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협상을 할 때에는
“하, 진짜 돌아버리겠네.”
누군가의 한숨 섞인 탄식이 새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다들 가격 너무 많이 내려서 내놓으신 것 아닙니까?”
“난 아닙니다. 이제껏 10억 밑으로 내놓은 적이 없어요.”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어질 때마다, 사람들의 언성이 조금씩 높아진다.
“어떻게든 10억 선에서는 버텨야 합니다.”
“그러다가 소송 결과 나와서 매수자들 다 돌아서면? 그때는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지금은 매수 대기자 있답니까?”
“한두 명 있는 것 같습니다.”
“……! 그 부동산이 어딥니까?”
“제 물건 먼저 팔고 나서 말씀드리지요.”
“하……. 이보세요, 김 사장님!”
도떼기시장도 이런 도떼기시장이 없다.
서로 삿대질을 해 가며, 얼굴을 붉히면서 언성을 높이는 모습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대위원장 권순현이,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후우. 이 양반들이 진짜……!’
비대위원들과 조합원들이 서로 언성을 높이는 것도 아니었다.
모두가 같은 편이나 다름없는 비대위의 인사들이, 서로 물건 가격을 내리지 말라며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팔라고 했을 때 미리들 팔지. 쯧.’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들 중에는, 일 년 전에 아파트 지분을 홀라당 팔아버린 권순현을 비웃은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권순현이 팔고 나서 1억가량이 더 올랐었다면, 지금은 이미 그때 팔았던 가격 아래로 다시 떨어져 내려왔다.
게다가 그조차도 호가일 뿐, 실제로 팔려면 일억 이상을 더 싸게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순현은 지금 언성을 높이고 있는 사람들이 짜증 나면서도.
한 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애초에 지금 다투고 있는 이 사람들은, 아주 우유부단한 인물들이었으니까.
‘개발을 반대하면서도 조합원 지위는 유지하고 있는……. 줏대라곤 쥐뿔만큼도 없는 사람들이지.’
재건축 사업에선 처음 조합이 설립될 당시, 입주민들의 동의를 일정 비율 이상 필요로 한다.
여기서 끝까지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은 조합원의 지위를 갖지 못하게 되어, 재건축 시 현금 청산자가 되고 말이다.
한데 지금 비대위원장인 권순현의 앞에서 싸우고 있는 이 사람들은, 전부 비대위의 끄나풀이면서도 그와 동시에 조합원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속으로는 개발을 반대하면서, 동의서에는 사인했다는 소리다.
그러니 사실상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인 것이다.
물론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조합장을 상대로 거하게 함정을 팔 수 있었던 것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후. 내가 참자, 참아. 일단 다독여서 회의는 해야지.’
권순현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아파트를 얼마에 팔든 관심이 없었다.
단지 시끄러운 입들을 좀 닫고, 회의에 집중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다들 너무 일희일비하지 마십시다. 이제 회의해야지요.”
권순현의 말에, 얼굴이 시뻘게진 남자 하나가 언성을 높였다.
“위원장님 재산 아니라고 너무 함부로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순현은 열이 뻗쳤지만, 화를 꾹 눌러 참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차피 소송 이기면, 그깟 일 이억이 대숩니까?”
“크흠…….”
“합의금으로 한 사람당 아무리 적어도 이십억 이상은 떨어질 겁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 싼 가격에라도 빠르게 팔아넘기시지요. 특히 박 교수님은, 저희 중에 지분도 가장 많지 않으십니까?”
“커, 커험.”
“승소하면 가장 많이 버실 분이…….일단 회의부터 집중하도록 하시죠.”
순현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일순간 시끄럽던 장내가 조용해졌다.
그리고 드디어 분위기가 잡힌 것처럼 보이자, 순현의 입이 다시 차분히 열렸다.
“당장 다음 주가 소송 날입니다, 여러분.”
“알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저희가 꼼꼼히 준비해둬야 할 부분은…….”
하지만 드디어 정상적으로 회의가 진행되나 싶던 순간.
띠리리리리-!
누군가의 휴대폰 벨소리가 갑자기 요란히 울리기 시작했고…….
“위원장님, 저 잠시만……!”
조금 전까지 언성을 높이며 싸우던 인물들 중 하나가, 전화기를 들며 후다닥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윤 사장님!”
“자, 잠시만요! 부동산 전화라서……!”
그리고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순현은,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기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아아…….”
* * *
청담부동산의 사장 김 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대표님! 말씀하신 대롭니다!]
“네?”
[205동 13층 물건 혹시 기억하십니까?]
“그, 33평형이요?”
[네, 대표님.]
“가격 내렸나요?”
[예. 말씀하신 대로 9억 중반까지 내려왔습니다. 9.6억이면 팔겠다고 문자가 왔거든요.]
“9.6이라…….”
[어떻게, 약속 잡아드릴까요?]
“흐음.”
[이 이하로는 힘들지 않을까 싶어서요.]
“확실히 싸긴 하네요.”
[그렇죠. 단기간에 2억이 내려온 가격이니……. 한번 진행해 보시렵니까?]
소송까지 일주일이 남은 시점.
선영아파트의 가격은 많이 떨어졌지만, 아직 우진이 생각했던 목표가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우진의 목표가는 8억 중반 정도였는데, 9.6억이 가장 싼 매물이었으니 말이다.
‘여기서 좀 후려쳐서, 일단 첫 번째 거래는 진행해 봐?’
사실 부동산 가격이라는 게, 거래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무한정 떨어지기는 쉽지 않다.
어쨌든 매도자들은 최신 실거래 시세를 보고 그것을 기준으로 자신의 물건을 올려놓기 마련인데, 이전거래가 여전히 고가에 있으면 내려서 팔더라도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낮은 가격에서 거래가 되어야 그보다 더 낮은 가격에 물건이 나오는 것인데.
어떤 물건도 팔리지 않는 상황이다 보니, 우진이 기대했던 것보다 내림 폭이 조금 좁았다.
‘더 기다리기보단……. 이제 액션을 취해줘야 맞겠어.’
우진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어차피 저들의 사정을 알고 있는 우진은, 매도자의 멘탈을 쥐고 흔들 자신이 있었다.
9억 6천 정도에 나온 매물을 잘 후려치면, 5천 정도는 더 싸게 살 자신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물건이 만약 9억 초반에 거래 완료가 된다면.
그것이 바로 신호탄이 될 것이다.
매물들의 가격이 줄줄 흘러내리는 시발점 말이다.
“약속 잡아주세요, 사장님.”
[아, 알겠습니다!]
“만나서 조금 더 네고해 보죠.”
[넵!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날짜는 언제로……?]
우진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하였다.
“이틀 뒤가 좋겠습니다.”
매도자가 심리적으로 충분히 쫓길 만한 적당한 시간.
이틀이라는 날짜를 얘기한 우진은, 그 뒤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리고 사장님.”
[예, 대표님.]
“이틀 안에 더 싸게 나오는 물건이 없어야 제가 계약한다고 했다고 얘기해 주십시오.”
그것은 협상을 위한 포석이었다.
* * *
부동산 김 씨는, 이번 손님이 참 특이하다고 생각하였다.
대화를 나눠보면 부동산에 대한 지식도 해박한 데다 자금력도 꽤나 커 보이는데, 나이는 아무리 높게 봐 줘도 20대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심지어 더 놀라운 것은, 소문이 퍼진 뒤 선영아파트의 시세가 정말 이 사람의 말처럼 흘러가고 있다는 것.
그래서 김 씨는 이 손님을 아주 단단히 쥐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난 경험상 이런 특이한 손님은, 거의 대박 아니면 쪽박이었으니 말이다.
평소에 눈치가 빠른 편인 김 씨는 자신의 눈을 믿었다.
“자, 빼먹은 건 없는 것 같고…….”
부동산 계약을 위한 서류들을 꼼꼼히 준비한 김 씨는, 그것들을 파일에 정리한 뒤 외투를 챙겨 입었다.
이어서 계약서에 잠시 눈이 닿은 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선영아파트 30평대를 9억 대에 계약하다니……. 나도 돈만 있었으면 하나 했을 텐데.”
김 씨가 향하는 곳은, 그의 사무실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동네 부동산이었다.
매도자의 물건이 그쪽에 나와 있어서, 계약을 거기서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그곳으로 향하는 김 씨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지금 선영아파트의 상황은, 사실상 매수자가 완전히 갑일 수밖에 없는 상태.
동네 부동산 중 거의 유일하게 매수 대기자를 보유하고 있는 김 씨는, 마음이 편한 것이 당연하였다.
딸랑-
문이 열리고 부동산의 안으로 들어서자, 매도자는 이미 자리에 나와 있었다.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
그는 무척이나 초조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초조할 수밖에 없겠지……. 이삼 주 동안 매수자가 전혀 나오지를 않았으니까.’
자리에 앉은 김 씨는, 매도자와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우진이 도착하였다.
“아, 오셨습니까, 대표님.”
“네 사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하.”
김 씨에게 기분 좋게 인사한 그는, 자리에 앉기 전 매도자와도 악수를 나누었다.
김 씨는 그런 그를, 의뭉스런 표정으로 슬쩍 응시하였다.
‘과연 이제부터 어떻게 하려나.’
만약 별다른 이슈가 없다면, 매도인이 얘기한 9.6억이라는 가격 그대로 자연스레 거래가 이뤄질 것이다.
하지만 분명 우진은 현장에서 조금 더 네고 하겠다고 했다.
김 씨는 그가 어떻게 자연스레 네고를 해낼지, 그것이 궁금하였다.
‘몇백 정도라도 더 깎아볼 생각이려나?’
김 씨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매도자 측 부동산의 설명과 함께,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부동산 거래절차가 진행되었다.
“하하, 그럼 일단 등기부 확인하시고……. 보시다시피 전세입자를 제외하면 근저당은 따로 설정된 게 없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김 씨는 조금씩 의아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네고를 하겠다던 우진은 단지 부동산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뭐지? 네고를 포기한 건가?’
그런데, 그렇게 김 씨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그때.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던 우진이, 드디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계약서에 대해 설명하던 부동산 사장이 아닌, 매도인을 향해서 직접 말이다.
“아, 그런데 말입니다, 윤 사장님.”
갑작스레 우진이 말을 걸자, 매도인 윤 씨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말씀하십시오.”
그런 그를 살짝 쳐다본 우진이, 계약서의 한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여기, 잔금 지급 날짜를 보면. 2주 뒤로 되어있는데…….”
“그……렇죠?”
“이게 너무 빠듯해서요.”
“그, 그런가요?”
우진의 말이 이어지자, 윤 씨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제가 지금 다른 물건이 팔려야 잔금이 납부 가능한데……. 혹시 잔금 일정은 4월 이후로 잡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잔금 일정 조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우진.
그 말이 끝나자마자 잠시 정적이 흘렀고.
그와 동시에 부동산 김 씨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미친……! 이 상황을 이렇게 이용한다고?’
우진이 어떤 방식으로 네고 하려는지, 그 마지막 말을 들은 순간 정확히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4월이면 소송 이후야. 그때로 잔금을 미루면, 매도자 입장에서는 곤란할 수밖에 없겠지.’
매도자 윤 씨는, 비대위가 승리할 거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 그의 입장에서 소송 뒤로 잔금이 밀리면.
우진이 계약금을 두 배로 뱉어내면서, 배액 배상을 하고 파기해버릴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윤 씨는 자연히 잔금 시점을 당기려고 할 것이고, 이제 그것은 우진의 무기가 될 것이다.
가격을 네고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 말이다.
부동산 김 씨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도 흥미진진하게 느껴졌다.
골든 프린트