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57화 (157/315)

157화

인과응보

우진과 조합장이 계획한 대로, 조합은 1심에서 패소했다.

그 소식은 순식간에 모든 조합원에게 퍼져 나갔고, 모두들 난리가 났다.

“하, 조합장님. 전화기에 불나겠습니다.”

“허허. 어쩌겠습니까. 조금만 참아 주세요.”

“그냥 조합원님들에게 다 오픈하면 안 됩니까?”

“아직 안됩니다. 딱 일 주일만 기다려 주시지요 다들.”

그나마 조합원들의 불안감이 극한까지 치닫지 않은 것은, 조합장이 미리 1심에서는 패소할 수도 있다고 귀띔을 해뒀기 때문이었다.

증거를 확보 중인데, 그게 1심 일정까지는 어려울 수도 있다.

2심 때는 무조건 승소할 거니까, 기다려 달라.

이런 식으로 몇몇 친한 조합원들에게 슬쩍 흘려뒀던 것이다.

어차피 비대위 측 인사들은 조합에서 시간을 끌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밖에 생각하지 않았으니, 아주 영리하고 효과적인 전략이었던 것.

아마 이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일반조합원들의 매물도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을 것이었다.

‘이제 딱 이 주일만 버티면 돼.’

조합사무실 베란다에 나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곽홍식은, 지난 3월의 일들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처음 우진과 함께 계획했던 일들이, 이렇게까지 착착 맞아떨어질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단순히 소송 전에 고가에 아파트를 처분하려는 비대위 측 인사들이 꼴보기 싫어 시작했던 작전이, 우진 덕에 규모가 아주 거하게 커져버린 것.

‘고놈, 진짜 난 놈은 난 놈이라니까.’

한결 기분이 좋아진 홍식의 머릿속에, 앞으로의 계획이 차근차근 떠올랐다.

‘이제 남은 물건이 총 네 개였지?’

우진이 9.1억에 33평형 거래를 성사시킨 이후.

부동산에 10억에 올라와 있던 매물들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일단 첫 거래가 터지자, 버티고 버티던 비대위원들이 경쟁적으로 자신의 물건을 팔아치운 것이다.

9억 대에 팔린 물건도 없었다.

우진이 처음 계획했던 대로, 8억 후반 정도에 순식간에 물건 여덟 개가 거래되어버린 것.

물론 그것들을 매집한 사람은 우진과 조합장. 그리고 천웅건설이었다.

그리고 그저께 1심 패소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8억 중반대에 매물 다섯 개가 추가로 거래되었다.

그래서 이제 남아있는 비대위의 물건은 총 네 채.

조합장 곽홍식은 입맛을 다셨다.

절대로 8억 대에는 팔 수 없다며 버티고 있는 네 명의 비대위원들이 떠오른 것이다.

‘다음 주에 최소 두 채 이상 매수해야 하는데…….’

그들의 물건을 어떻게든 2심이 시작되기 전에 매수해야 한다.

2심에서 또다시 패소하여 시간을 한 번 더 끄는 것은, 조합 차원에서도 리스크가 제법 있는 일이었으니까.

‘팔긴 무조건 팔 거란 말이지. 그걸 어떤 가격에 사느냐가 관건인 거고…….’

남은 네 개의 물건들은, 조합의 몫이 하나, 천웅이 둘. 그리고 우진의 몫이 또 하나였다.

그 중에서도 자신의 몫 하나만큼은, 최대한 싸게 매수하고 싶은 홍식이었다.

‘부동산에 약을 쳐놨으니, 슬슬 입질이 올 때가 되었는데…….’

까끌까끌한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던 홍식은, 책상 위에 얹혀 있던 자신의 휴대폰을 슬쩍 응시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위이잉-!

홍식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선영부동산 임○○대표]

* * *

“자, 됐어, 누나.”

“좋았어. 덕분에 별 경험을 다 해보네. 내가 재건축 투자도 해보고 말이야.”

오늘 우진은, 마지막 매수를 끝마쳤다.

마지막 거래이자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마무리된 오늘의 거래.

매수가격은 무려 8억 3천만 원이었고, 그 행운의 주인공은 바로 수하였다.

우진이 처음 후려쳐 거래했던 9.1억보다도, 8천만 원이나 더 싼 값에 거래가 성사된 것이다.

“그럼 이제 절차가 어떻게 되는 거야?”

“잔금 날짜가 다음 주잖아?”

“응, 맞아.”

“그때 잔금 다 입금하면 법무사님이 등기 해주실 거야.”

“그러면?”

“그러면 이제 그 집, 누나 꺼 되는 거지 뭐.”

“오예.”

“4월 13일로 2심 날짜 잡혔으니까, 팔 거면 그 이후에 팔면 될 거야.”

우진은 오랜만에 수하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있었다.

우진의 도움을 받아 이렇게 아무나 할 수 없는 투자도 하게 되었으니.

저녁은 그녀가 한 끼 대접하기로 한 것이다.

“그럼 우진아.”

“응?”

“팔 땐 얼마에 팔아?”

“음……. 3개월 내로 팔 거면 13억 정도.”

“그, 그렇게나 비싸게?”

“사실 13억에 팔기 아까워. 나 같으면 그냥 완공될 때까지 들고 갈 거야.”

“그럼 얼마 되는데?”

“최소 17억.”

“헐……?”

“한 십 년 뒤에는 거의 30억도 가능할걸?”

“야, 그건 좀 오바잖아.”

우진이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운전하다 말고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수하.

하지만 우진은 전혀 농담이 아니었다.

그가 전생에서 경험했던 2020년, 우진이 아니었다면 원래 청담 선영 자리에 지어졌을 아르티아는, 34평형 28억이라는 실거래가를 찍었었으니 말이다.

‘내 회귀가 미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대세가 바뀌지는 않을 테지.’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해줄 수는 없었으니, 우진은 멋쩍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싱겁기는.”

우진이 말을 돌렸다.

“자, 그럼 여기서 퀴즈.”

“갑자기 그건 또 웬 뜬금없는 소리?”

“13억에 매도했을 때, 임수하 씨가 벌게 될 돈은 얼마일까요?”

“야. 누나를 바보로 아냐?”

“그래서 얼만데.”

“그, 그러니까……. 잠시만.”

수하는 인상을 찡그리며 열심히 머릿속으로 계산을 시작했고.

그녀를 놀리는 것이 꽤 재밌었는지, 우진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걸 그렇게 오래 계산해야 해?”

“조용히 좀 해 봐! 운전하는 데 방해되잖아!”

그리고 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사이, 수하의 차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끼익-

수하의 차가 멈춘 곳은, 한눈에 보아도 비싸 보이는 한남동의 스시집.

대충 인당 이십만 원 정도는 가볍게 식대로 나올법한 매장에 수하가 차를 대자, 우진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누나, 너무 비싼 데 온 거 아냐?”

“괜찮아. 네 덕에 수억 벌게 생겼는데, 이 정도쯤이야.”

농담과 진담이 반쯤 섞인 수하의 대답에, 우진이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하, 갑자기 책임감이 팍 올라오네.”

“믿는다, 서우진. 부담은 많이 가질수록 좋아.”

“아, 이 누나가 왜 이런대. 이러다 비싼 밥 먹고 체하겠네.”

“낄낄, 여기 샤리(しゃり)*[舍利(사리) 초밥에 사용되는 밥]가 진짜 일품이야. 꼬득꼬득한 게 진짜 맛있다니까?”

“말 돌리기는…….”

소연이 소고기 매니아라면, 수하는 예전부터 일식 매니아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초밥을 가장 좋아했는데, 그녀가 소개해주는 초밥집은 대부분 맛있었던지라 우진은 꽤나 기대하며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배우님.”

“안녕하세요, 셰프님!”

“요즘 뜸하시더니, 오랜만에 오셨네요.”

“최근에 좀 바빴네요, 하하.”

수하는 단골손님이었는지, 주방에 서 있던 셰프와도 반갑게 인사하였다.

해서 인사를 마치고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은, 미리 세팅되어 있던 에피타이저를 한 입씩 집어 먹으며 다시 대화를 시작하였다.

우진은 문득, 수하에게 궁금했던 부분이 하나 생각났다.

“그나저나 누나.”

“응?”

“이번에 소속사 옮겼다며?”

“어떻게 알았어?”

“재엽이 형이 말해줬어.”

“아하.”

“그, KSJ엔터로 옮겼다면서?”

수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매니저 오빠랑 같이 옮겼어. 기존 회사 계약조건이 너무 안 좋았거든.”

우진이 수하의 소속사 이전에 대해 물어본 이유는, 이것이 그가 알던 미래와 다르기 때문이었다.

우진의 전생에서도 수하는 한남동 로맨스를 찍기 전에 소속사를 한 번 옮기긴 한다.

하지만 그곳이 KSJ엔터는 아니었다.

국민배우 임수하는 원래 데이지엔터라는 곳에서 거의 평생 동안 배우생활을 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분명 우진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석중의 여동생이자 KSJ엔터의 대표인 강소정.

그녀가 임수하와 인연이 생긴 것이, 바로 유리아가 열었던 연말 파티 때문이었으니까.

애초에 우진이 아니었더라면 유리아가 석중과 인연이 생길 리도 없었을 테고.

그랬다면 강소정이 석중과 함께 파티에 올 일도 없었을 터였다.

때문에 우진은, 기분이 복잡했다.

‘이게 수하 누나에게 더 나은 선택이었어야 할 텐데…….’

원래대로 데이지엔터에 갔으면 변수 없이 국내 최정상급 배우가 됐을 수하의 미래가, 어쨌든 조금 바뀐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우진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수하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을 우진에게 꺼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네가 소속사 얘기 꺼내서 생각난 건데.”

“응?”

“소정이. 아니, 우리 대표님이, 널 좀 많이 보고 싶어 하시더라고.”

“나……? 나를?”

수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다니까. 관심이 아주 많으시던데?”

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연예기획사 대표가 건축 쟁이인 자신을, 왜 보고 싶어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뭐, 어디 사옥이라도 새로 지으려고 하시나?”

수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걸. 우리 이번에 사옥 새로 매입해서 들어가기로 했거든.”

“흠. 그래? 그럼 왜지?”

우진은 머리를 좀 굴려봤지만,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실력파 배우들을 위주로 영입하는 KSJ에서, 단순히 예능에 한 번 출연했을 뿐인 우진에게 관심 가질 이유가 잘 떠오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뭐, 나중에 만나보면 알겠지.’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음식은 금방 나왔다.

수하가 얘기했던 대로 초밥은 정말 맛있었고, 덕분에 우진은 즐겁게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럼 다음에 리아랑 같이 봐.”

“잘 먹었어, 누나.”

“별말씀을.”

그렇게 맛있는 밥까지 얻어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진은 기분이 무척 좋았다.

맛있는 밥도, 임수하라는 좋은 사람도.

그리고 오늘. 지난 한 달 동안 공들인 일의 마침표를 찍은 것까지도 말이다.

오늘 수하가 했던 이 거래를 마지막으로,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2심까지는 5일 정도 남은 건가……?’

우진은 소송 날, 법정에 들어가 참관해볼 생각이었다.

이제 우진은 누구보다 선영아파트에 지분이 큰 조합원이었으니, 그럴 만한 자격도 충분히 있었다.

‘다음 주가 기대되는데?’

조합장 홍식이 이날만을 위해 준비해 둔, 평형 신청 현장에서의 녹취 파일.

그것을 들은 비대위원들이 어떤 표정이 될지, 그것이 몹시 궁금한 우진이었다.

* * *

4월 13일, 수요일이 되었다.

변수는 없었고 모든 것은 계획대로였지만, 막상 소송 당일이 되자 우진은 조금 긴장되었다.

아무리 확실한 배팅이라 해도, 들어간 금액이 워낙 컸으니.

완전히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압박감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 소송 결과로, 내 수중에 수십억이 왔다 갔다 할 테니까.’

그래서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우진은, 다른 일정은 잡지 않고 시간에 맞춰 법정으로 향했다.

오늘 재판은 2심인 만큼 고등법원에서 진행되는 것이었고, 서울 고등법원은 서초구에 있었다.

참관석 한쪽에 앉아 재판장을 내려다보자, 멀찍이 앉아있는 배심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잠시 후, 피고와 원고를 비롯한 모든 인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피고의 대표 자리에는 당연히 조합장 곽홍식이 앉아있었고, 그 반대편 원고의 자리에는 꼬장꼬장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저 사람이 비대위원장인가 보네.’

비대위원장과 그 뒤편의 비대위원들을 확인한 우진은, 실소를 머금었다.

한눈에 봐도 그들에게는 일말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마도 이 소송 자체를, 이미 이긴 재판이라고 생각하는 것일 터.

우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비대위원장 권순현이 홍식을 향해 입을 열었다.

“대체 항소는 왜 하신 겁니까?”

지금 이 자리에 소환되었다는 것 자체가 못마땅하다는 듯, 홍식을 향해 이죽거리는 순현.

그런 그를 향해, 홍식은 허허 웃어 보일 뿐이었다.

“항소를 왜 하긴, 왜 했겠나. 당연히 이 소송에서 이기려고 한 게지.”

“소송이 길어지면, 조합원들 손해만 더 커질 겁니다.”

“그래?”

“저희 변호사 비용부터 정신적 피해보상까지, 한 톨도 빠짐없이 전부 청구할 생각이니까요.”

홍식의 표정이 너무 덤덤해서인지, 순현은 더욱 약이 오른 듯 보였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도발에, 이리저리 휘둘릴 홍식이 아니었다.

“허허, 마음대로 하시게나.”

“……!”

“반대로 소송에서 졌을 땐 어떻게 될지도, 한 번쯤은 고민해 보시고 말이야. 허허.”

순현은 벌떡 일어나며 뭐라 말하려 했지만, 법원 관계자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이제 재판이 시작되었기도 했거니와, 법원에서 이런 개인적인 분쟁은 용납되지 않으니 말이다.

“후우…….”

그래서 크게 심호흡을 하며 자리에 앉은 순현은, 그저 홍식을 노려보며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순현은 예전부터 홍식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애초에 조합장인 홍식이 상가조합의 요구를 들어주기만 했더라도, 이렇게 긴 싸움은 할 필요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그것이 실제로 합리적인 요구였는지와 같은 이성적인 기억은, 순현을 비롯한 비대위원들의 머릿속에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것들 위주로 기억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오늘 순현은.

이 길고 힘들었던 싸움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원고의 주장에 따르면, 청담 선영아파트의 일부 평형 타입 신청 과정에서, 특정 조합원 몇몇이 부당이득을 취했다고 하였습니다.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처음 시작은 1심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수월하게 진행됐지만…….

“45평형과 34평형을 받을 수 있는 원 플러스 원 평형 배정을, 기존 40평대 보유 조합원은 받을 수 없다고 공시하였는데……. 그들 중 일부만 타 조합원들의 사전동의 없이 해당 평형을 배정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또한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에 대한 증거로, 조합원 안내 책자와 현시점 평형 배정 현황표를 제출합니다.”

돌연 피고 측 변호사가 불쑥 일어서더니, USB 파일을 하나 들고나온 것이다.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처음 이의제기가 되었을 때만 해도, 순현은 별 것 아니리라 생각하였다.

사실 조합의 입장에서는, 최후의 순간까지 뭐라도 꼬투리를 잡아 발악하고 싶을 게 당연하다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USB 안의 음성파일이 재판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 순간.

“……!”

장내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가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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