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62화 (162/315)

162화

Parametric Design

당연한 얘기겠지만, 디자이너에게도 성향이라는 게 있다.

때문에 건축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도 사람마다 다른 성향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가르는 대표적인 기준점 중 하나가 감각적인 디자인과 이성적인 디자인이다.

물론 이 기준이라는 것을 칼로 무 자르듯 정확하게 나눌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디자이너든 이 두 가지 성향 중 어디 하나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울 수밖에 없는데.

먼저 감각적인 디자인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것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다.

[경험에 의해 축적된 수많은 소스들을 자신의 감성과 느낌에 의존하여 풀어내는 디자인 방식]

그러니까 어떤 논리와 이성적인 사고에 의한 디자인보다는, 디자이너 본인의 Feeling에 더 의존하는 디자이너들이, 감각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는 디자이너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개념에 해당하는 이성적인 디자인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었다.

[디자인 프로세스를 확립함에 있어 자신의 어떤 추상적인 감각보다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론을 중시하는 디자인 방식]

감각적인 디자이너들이 타고난 자신의 느낌과 감각을 가지고 디자인한다면, 이성적인 디자이너들은 어떤 논리적인 프로세스를 가지고 디자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우진과 제이든의 성향을 이 관점에서 본다면, 완전히 상극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제이든은 본인의 Feeling을 중시하는 디자이너였고, 우진은 논리적인 프로세스를 바탕으로 디자인하는 디자이너였으니까.

그래서 어떤 유기적인 조형물을 디자인해야 하는 공통된 주제의 과제를 진행하면서도, 둘이 추구하는 디자인 방식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모델링 툴을 활용함에 있어서도, 선호하는 방식이 달랐고 말이다.

“우진. 이 제이든 님이 디자인한 모델을 봐.”

“오, 멋지네.”

“리액션이 좀 불만스럽긴 하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특별히 넘어가 주도록 하지.”

“뭐라는 거야, 멋있다니까.”

“아직 이상한 아이콘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우진의 작업물과는, 차원이 다른 멋짐이지?”

“그래. 그러니까 작업 다 끝났으면 방해하지 말고 집에 가도록 해.”

“Holy shit! 여기 우리 집이라고!”

“흠, 그럼 네 방으로 가.”

“여기 내 방이야!”

“아무튼 어디론가 가 있어 봐. 난 지금 아주 바쁘니까.”

제이든이 완성한 유기적 모델링의 주제는 바로 생명력이었다.

‘Vitality’라는 단어가 갖는 추상적인 느낌 그 자체를, 역동적인 형태를 통하여 3D 모델링으로 표현해낸 것.

사방으로 꿈틀대며 뻗어 나가는 제이든의 3D모델링은 주제와 아주 잘 어울리는 형태를 가진 것이었으며, 이것은 우진이 보기에도 꽤 훌륭한 과제물이었다.

멋지다는 감탄이, 결코 빈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멋있다고 했으면 됐지, 뭘 어쩌라는 거야?’

툴툴거리며 야식을 먹으러 나가는 제이든을 보며,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이든의 작업물도 확실히 멋지긴 했지만, 우진의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우진은 지금 꽤 오랜만에, 시간 가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모델링 작업에 심취해 있었으니 말이다.

석현의 도움을 통해 하나하나 기능을 익히기 시작한 그래스하퍼는, 작업방식 자체가 너무도 우진의 취향이었다.

“파동의 모양은 결국, 파장의 길이와 진폭에 의해 결정되잖아?”

“그렇지.”

“파동이 발원 지점에서 멀어질수록 진폭은 점점 더 줄어들 거고.”

“맞아.”

“그것부터 우선 알고리즘으로 만들어보자.”

우진은 회귀 이전부터, 어떤 현상에 대해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좋아했다.

때문에 어떤 규칙성이 담긴 알고리즘을 직접 설계해서 자신이 설계한 그대로 만들어지는 모델링 방식은, 완전히 그의 취향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한 번 만들어둔 알고리즘은, 다른 디자인에도 응용해서 계속 사용할 수 있는 거잖아?’

같은 알고리즘이라 해도 어떤 Input 값이 들어가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형태의 결과물이 도출되기도 한다.

또 만들어둔 알고리즘을 응용해서 조금씩 변형된 형태로 만들어낼 수도 있었으니.

처음 뼈대를 만드는 작업만 어려울 뿐, 만들어둔 뼈대를 이리저리 변형하면서 다양한 결과물을 뽑아내는 것은 그래스하퍼의 모델링 방식이 더 효율적이었다.

“자, 여기서 그럼 이렇게 연결하면…….”

동심원 모양의 파동 알고리즘을 하나 완성해 낸 우진이, 그것을 그대로 다른 좌표에 하나 더 복사했다.

그러자 같은 형태의 파동이 그대로 하나 더 만들어졌고…….

“오……! 대박!”

두 개의 파동 좌표를 조금 가깝게 가져가자, 파동이 만나는 지점에서 우진이 원했던 느낌의 패턴이 그대로 그려졌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말이다.

“와, 이게 진짜로 되네?”

두 눈이 휘둥그레진 우진을 보며, 석현이 흐뭇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게. 나도 파동 알고리즘은 처음 짜본 건데, 그대로 되니까 신기하긴 하다.”

생각대로 모델링이 만들어지는 것을 확인한 우진은, 더욱 신이 나서 이것저것 기능을 찾기 시작했다.

어떤 동기부여가 없을 때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어렵게 느껴졌던 프로그램이, 한번 흥미가 붙기 시작하자 어느새 재미있는 장난감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욱 흥미가 생긴 것은 석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원래도 이 비주얼 스크립트 방식의 모델링에 꽤 재미를 붙이고 있던 그였는데, 함께 연구할 사람이 생기자 더 재밌어진 것이다.

제이든도 최근 열정 넘치게 모델링 툴을 공부하고 있었지만, 비주얼 스크립트 쪽은 잘 건들지 않았던 것.

그래서 둘은 제이든의 작업실에서, 거의 동이 틀 때까지 계속해서 프로그램을 만지작거렸다.

잘 모르는 기능을 발견하면 해외 사이트에 접속해서 영어 원서로 된 설명까지 찾아보면서, 열정적으로 그래스하퍼를 공부한 것이다.

하여 그 결과.

우진은 결국, 만족스런 작업물을 완성해낼 수 있었다.

“야, 이거 괜찮은데?”

“그렇지?”

“다음에 우리 회사에서 인테리어 시공할 일 있을 때, 아트 월 패턴으로 가져다 써도 되겠어.”

석현의 말에, 우진이 기분 좋게 웃으며 대꾸하였다.

“모델링이랑 시공은 또 다른 영역이다 친구. 이걸 대체 어떻게 손으로 빚을 건데?”

“하긴, 그것도 그러네.”

“무튼 고마워 석구. 덕분에 벼락치기 성공했네.”

“고마우면……. 알지? 대표님?”

“뭐 인마.”

“믿습니다!”

“법인차?”

“두 번 말하면 입 아프지.”

“그건…… 생각 좀 해 볼게.”

석현과 잠깐 농담을(석현은 농담이 아니었다.) 주고받은 우진은, 모델링 파일을 컨버트(convert)하여 3DS 파일로 만들었다.

그리고 석현을 먼저 집으로 보낸 뒤, 홀로 과제를 마무리하기 위한 작업을 좀 더 했다.

만들어진 3D파일을 랜더링 전용 프로그램으로 옮겨서, 재질을 입히고 좀 더 그럴싸하게 꾸민 것이다.

그래서 완전히 해가 떴을 때가 돼서야 우진은 비로소 과제를 끝마칠 수 있었다.

“야, 일어나 제이든.”

“What? 우진,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거야?”

“일어난 적 없어.”

“……? 설마 밤을 샌 거야?”

“나 지금 학교로 갈 건데, 내 차 타고 같이 갈래? 아니면 있다가 지하철 타고 올래?”

“Holy! 당연히 날 태우고 가야지! 무슨 소리야!”

“그럼 빨리 씻어.”

“석현은?”

“석구는 새벽에 집으로 갔어.”

“악덕 사장에게 노동력을 착취당했군.”

“헛소리하면 버리고 간다?”

“젠장! 정 없는 코리안!”

제이든이 준비하는 동안 소파에서 잠시 눈을 붙인 우진은, 곧장 차를 운전해서 학교로 향했다.

몸은 무척이나 피곤했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또랑또랑했다.

오늘 석현과 함께 그래스하퍼를 이용한 모델링 작업을 해 보면서, 그가 과거 동경했던 디지털 건축을 일부 엿본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교수님께선 뭐라고 하시려나.’

USB안에 들어있는 작업물을 한 번 더 떠올린 우진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어제 오후까지만 해도 걱정됐던 디공디의 중간과제 프레젠테이션이, 이제는 기대되기 시작하는 우진이었다.

* * *

일전에도 언급했던 적이 있지만, 디공디 수업은 타과 학생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던 수업이었다.

K대의 공간디자인과가 아니라면 배울 수 없는 다양한 3D툴의 응용 디자인에 대한 수업이었으니 말이다.

특히 공간디자인과 이상으로 3D툴을 다양하게 다루는 산업디자인과 학생들의 경우.

아무리 과제량이 많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고 하더라도 이 수업을 듣고 싶어 하는 학생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K대 산업디자인과의 4학년인 강세정은, 그런 학생들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졸업반이 된 이후 제품 모델링 쪽으로 졸업 전시 방향을 잡은 상황이었는데, 다른 학생들이 보여주지 못하는 특별한 모델링 퍼포먼스를 만들어내고 싶어서 이 수업을 수강한 것이었다.

사실 알리아스나 라이노와 같은 프로그램의 기본적인 숙련도는, 산업디자인과 고학년인 그녀가 압도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었다.

디지털 건축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전인 2011년도에는, 유기적인 모델링이 가장 많이 쓰이는 분야가 제품디자인과 자동차 디자인이었으니까.

그래서 세정은 이 수업을 수강하면서, 자신이 다른 학생들에게 밀릴 것이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응용난이도가 높은 모델링 기술들을 배운다고 한들, 기본 출발점이 다른 그녀가 훨씬 더 유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학점을 평가하는 첫 번째 과제인 중간과제를 하면서도, 그 생각은 변한 적이 없었다.

밤새 열정적으로 작업하여 만들어낸 과제물은, 졸업반인 그녀가 보기에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정도의 퀄리티였으니까.

그래서 가장 앞 순번임에도 불구하고 자신 있게 발표를 마친 세정은, 조운찬 교수의 평가를 들으면서 그 생각에 더욱 확신을 가졌다.

평소 칭찬을 잘 하지 않는 운찬이,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그녀의 발표를 칭찬한 것이다.

“역시 졸업반이라 그런지……. 모델링 퀄리티가 남다르네요, 세정 양.”

“감사합니다, 교수님!”

“곡면의 이음새가 깨지는 부분도 없고……. 비대칭 유기체임에도 불구하고 균형감도 있고……. 좋습니다. 아주 훌륭해요.”

하여 자리로 돌아온 세정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다른 학생들의 발표를 듣기 시작했다.

속으로는 조금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4학년 졸업반인 그녀가, 2학년 수업에 난입(?)하여 밸런스를 파괴해 버린 셈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뭐……. 2학년 때는 이 수업을 들을 여유가 없었으니까.’

그녀와 함께 수강 신청한 같은 과, 같은 학년의 학생도 한 명 더 있었지만, 세정의 경쟁상대는 아니었다.

산업디자인과 내에서도 세정의 모델링 실력은, 최상위권에 속했었다.

물론 평범한 2, 3학년 학생들의 작품보다야 나았지만, 세정이 작업물에 비하면 확실히 퀄리티가 떨어졌던 것.

하지만 그렇게 여유로운 표정으로 다른 학생들을 발표를 감상 중이던 세정은, 웬 외국인이 나와서 발표를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당황하게 되었다.

‘저 멀대는 뭐지?’

서구적인 외모와 다르게 유창한 한국말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작업물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을 만큼 완성도 높은 모델링을 들고 나타났으니 말이다.

“유기적인 곡선들이 뻗어 나가는 형태는, 생명력과 활력을 표현하기 아주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법이구나, 제이든.”

“제이든은 항상 대단하죠.”

우쭐거리는 표정과 요상한 화법과는 다르게, 세정이 보기에도 감탄스러운 노력과 실력이 담긴 제이든의 모델링.

‘쟨 몇 학년이지……? 공간디자인과 졸업반인가? 군대를 안 가서 그런지, 엄청 어려보이네?’

하지만 그로부터 두 차례 정도가 지나간 뒤.

다시 별생각 없이 발표를 지켜보던 세정은, 이번엔 놀람을 넘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K대의 유명인사이기 때문에 그녀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인물인 우진.

그가 중간과제로 들고 온 작품이, 제이든의 것보다도 훨씬 더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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