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61화 (161/315)

161화

Parametric Design

사실 오늘 우진은, 원래 제이든의 집에 갈 생각이 없었다.

과제를 하겠답시고 석현과 함께 제이든의 집에 갔다가, 밤새 둘이 게임하는 것만 구경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제이든은 우진의 그 추측을 강력하게 부인했고…….

[Bloody Hell! 이 제이든을 대체 뭐로 보는 거야?]

“겜덕후.”

[결코 그렇지 않아. 제이든 님은 벌써 게임에 접속하지 않은 지 한 달도 넘었다고.]

“그 거짓말……. 진짜야?”

[물론. 그러니까 당장 오도록 해 우진.]

그렇게 오랜만에 제이든의 집에 도착한 우진은, 꽤 신선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원래 같았으면 우진이 도착하자마자 일단 치킨을 주문한 뒤.

조이패드를 쥐여주며 치킨값 내기 축구게임부터 한 판 하자고 했어야 하는 제이든이었건만.

어쩐 일인지 그런 절차 없이 곧바로 과제를 시작한 것이다.

용도가 거의 PC방이나 다름없던 컴퓨터 방은, 제이든의 작업실로 완벽히 다시 태어나 있었고.

항상 게임 대기화면이 떠올라있던 여러 대의 모니터에는, 죄다 3D 모델링 프로그램이 켜져 있었다.

예전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던 광경이었다.

“제이든,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What?! 난 아주 멀쩡해 우진.”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사실 배가 조금 아프긴 한데, 이게 아마 죽을병은 아닐 거야.”

“…….”

게임 대신 3D프로그램을 두들기고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여전히 제이든의 텐션은 높았다.

그래도 우진으로선, 쉽게 적응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야, 석현아.”

“응?”

“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뭐가?”

“저렇게 열정적으로 과제 하는 거, 공모전 때 이후로 처음 봐서 그래.”

석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요 몇 달간은 계속 저랬어.”

“그래?”

“수업 때는 어땠는데?”

“디공디 수업?”

“응. 3D모델링 수업.”

“수업 때는 비슷했는데……. 후다닥 작업해놓고 나한테 자랑하면서 우쭐거리고…….”

“그래?”

“그러고 보니, 제이든 모델링 실력이 너무 좋아진 것 같아서 좀 의아하긴 했어.”

“크크.”

“뒤에서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었던 건가?”

“아마도……?”

열심히 마우스를 딸깍거리던 와중에도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건지, 제이든이 대화에 툭 하고 끼어들었다.

“제이든은 뒤에서 딱히 열심히 한 적 없지.”

“뭐?”

“원래 제이든 님의 재능이 대단했을 뿐이야.”

“…….”

“평범한 우진은 아마도 비범한 제이든을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후후.”

어쩐지 오늘따라 더욱 신나 보이는 제이든은, 우진을 향해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컴퓨터에 빨려 들어갈 듯 작업을 계속했다.

그리고 조용해진 제이든 덕분에, 우진은 석현과 함께 과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이번 중간 과제가, 라이노를 이용해서 유기적인 건축조형물을 디자인하는 거였지?”

석현의 말을 들은 우진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야? 너 숨겨진 수강생이냐?”

“응?”

“내가 말해준 적도 없는데 우리 과제를 어떻게 그렇게 구체적으로 잘 알아?”

석현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어쩌면 비슷할지도 몰라.”

“뭐?”

석현이 제이든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디공디 수업만 듣고 나면, 쟤가 항상 날 집으로 불렀거든.”

“……?”

“오늘 배운 게 잘 안된다고 도와달라면서 말이지.”

조용히 과제에 몰입해 있는 줄 알았던 제이든이 또다시 불쑥 끼어들었다.

“Holy! 무슨 소리야 석현! 제이든은 모든 걸 혼자서 공부했다고!”

물론 제이든의 그 대꾸는, 완벽히 무시당했지만 말이다.

“뭐,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알겠지?”

어깨를 으쓱하는 석현을 보며, 우진은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크크, 귀여운 녀석이라니까.”

“Bloody Hell!”

제이든의 흥분한 목소리로 인해 잠시 시끄러워졌던 컴퓨터방에, 곧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는 것보다 과제가 더 중요했는지, 제이든이 다시 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조용해진 사이 우진은 옐로페이퍼를 쭉 찢어서, 생각했던 아이디어 스케치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석현에게 조언을 구하고 도움을 얻기 위해선, 일단 어떤 디자인을 하고 싶은 건지 공유할 필요가 있었으니 말이다.

“석구. 내가 그린 게 뭐인 것 같아?”

“음……?”

우진이 그린 그림을 내어놓자, 석현은 고개를 갸웃하였다.

아이디어 스케치인 탓에 그림이 러프(Rough)하기도 했고.

애초에 주제가 유기적 형태이다 보니, 명확한 형체를 알아보는 게 쉽지 않았던 탓이다.

그에 우진이 한 마디를 덧붙였고.

“그냥 느낌만 말해봐, 느낌만.”

석현은 그의 말 그대로, 떠오르는 이미지를 툭 얘기하였다.

“이거 약간 파동 같은데?”

“그치?”

“물 위에 물방울을 떨어뜨린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느낌으로 그린 것 맞아?”

석현의 말에 우진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한 대로 우진이 그린 아이디어 스케치는, 물결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이었으니 말이다.

“물에 어떤 힘이 가해지면, 그 힘이 가해진 지점을 기점으로 파동이 생겨나잖아?”

“그렇지?”

“근데 이 파동이 여러 종류가 섞이면, 불규칙하면서도 규칙성이 보이는 특별한 모양이 만들어지더라고.”

우진의 말에, 석현은 더욱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다.

유기적 모델링을 위해 떠올리는 일반적인 모티브들보다는, 확실히 특별한 관점에서의 접근이었으니 말이다.

“파동이 섞인다는 게, 제각각 다른 위치에서 다른 종류의 힘에 의해 생긴 파동이 하나의 매개체를 통해 뒤섞이는 걸 의미하는 거지?”

다분히 이과스러운 석현의 반문에, 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쉽게 말해서, 잔잔한 물 위에 돌을 세 개 떨어뜨리는 거야.”

“계속 말해봐.”

“각각 다른 위치에 다른 크기의 돌을 떨어뜨리면, 그 위치들을 기점으로 파동이 퍼져 나갈 테고…….”

우진은 옐로페이퍼 위에 둥근 선들을 그려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 경계들이 만나는 지점이 되면, 특별한 패턴이 물 위에 만들어진다는 거지.”

석현이 간결하게 대꾸했다.

“같은 말이야.”

“뭐가?”

“내가 했던 말이 그 말이라고.”

“아무튼!”

이제 우진이 하고자 하는 유기적 모델링이 뭔지 대략 깨달은 석현이, 씨익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너는 이 물의 파동들이 섞이면서 생기는 패턴을 모티브로 해서, 유기적인 모델링을 작업해보고 싶다는 거잖아?”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지.”

힘주어 대답한 우진은, 은근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진짜 멋진 그림이 만들어질 것 같은데…….”

말을 하며 자신감이 떨어지는지, 조금씩 작아지는 우진의 목소리.

“이거, 모델링 솔루션이 있을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석현은,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 가능은 할 것 같아.”

“오……? 그래?”

“대신 라이노만으론 힘들 것 같고, 그래스하퍼를 써야할 것 같네.”

가능할 것 같다는 말에 반색했던 우진의 표정은, 그래스하퍼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 * *

사실 우진이 처음 파동에서 모티브를 가져오며 떠올렸던 모델링 방식은,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것이었다.

일반적인 모형을 모델링 하듯, 파동의 모양을 구성하기 위한 뼈대를 일일이 다 그릴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물결이 퍼지는 것처럼 원형으로 점점 커지는 선을 그린 다음에……. 그것의 높낮이를 조절해서 면으로 이으면 물결 모양으로 유기적인 모델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 방식도 결코 불가능한 모델링 솔루션은 아니었다.

한 땀 한 땀 작업을 위한 극한의 노동력이 필요할 뿐, 불가능할 이유는 없었으니 말이다.

다만 이 방식대로 모델링을 한다면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서로 다른 파동이 만나며 영향을 주는 구간을 표현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수면 위에서 수많은 파동들이 섞여 있는 그 모습을 아날로그로 표현하려면, 노가다의 영역을 넘어선 극한의 작업량이 필요할 터였다.

그래서 우진이 석현에게 기대한 것은, 그가 모르는 라이노의 기능에 대한 석현의 지식이었다.

이런 종류의 모델링을 편히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기능이 있지는 않을지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석현은 라이노의 기능을 넘어선 그래스하퍼라는 새로운 플러그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고.

그것이 우진의 표정이 굳은 이유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스하퍼는 디공디 수업에서도, 지난주에야 처음 배워본 프로그램이었으니 말이다.

‘배웠다고 하기도 애매하지. 그냥 프로그램을 켜 봤을 뿐이니까.’

게다가 그래스하퍼는, 모델링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우진에게도 눈이 핑 돌아갈 정도로 어려운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었다.

라이노나 맥스처럼 직관적으로 점을 찍고 선을 이어 매스로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수식과 수치를 활용한 알고리즘을 짜서 그것으로 모델링을 만드는 방식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진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고, 그런 그를 보며 석현은 피식 웃었다.

“야, 그렇게까지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어려운 게 팩트잖아.”

“기본 개념만 알면, 오히려 더 쉬울 수도 있어.”

“기본 개념?”

고개를 갸웃하는 우진을 향해, 석현이 설명을 시작하였다.

“너 라이노에서 점을 찍을 때, 찍고 싶은 위치를 마우스로 클릭하지?”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석현은 라이노와 그래스하퍼를 컴퓨터에 세팅하면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스하퍼에서도 마찬가지야. 점을 찍고 싶은 위치를 설정해주면 그 자리에 점이 찍히거든.”

우진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자, 석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모델링 프로그램에서 마우스 클릭으로 찍었던 그 위치를, 좌표값으로 써 넣어주면 똑같이 찍힌다는 얘기야.”

석현이 설명하는 사이 어느새 프로그램은 전부 다 켜졌고, 능숙하게 그래스하퍼를 오픈한 석현은 바둑판처럼 생긴 아이콘을 끌어다가 화면에 올려놓았다.

이어서 x, y, z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아이콘의 좌측 부분에, 각각 0이라는 숫자를 써넣었다.

그러자 다음 순간.

“오……?”

그래스하퍼와 연결된 라이노의 화면 위에, 점 하나가 생성되었다.

“x, y, z축의 좌표가 전부 다 0인 위치에, 점이 하나 생성된 거야.”

“그러네.”

“이번엔 이런 식으로 점을 하나 더 만들어서…….”

석현은 같은 과정으로 10, 10, 0의 좌표에 점을 하나 더 만들었고.

이번에는 Line라는 글씨가 써 있는 아이콘을 끌어다가 기존의 두 개의 아이콘을 이어 넣었다.

그러자 라이노의 화면 안에 찍힌 두 개의 점이, 어느새 하나의 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와……! 이거 재밌는데?”

석현이 작업하는 것을 지켜보던 우진은 흥미진진한 표정이 되었고, 그 표정을 본 석현은 뿌듯한 얼굴로 다시 설명을 시작하였다.

“점을 하나 찍는 것만 봤을 땐 마우스 클릭보다 훨씬 더 번거로워 보이지만……. 네가 만들려고 하는 그 파동 모형의 모델링을 작업할 때는 그래스하퍼만큼 편한 툴도 없을 거야.”

우진이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어째서?”

석현이 씨익 웃으며 대답하였다.

“파동이 물리적으로 생겨나는 공식을 알고리즘에 대입하면, 그 규칙성에 따라서 그래스하퍼가 자동으로 세그먼트(Segment)를 뿌려 줄 거거든.”

“……!”

“여러 가지 파동이 섞이는 것도 문제없어. 알고리즘만 정확하게 만들면, 파동을 100개 섞어놔도 자연스럽게 모형이 만들어질 테니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모델링 방식에 대한 설명에, 우진의 두 눈은 점점 더 확대되고 있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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