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작은 건축
브루노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음……?”
진동하는 스마트폰의 화면 위에 떠올라있는 수신자의 이름이, 의외의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MateoVilla]
‘마테오가 어쩐 일이지?’
스페인의 유명한 건축가 중 한 명이자 브루노의 친구이기도 한 인물인 마테오 비야.
모국에서 일할 때에는 거의 매주 얼굴을 보던 가까운 사이였지만, 브루노가 한국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뒤로는 연락이 뜸해졌던 친구였다.
“흠.”
반가운 이름에 기분이 좋아진 브루노는,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이야, 이게 누구신가.”
브루노의 기분 좋은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에서도 유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헤이, 브루노. 잘 지냈는가?]
“나야 항상 잘 지내지.”
[요즘 한국에서 엄청 활약하던데?]
“음? 글래셜 타워를 말하는 건가?”
[맞아. 얼마 전에 준공되었지?]
“천하의 마테오가 알아주니 기분이 좋군, 그래.”
[엘 크로키(EL Croquis)에서 봤어. 거의 메인으로 실렸던데?]
“하하. 내가 그쪽이랑 좀 친한 거 알잖나. 에디터들이 잘 봐준 게지 뭐.”
[겸손한 척하기는.]
엘 크로키는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 잡지 중 하나였다.
스페인의 건축물들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물들과 건축가의 작품 위주로 소개해 주는 인지도 있는 잡지.
때문에 여기에 한 번 실리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인지도가 생길 만큼, 공신력 있는 잡지이기도 하였다.
‘이거, 스페인에 돌아가면 편집장에게 밥이라도 한 끼 사야겠군, 그래.’
기분이 좀 더 좋아진 브루노가 어깨를 으쓱하였다.
엘 크로키에 글래셜 타워가 실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메인으로 올라간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여하튼. 그래서 어쩐 일인가, 마테오. 내 칭찬이나 해 주려고 이렇게 국제전화까지 했을 것 같지는 않고 말이야.”
[오랜만에 안부 차 전화할 수도 있지. 자네 너무 날 매정한 사람으로 보는 것 아닌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던 친구가 할 얘긴 아닌 것 같은데…….”
[하하.]
“본론이나 얼른 얘기해 보시게.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으니 말이지.”
[거 참. 알겠네. 브루노 자네도 성질 급한 것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브루노가 섬세한 건축디자이너라면, 마테오는 현장에서 구르는 상 남자 같은 스타일의 건축가였다.
그리고 이런 마테오의 성향을 잘 아는 브루노는, 그가 안부 차 전화했을 리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확신하고 있었다.
마테오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자네 혹시 축구 좋아하나?]
뜬금없는 마테오의 물음에, 브루노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뜬금없이, 축구?”
하지만 다음 순간.
[이번에 우리 사무실에서, 축구 경기장 설계 의뢰를 받았거든.]
예상하지 못했던 흥미로운 이야기에, 브루노의 눈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축구…… 경기장?”
[흐흐, 관심이 좀 생기나 보지?]
“당연하지. 벌써 재밌어 보이는데?”
건축가들은 대부분, 다양한 작업물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다.
브루노는 개중에서도 특별한 시설이나 건축물에 대한 욕심이 많은 디자이너.
축구 경기장이라는 흔치 않은 카테고리에, 흥미가 동한 것은 너무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었다.
[자네 고향이 비즈카야(Bizkaia)였나?]
“아니. 빌바오(Bilbao)가 맞긴한데, 그 동네는 아닐세.”
[그렇군.]
잠시 뜸을 들인 마테오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쨌든 빌바오 출신이라면, 산 마메스 구장을 알고 있겠지?]
브루노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화기에 대고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이지. 산 마메스의 거대한 아치는 아직도 기억나는군.”
[그 산 마메스 구장을 이번에 신축하기로 했다네.]
“오……! 그게 정말인가?”
[내 사무실에 설계 공모의 기회가 들어왔고 말이지.]
마테오의 이야기를 듣던 브루노는 반색하였다.
빌바오의 비즈카야는 브루노에게도 추억이 있는 지역이었고.
때문에 그곳의 랜드마크 중 하나였던 산 마메스 경기장이 신축된다는 소식은 기분 좋은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브루노는 한 가지 의아한 부분이 떠올랐다.
“그런데 마테오.”
[말씀하시게.]
“산 마메스 정도의 경기장 설계 공모라면 공시되지 않은 것이 이상한데……. 왜 나는 아직 본사에서 연락을 받지 못한 거지?”
브루노의 물음에, 마테오가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야 아직 내가 말한 내용이 오피셜이 아니기 때문이네.]
“음……?”
[친한 건축주 중 한 분이 아틀레틱 클루브(Athletic Club)*[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을 대표하는 명문 축구클럽이다.]의 구단 회장과 친분이 있는데, 그쪽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거든.]
“오호.”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동네가 바스크 순혈에 대한 집착이 좀 있지 않은가.]
“그야 아주 잘 알지. 특히 축구 쪽이라면…….”
[그래서 내게 가장 먼저 연락이 온 모양이야. 몇 가지 조건만 충족시켜 준다면, 내 사무소의 작품을 선택해 주겠다고 말이지.]
“하하. 어찌 된 일인지 대충 그림이 그려지는군.”
스페인에서 축구라는 종목은, 국기나 다름없을 정도로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특히 남성이라면 열에 여덟 이상이 축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을 정도.
그래서 브루노 또한 나고 자란 지역의 축구팀인 아틀레틱 클루브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이 21세기까지도 고수하고 있는 특별한 성향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바스크 지역 순혈만을 고집하는 민족주의적 성향.
‘바스크 순혈이 아니라면, 선수로 기용조차 하지 않는 친구들이니까…….’
설마 그 잣대를 구장설계에까지 가져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 그 덕에 마테오에게 가장 먼저 기회가 가게 되었으니……. 이걸 좋다고 해야 하나.’
잠시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린 브루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충족시켜달라는 조건은 뭔가?”
[그게, 좀 골치가 아파.]
“음……?”
[다른 건 다 우리가 맞춰줄 수 있는데, 조금 난해한 조건을 하나 요구했거든.]
브루노의 두 눈에 호기심이 어렸고, 마테오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경기장 내에서 경기가 진행되는 필드를 포함, 규정으로 규격이 정해져 있는 부분을 제외한 모든 시설물들을……. 가우디 건축물처럼 만들어 달라더군.]
“뭐……? 가우디?”
브루노는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고, 스마트폰 너머로는 마테오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구단 회장이 가우디의 열렬한 팬인가 봐. 축구장 자리에 구엘 공원(Güell)*[스페인의 유명 건축가 가우디의 대표작품. 기하학적인 구조와 화려한 문양을 활용해 디자인한 정원이다.]이라도 만들고 싶어 하는 눈치더라고.]
가우디는 ‘건축의 성자’라는 별명이 붙었을 만큼, 스페인에서 어지간한 위인 이상으로 사랑받는 20세기의 건축가였다.
때문에 아틀레틱 클루브의 구단 회장이 가우디의 열렬한 팬이라는 것은 별로 놀랍지 않은 사실.
하지만 어느 정도 정형성을 가져야 하는 건축물인 축구장이라는 시설에 가우디와 같은 비정형 건축디자인을 도입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대충 듣기에도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여 마테오의 한숨에 공감한 브루노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게 뭔가 도움받고 싶은 부분이 있는 거지?”
브루노의 물음에, 마테오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였다.
[이번 여름에 협회에서 열리는 컨퍼런스에, 자네가 꼭 와줬으면 좋겠어.]
“음? 그건 왜?”
[그때까지 우리가 최대한 설계 디자인 시안을 잡아놓을 텐데, 아무래도 자네의 조언을 꽤나 많이 받아야만 할 것 같거든.]
“하하. 내 조언이라……. 도움이 될까?”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는, 자네가 가장 도움 될 것 같은데……?]
브루노는 스페인의 건축가들 사이에서, 가장 도전적인 건축을 선호하는 사람 중 한명이었다.
도전적인 건축을 한다는 얘기는 건축설계 과정에서 많은 걸림돌을 겪어왔다는 이야기고, 그때마다 항상 솔루션을 찾아왔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그래서 마테오는 브루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준다면야. 내가 가지 않을 수 없겠군.”
[그래. 아주 잘 생각했다네. 이번에 지게 될 빚은, 내 아주 톡톡히 갚아주도록 하지.]
“하하, 친구 사이에 별말을 다 하는구만.”
마테오와 통화하는 사이, 브루노는 어느새 집에 도착하였다.
퇴근길이라 많이 막혔음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친구와 통화하다 보니 시간이 금세 지나간 것이다.
“자, 그럼 여름에 보도록 함세. 컨퍼런스가 7월이었나?”
[7월 둘째 주로 기억해.]
“좋아. 그때 보도록 하지, 친구.”
[이번 설계 공모만 잘 끝나고 나면, 한국에도 한 번 놀러 가겠네.]
“하하. 그러시게나.”
[자네의 글래셜 타워를 한번 보고 싶었던 참이거든.]
집에 문을 열고 들어선 브루노는, 마테오와 몇 마디 더 나눈 뒤 전화를 끊고 소파에 앉았다.
브루노는 마테오가 조금 부러웠다.
건축가로서 얻기 힘든 특별한 기회를 얻었으니까.
물론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는, 아직 두고 봐야 할 테지만 말이다.
“거 참. 축구 경기장이라……. 마테오가 오랜만에 재밌는 작업을 하는군, 그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설계권에 욕심이 나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이미 진행 중인 왕십리의 패러필드만 하더라도 축구장에 비견될 정도로 재미있는 프로젝트였으며.
이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다른 설계권을 탐낼 만큼 손이 남지도 않았으니까.
그래서 브루노는, 조금이나마 이 설계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만족하였다.
“가우디의 비정형 건축을 닮은 스타디움이라……. 마테오가 어떤 작품을 만들어 놓을지 기대가 되는구만.”
잠시 소파에 앉아 숨을 돌린 브루노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배달음식을 주문한 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
오늘은 다른 일정 없이 푹 쉴 예정이었다.
마테오로부터 재밌는 소식을 들은 것과 별개로, 내일은 그 자신의 설계를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 * *
수업이 끝난 우진은, 서둘러 짐을 챙겨 강의실을 나왔다.
“어후, 시간이 진짜 빠듯하네.”
오늘 강의는 소연과 함께 듣는 유일한 교양수업.
때문에 강의실을 나오는 우진의 뒤에는, 소연도 부랴부랴 짐을 챙겨 따라 나오고 있었다.
“오빠, 미팅 몇 분 남았지?”
“30분 남았네.”
“그때까지 갈 수 있겠어?”
“음……. 지금이 다행히 밀리는 시간은 아니니까?”
오늘 우진은 중요한 미팅이 있었다.
최근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갈아 넣어 뽑아낸 파빌리온의 디자인 시안을, 브루노에게 처음 보여주기로 한 날이었으니까.
사실 이렇게 일정이 급박할 예정은 아니었다.
오늘 교양수업은 원래 빠지려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계산해보니 이미 결석 가능한 한도(?)가 가득 찬 상황이었고.
그래서 이렇게 수업을 다 들은 뒤에 출발할 수밖에 없던 우진이었다.
“조금만 빨리 걷자, 소연아.”
“알겠어.”
오늘 하루 종일 수업이 있었던 소연은, 브루노의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는 날이었다.
그래서 굳이 우진과 함께 갈 필요는 없었지만, 그를 따라가는 이유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브루노가 파빌리온을 꽤나 기대하던데…….’
소연은 최근까지 우진이 조운찬 교수의 교수실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파빌리온 디자인에 열을 올리는 것을 봐왔다.
게다가 파빌리온 디자인에 사용된 툴이 졸업반 선배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래스하퍼 라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었으니.
우진이 대체 어떤 디자인을 들고 나왔을지 너무 궁금했던 것이다.
“자, 갑시다!”
부르릉-!
그래서 출근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연은 망설임 없이 우진의 차에 올랐다.
이번 왕십리 패러필드 프로젝트에서 양사 간의 소통을 많이 책임졌던 소연이었기에.
따로 브루노의 허락이 없더라도, 미팅에는 참관할 수 있을 터였다.
“벨트 꽉 메라.”
“응?”
“나 좀 밟아야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부우우웅-!!
“으아악!”
우진이 평소답지 않게 과격하게 운전한 탓에, 미팅 시간은 늦지 않고 도착하였다.
그리고 사무실에 도착한 두 사람을 가장 먼저 맞아준 것은,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던 제이든이었다.
“헤이 Boss! 빨리 들어오라고!”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