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협상을 할 때에는
윤 씨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일단 나라도 살아야지.’
사실 지난 두 달 동안.
윤 씨는 똥줄이 타서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아파트 매물을 가진 비대위원들끼리 서로 약속한 것이 있었으니 10억 밑으로 물건을 내어놓지 않았는데.
정말 그 2주 동안, 매수하겠다고 간 보는 사람조차 단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심지어 부동산 한두 곳에 내놓은 것도 아니다.
전속 부동산을 두면 복비를 싸게 딜해 볼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은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소송이 끝나기 전에 팔아야 한다는 것.
때문에 청담 선영의 매물을 취급하는 모든 부동산에 매물을 전부 올려놨지만, 이주 간 정말 전화 한 통조차 오지 않았다.
그래서 윤 씨는, 약속한 불문율을 깨고 9억 중반까지 가격을 낮췄다.
그 뒤에 이렇게 계약이 성사됐고 말이다.
곧 소송에서 패소하게 될 조합원 입주권을 누군가에게 속여 판다는 게 조금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어린 친구한테 미안하긴 하지만……. 저 나이에 이 정도 돈이 있으려면 연예인이거나 금수저겠지 뭐. 내 알 바냐.’
오늘 아침까지도 혹시 매수자가 변심할까 봐, 노심초사 가슴을 졸였던 윤 씨.
그는 계약서에 도장을 완전히 찍기 전까지는, 입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 계속 유지될 것이다.
만약 오늘 계약을 성사만 시킬 수 있다면,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갈 것만 같았다.
“자, 계약서는 다 확인하셨죠?”
“네. 거의 다 읽었습니다.”
“젊은 친구가 꼼꼼히 보시네, 그려.”
“큰돈이 오가는 일인데, 정확하게 봐야죠.”
“부동산 계약서가 뭐 특별한 게 있겠습니까. 허허. 다 거기서 거기인 게지요.”
그래서 윤 씨는, 계약서를 확인한다며 시간을 끄는 매수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빨리 도장을 찍게 만들고,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거 대충 읽고 도장 찍지. 젊은 놈이 뭐 이렇게 의심이 많아?’
그런데 매수자가 계약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을 때.
윤 씨의 이 조급한 마음은, 당황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런데 말입니다, 윤 사장님.”
갑작스레 그를 부른 매수자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을 얘기했으니 말이다.
“네……? 말씀하십시오.”
“여기, 잔금 날짜를 보면. 2주 뒤로 되어있는데…….”
“그……렇죠?”
“이게 너무 빠듯해서요.”
“그, 그런가요?”
윤 씨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제가 지금 다른 물건이 팔려야 잔금이 납부 가능한데……. 혹시 잔금 일정은 4월 이후로 잡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
사실 잔금 일정까지 2주로 잡혀있는 것은, 일반적인 부동산 계약에서도 엄청나게 짧은 시간이다.
일반적으로 중도금까지 한 달. 다시 잔금까지 한 달 정도는 잡아주는 게 보통이었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어리다 보니 윤 씨는 이 부분에서 태클이 들어올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고.
그래서 순간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윤 씨를 힐끔 응시한 우진이, 이번에는 그 옆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보통 이런 거래 할 때, 잔금 한 3개월 정돈 잡아주지 않나요? 그렇지 않은가요, 사장님?”
우진이 질문한 대상은, 매도인 측 부동산 사장.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기야 하죠. 사실 이 건은 매도인분이 돈이 급하게 필요하셔서 급매로 내놓으신 거라…….”
잠시 혼미한 표정이던 윤 씨가, 대화에 다시 끼어들었다.
“제가 3월 안에는 돈이 꼭 필요한 일이 있는데……. 어찌 안 되겠습니까, 대표님?”
윤 씨의 말에, 우진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3월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그리고 스마트폰을 열어, 뭔가를 확인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스마트폰으로 달력을 켜긴 했지만, 무슨 일정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상대의 애간장을 태우기 위해 매도 일정을 확인하는 척 연기를 했을 뿐.
하지만 우진이 생각에 잠긴 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지금 우진의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으니까.
‘일단 스타트 좋고.’
매수 목표가인 9억 천만 원.
이 물건의 값을 그 가격까지 깎기 위해, 가장 완벽한 설계를 짜야 했으니 말이다.
칼자루는 우진이 쥐고 있었고, 그래서 급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우진이 말을 멈춘 뒤 긴장 속에 정적이 흘렀고.
스마트폰을 덮은 우진이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부동산 거래를 하려 할 때, 현금 다 들고 사는 사람은 별로 없지 않습니까?”
“그, 그렇죠.”
“제가 지금 확보 가능한 현금이, 2억이 채 안 됩니다.”
“…….”
“내어놓은 부동산이 팔리면 그 돈으로 사려 했던 건데, 그게 아마 5월은 돼야 나갈 것 같거든요.”
9억 6천으로 내놓은 이 아파트에는, 현재 5억 9천만 원에 전세가 들어와 있다.
그러니까 현재 가격 기준으로 우진이 매수하기 위해서는, 3억7천만 원의 현금이 필요한 것.
취‧등록세를 포함하면 4억쯤이 필요한 셈이었으니, 지금 가진 현금으로는 매수가 불가능하다.
우진은 이 어필을 하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나 지금은 살 돈 없으니 배 째라는 식으로 얘기한 것이다.
“이, 이걸 어쩐다…….”
윤 씨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침음성이 새어 나왔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했고,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하지만 윤 씨의 머릿속이 아무리 복잡하다 한들, 우진은 그 속을 아주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실상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우진의 각본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아저씨 머리가 좀 잘 굴러간다면……. 아마 잔금을 미뤄줄 테니, 3월 전에 2억이라도 전부 달라고 하겠지?’
만약 2억쯤 먼저 받아둔다면, 소송에서 패소한 뒤에도 배액 배상은 불가능하다.
계약을 파기하려면 법적으로 그 두 배인 4억을 배상해야 했는데.
그만한 돈을 배상하느니 그냥 손해 보고 아파트를 매수하는 게 나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하는 듯했던 윤 씨는, 역시나 우진이 예상했던 그대로의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럼 대표님.”
“예, 말씀하세요.”
“제가 당장 필요한 돈은, 대표님께서 확보 가능하시다는 2억 정도로 일단 해결이 될 것 같거든요?”
“그런가요?”
윤 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네. 만약 계약금, 중도금으로 3월 내에 2억을 먼저 입금 주시면, 나머지 잔금은 4월이든 5월이든 미뤄드리겠습니까. 어떠십니까?”
너무도 정확히 예상대로 진행되는 상황 탓에, 우진은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려던 웃음을 간신히 참아내었다.
‘너무 멍청한 사람은 아니라서 다행이네.’
이제는 다시 우진이 연기를 해야 할 차례.
목적지가 코앞에 보이는 느낌이었다.
“하…….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우진이 한숨을 푹 쉬자, 윤 씨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본다.
“당장 2억 정도는 있다고 하신 것 아닙니까?”
우진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통장에 현금이야, 딱 계약금 10%만큼만 있죠.”
“네? 그럼 2억이라는 건…….”
“제가 신용대출이라도 끌어모아서, 확보 가능한 최대치가 2억이라는 겁니다.”
“아…….”
우진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자, 윤 씨의 표정에 다시 조급함이 드러났다.
이렇게 되면 윤 씨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자신의 돈이 급한 것 때문에 매수자에게 신용대출을 받으라고 해야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니까.
‘젠장 이걸 어떻게 얘기해야 하지?’
만약 매수자가 많아서 매도인이 갑인 상황이라면 상관없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 거면 사고, 아니면 말라고 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철저히 매수자 우위인 상황이다.
윤 씨는 지금 우진이 아니라면, 자신의 물건을 사줄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팔지 않고 보유한다는 선택지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진이 말을 멈춘 이 찰나의 시간 동안 윤 씨의 속은 타들어갔고.
그것은 잠시 후 좌절로 바뀌었다.
우진이 너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최악의 이야기를 꺼내었으니 말이다.
“정말 죄송합니다, 윤 사장님.”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사실 제가 매수 결정할 때도, 정말 고민 많이 했었거든요.”
“무슨 고민 말입니까?”
“아시다시피 조합이 소송에서 질 거라는 소문이 무성해서……. 아무리 급매로 싸게 산다고 해도 사실 매수 결정이 무서울 수밖에 없잖습니까.”
“아……. 그거야 조합장님께서 절대 그럴 일 없다고 말씀을…….”
우진이 윤 씨의 말을 자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신용대출까지 받아서 급하게 거래해야 한다면, 윤 사장님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어진 우진의 말에, 윤 씨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가 생각해도 이런 상황이라면, 거래를 포기할 것 같았으니 말이다.
“아…….”
여기에 우진은 결정타를 날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포기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
“정말 죄송합니다, 사장님.”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 우진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서 만약 윤 사장이 그를 잡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는 일이다.
어차피 다른 매수자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무조건 자신에게 다시 전화 올 수밖에 없었으니까.
물론 이 자리에서 잡지 않을 확률도, 희박했지만 말이다.
“자, 잠깐만요 대표님!”
“네?”
“제…… 제가 가격을 더 네고해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음……?”
“2억을 확보하시려면, 신용대출을 받으셔야 한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그럼 이자 부담도 생기실 테고 저 때문에 여러모로 손해 보시게 되는 거니까……. 천만 원 정도 싸게 드리겠습니다.”
윤 씨와 다시 눈이 마주친 우진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이제 게임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 * *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대표님.”
“네?”
“그걸 9억 초반까지 네고가 가능할 줄은…….”
“하하, 더 깎으려다 참은 겁니다.”
“…….”
“어차피 저 사람은, 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거래가 끝난 뒤.
청담부동산으로 돌아온 우진은, 김 사장과 차를 한 잔 마시고 있었다.
다음 일정까지 시간이 조금 비기도 하고, 김 사장의 꼼꼼하고 빠른 일 처리가 마음에 들기도 했으니 말이다.
남은 거래들도 이 사람과 함께 진행하면 더 수월할 것이라는 생각에, 친분을 좀 더 쌓으려고 생각한 것.
친분을 쌓고 싶은 것은 김 사장도 마찬가지였기에, 둘은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몇 채를 더 매수하실 생각입니까?”
“네. 사실 나오는 대로 다 매집할 생각입니다.”
“허…….”
“왜 그러세요?”
“자금력도 부럽지만……. 그 실행력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런가요?”
“사실 아무리 확신을 가져도 무서운 상황 아닙니까?”
“소송 말씀하시는 거죠?”
“예. 저는 돈이 있었어도, 대표님처럼은 절대 못 할 것 같거든요.”
“하하하.”
“역시 돈은 버는 사람이 버는 건가 봅니다.”
이야기를 더 나누다 보니, 김 사장은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다.
대화에서 특별히 가식 같은 것이 느껴지지도 않았으며, 일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히 프로패셔널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기분 좋게 대화를 하던 우진은, 그에게 말하지 않았던 한 가지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혹시 사장님.”
“예?”
“저 어디서 낯이 익거나 하진 않으십니까?”
“음……?”
사실 우진은 부동산 사장이건 매도인이건, 한 명쯤은 자신을 알아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최근 우진은 <우리 집에 왜 왔니>에 출연 하지 않은 지 꽤 오래 되었고, 그사이 알아보는 사람들이 부담되어서 머리도 짧게 짜른 상태였지만…….
시공사 선정 총회 날도 직접 단상에 올라 발표한 그였으니, 선영아파트의 조합원들이라면 알아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어도 상관은 없었다.
그냥 순진한 표정으로, 제가 직접 디자인하고 설계한 집에 살아보고 싶었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결국 아무도 우진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래서 조력자인 김 사장에게는 이야기 해주고 싶었다.
“시공사 선정 총회 때, 천웅건설의 설계안을 제가 발표했었는데…….”
“네……?!”
우진이 명함을 꺼내 들었다.
“WJ 스튜디오 대표, 서우진입니다. 이거, 몰라주시니 조금 서운하네요.”
비단 이번 일뿐 아니더라도, 청담동은 장기적으로도 항상 눈여겨봐야 할 훌륭한 입지를 가진 동네다.
일전에 문정동에서 친분을 만들어 뒀던 김 씨 아저씨처럼, 이번에도 장기적으로 인연을 이어갈 씨앗을 하나 뿌려둔 것.
‘그러고 보니, 청담 사장님도 김 씨네.’
우진의 이야기에 김 사장은 벙찐 표정이 되었고.
“아, 그……! 그러고 보니……!”
우진은 기분 좋게 웃었다.
“하하하. 지금이라도 알아봐 주시니 다행입니다.”
“미리 말씀하시죠! 이거 정말 대단하신 분이었네……!”
김 사장과의 대화를 마무리한 우진은, 그 길로 청담동을 빠져나와 다시 WJ 스튜디오 사무실로 향했다.
청담에서는 영동대교만 건너면 곧바로 성수동이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한 우진은 자판기 우유를 한 잔 뽑아 들고, 기분 좋게 대표실로 들어갔다.
‘좋아. 첫 단추는 아주 잘 꿰인 것 같고…….’
오늘 하루는 순조롭게 잘 지나갔지만,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나 다름없다.
부동산 김 사장에게 이야기해 뒀으니 조만간 거래 사실이 부동산 사이에 퍼져나갈 것이고.
그러면 이제 버티고 있던 비대위 인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물건을 팔기 위해 발버둥 칠 것이니까.
‘이주일. 아니, 일주일이면 싹 다 매집할 수 있을지도.’
3월의 셋째 주와 넷째 주는, 그렇게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4월의 첫날이 되었을 때.
WJ 스튜디오의 대표실 금고에는, 계약서가 정확히 일곱 장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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