노에게는 대기하고 있던 통역사가 있었고, 우진에게는 소연이 있었으니까.
“설계조율 때문에 엄청 바쁘셨죠?”
“바쁘기야 했지요. 하지만 제이든과 소연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흠. 제이든이 도움이 됐다고요?”
“Bloody Hell!”
“하하, 물론입니다. 제이든은 뛰어난 포텐을 가진 디자이너지요.”
자연스레 회의실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들은, 미리 준비되어 있던 음료로 목을 축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대화의 주체는 거의 브루노와 우진.
우진이 가져온 파빌리온의 디자인을 보여주기에 앞서, 설계조율의 진행 상황에 대해 공유하는 두 사람이었다.
“지난번 참조 주신 메일은 잘 확인했습니다.”
“패러필드 쪽에 보냈던 메일 말씀하시는 거죠? 설계 최종본.”
“그렇습니다, 브루노. 기존안에서 큰 변동 없이, 조율이 잘 된 것 같던데요?”
“패러마운트 쪽 담당자가, 꽉 막힌 사람이 아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예산도 꽤 넉넉하게 책정해 줘서 좀 놀랐지요.”
“저도 엊그제 통화했는데, 태호건설의 비리 사건 때문에 생긴 이미지를 쇄신하고 싶어 하는 눈치더라고요. 저한테도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잘 부탁한다고…….”
“아하.”
“브루노의 설계로 시공되었는데 그림이 조감도처럼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면……. 패러마운트가 여론에서 또 이런저런 뭇매를 맞게 될 테니, 그게 걱정되나 봐요.”
“그런 거였군요.”
“패러마운트 임원진의 관심도 모여 있는 상태니, 담당자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만하죠.”
디렉터는 브루노지만, WJ 스튜디오 또한 패러필드의 설계 전반에 참여하였다.
그래서 우진은 최종조율된 설계를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 가며 확인하였고, 그런 우진의 모습은 브루노에게 신뢰를 심어주었다.
‘확실히 프로패셔널해.’
사실 이미 픽스된 설계를 서포터인 우진의 입장에서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볼 필요는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하나 공들여 피드백을 내어놓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상층부터 시작해서 지하층까지.
구획 하나하나 기존의 설계와 어떻게 변동되었는지, 도면을 펼쳐놓고 꼼꼼하게 비교하는 우진.
그리하여 메인 로비가 있는 최하층의 도면을 펼쳤을 때.
우진은 드디어 준비해 온 USB를 꺼내 들었다.
그가 지난 몇 주 동안 심혈을 기울여 디자인한, 파빌리온의 모델링이 담긴 파일을 말이다.
“브루노.”
“말씀하세요, 우진.”
“이번에 저희 설계에서 핵심이 되는 요소가, 사용자의 동선과 채광 아닙니까?”
우진이 운을 떼자, 브루노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그렇지요.”
브루노가 디자인한 왕십리 패러필드는 여러 가지 디자인적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브루노가 가장 신경 쓴 부분이 바로 동선과 채광이었다.
정확히는 다이아몬드 패턴의 유리천장을 통해 지하 공간까지 내리쬐는 자연광을.
지상 건물의 형태와 유리패널의 각도를 이용하여, 지하까지 이어지는 사용자 동선 곳곳에 흐르도록 만든 디자인.
그 아름답게 내리쬐는 태양광이 건물 내부로 흘러내리고, 종래에 모여드는 곳이 바로 우진의 파빌리온이 지어질 로비 공간이었다.
우진은 USB 파일이 스크린에 켜지는 동안, 품속에서 미리 준비해 왔던 아이디어스케치를 꺼내 들었다.
패러필드의 설계도가 입체적으로 그려진 도면 위에, 붉은 색상으로 어지럽게 그어져 있는 수많은 선들.
“이게 뭐지요?”
브루노의 물음에, 우진이 간결하게 대답하였다.
“유리패널을 통해 태양광이 흘러내리는 경로를, 선으로 표현한 겁니다.”
“오호.”
“그리고 이 선들이, 제가 지금부터 보여드릴 파빌리온 디자인의 핵심이 될 요소이지요.”
우진의 말에 브루노는 다시 한번 아이디어스케치를 꼼꼼히 뜯어보았다.
이 선들이 파빌리온 디자인의 핵심이라는 말을, 한번 이해하고 추측해 보기 위해서 말이다.
‘흠…….’
하지만 잠시 후, 브루노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의 시간 동안 이 스케치를 보고 있는 브루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디자인 솔루션은, 이 선의 모양을 모티브로 만든 기하학적 조형물에 그쳤으니 말이다.
‘뭐, 그런 모양새의 파빌리온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한데…….’
같은 모티브로 디자인을 한다고 하더라도, 표현 방식이나 디자이너의 역량에 따라 결과물은 천차만별이 될 수 있는 법.
그래서 브루노는 이 이상 추측을 포기하고, 가만히 앉아 스크린을 응시하기 시작하였다.
아이디어스케치만으로는 아직 특별함이 느껴지지 않았으니.
우진이 가져온 결과물을 확인한 뒤에, 그 이상의 것들을 논의해 볼 생각이었다.
“자, 그럼 일단 모델링부터 먼저 보여드리도록 하죠.”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
덤덤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던 브루노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야 했다.
* * *
수많은 다이아몬드 패널이, 공간의 흐름을 따라 움직인다.
지하 최하층부터 시작해서 몇 개 층을 걸쳐 뻥 뚫려있는 공간인 패러필드의 로비.
마치 바닷속을 유영하는 작고 수많은 물고기 떼처럼, 로비의 외곽 동선을 따라 아름답게 흐르고 있는 수 많은 다이아몬드 패널들.
처음 이 모델링을 본 순간, 브루노는 방금전까지 했던 모든 추측과 고민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밖에 없었다.
다른 모든 요소들을 다 떠나서, 그저 디자인 그 자체를 감상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하…….’
심지어는 우진이 보여준 아이디어스케치까지도 잠시 동안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어떤 디자인적 컨셉과 모티브를 생각하기에 앞서, 그냥 우진이 가져온 모델링의 비주얼 자체가 압도적이었던 것이다.
사실 우진이 이야기한 아이디어스케치가 어째서 이 디자인의 핵심요소였는지, 그것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형태를 디자인할 수 있었던 거지?’
브루노의 시선이, 모델링의 구석구석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어떤 흐름과 규칙성에 따라 작아지고 커지는 다이아몬드 패널들을 보고 있자니,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3차원 공간에서 이토록 완벽한 규칙성을 가진 모듈들을 수천 개 이상 그려내는 것은,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가능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툴을 사용했기에, 이런 모델링을 뽑아낼 수 있었을까?’
마치 어떤 경이로운 자연경관을 감상하기라도 하는 양.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가만히 그것을 응시하고 있는 브루노.
‘그래. 과정도, 동기도 전부 중요하지만……. 결국 좋은 건축 디자인이란, 보는 순간 이렇게 압도적인 충격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
브루노는 이 공간 전체를 디자인한 디렉터이자 건축가이다.
때문에 자신이 설계한 공간에 동화될 이 파빌리온의 형태를 자연스럽게 상상할 수 있었고.
그래서 모델링만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들까지도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었다.
몇 개 층을 관통하며 이십 미터가 넘는 높이에서 흘러내릴 수천 개의 다이아몬드 패널들.
브루노가 디자인해 둔 유리패널들과 어우러지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낼 거대한 파빌리온.
그것들을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 느껴지게 될, 웅장하기 그지없는 스케일감.
디자인적 아름다움의 기준이야 항상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적어도 브루노는 한 가지 확신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종류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말이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